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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의 끝
이디스 워튼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이른 봄날, 비온 뒤 쑥쑥 키를 높여가는 죽순의 허리를 뎅겅 잘라 손바닥에 문질러보면 아득하고 또 아득한 향기가 코끝을 찌르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다지 아름답다고 할 수도 없는 대나무의 비쩍 마른 허우대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가느다랗지만 질긴 대나무 뿌리를 생각해보는 일은 죽순의 은밀한 냄새를 맡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지요. 지진처럼 갈기갈기 찢겨진 삶의 괴로움을 땅속에 고스란히 품고 사는 이 메마른 나무의 고요한 울음을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 겁니다. 삶이란 갈등의 매순간이며 원하든 그렇지 않든 스스로 택한 길을 끝끝내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요.

  이러한 대나무를 닮은 뉴잉글랜드의 이선은 재능 있고 꿈 많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시골에 파묻힌 채 환자인 어머니를 돌보면서 모든 이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요. 결국 어머니가 병으로 사망한 뒤 어머니를 간호하던 먼 친척 여자와 결혼하면서 그의 꿈은 더욱 부르기 힘든 이름이 되어버렸고요. 결혼 후 아내마저 병에 걸려 이선은 궁지에 빠졌고 처음부터 애정이 없던 그들의 결혼은 그녀의 질병과 괴팍한 성격으로 더욱 악화되었지요. 그런데 바로 그때 아내의 조카인 매티가 고모를 돌보기 위해 이선의 집으로 온 겁니다. 이선은 열일곱 살의 매티와 금방 사랑에 빠졌어요.

  매티의 건강한 육체, 철모르고 발랄한 그녀의 순수한 영혼을 흠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처음 맛보는 사랑의 달콤함! 하지만 얼마 후 이런 사실을 눈치 챈 아내는 매티를 쫓아내려고 했지요. 이별의 슬픔에 절망한 두 사람은 함께 썰매를 타고 언덕 밑에 있는 느릅나무에 부딪쳐 자살을 시도하지만, 운명은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매티는 척추가 부러지고 이선은 절름발이가 되어 오히려 아내의 보살핌을 받게 된 거지요. 이선은 그렇게 고달픈 삶을 살아갑니다.

  신은 우리에게 숙명이라는 멍에를 씌우고, 갈매기가 비행을 유지해야 하듯 각자에게 주어진 잔은 마땅히 비울 것을 요구합니다. 이선은 사랑에 한번 몸을 담근 죄로 수십 년을 운명에 저당 잡힌 셈이지요. 무서운 일일까요? 아니면 비극적인 아름다움일까요?

  생각해보면 저 이선의 모습은 나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는 다 부질없는 옛이야기, 술상에 올라오는 시금털털한 안주 같은 이야기로 치부해버리고 말지만, 이따금 놓쳐버린 날들을 되새김질하려 할 때마다 저 생의 발가락 끝에서부터 아득아득 치통이 몰려옵니다. 모두가 사랑이었고, 모두가 사랑이 아니었지요.

  그해 겨울, 눈은 참 많이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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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1 세계신화총서 6
쑤퉁 지음, 김은신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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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가 빛을 잃어도 계속 나아갈 수 있는 건, 이 순간, 눈물의 불꽃이 찬란히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쑤퉁은 우리 내부에 언제나 빛나고 있는 등불이 있음을 확인해줬다. 오늘 밤, 눈물의 내부가 환하다.

<나, 제왕의 생애>가 아름답고 낭만적인 색채가 짙었다면, <눈물>은 비누가 흘린 다섯 가지 눈물의 맛처럼 우리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모든 색채를 갖고 있다. 내가 가장 놀란 것은 작가가 종잡을 수 없는 상상력의 말을 타고 천 리 길을 달리면서도 특유의 섬세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은 산해경을 떠올리게 하는 상상의 숲을 달려, 귀신과 인간이 갈라선 쓸쓸한 마을을 지나, 순수의 결정체인 눈물을 돈으로 착취하는 잔인한 자본주의의 허리를 꺾는다. 그러고도 말은 계속 달려, 결국 모래바람이 불고 장성이 흔들릴 때쯤엔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감동에 이르는데, 설화의 결말은 이미 났지만, 비누의 눈물은 여전히 그치지 않는다.

오래전, 나는 내가 도저히 닿을 수 없고, 만질 수 없었던 사랑 때문에 울었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무엇으로 나를 달랠 수 있었을까. 그때, 눈물은 눈으로 나오지 않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물기둥이 솟구쳤고, 우습지만, 그래서 나는 더 마음을 깨끗이 할 수 있었다. 또, 잠에서 깨고보니 두 눈이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던 경험이 있다. 다신 발을 담글 수 없는 아버지의 늪을 허우적거리다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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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사고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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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릭 모디아노의 신작 <한밤의 사고>는 한밤의 독서를 부른다. 그가 쓴 소설의 행간을 읽기에는 아무래도 내면을 고요히 응시할만 한 '한밤' 또는 '새벽'의 시간이 적절하다. 그럴 때 우리 머릿속에는 또하나의 사고가 촉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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