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문학동네 시집 58
강연호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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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여,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네가 온 줄 몰랐을 것이다. 네가 늘 내 옆을 서성이고 있었단 걸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까지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목숨을 부지해오면서 '자의식 과잉'이라는 말을 딱 한 번 들어본 적이 있다. 기억의 카타콤에서 불러올린 조각들과 현재의 부스러기들을 접붙여 썼던 소설을 평하는 자리에서였다. 그 말은 아마 맞을 것이다. 나는 그 전까지 자의식이라는 게 무척이나 병적이고 날카롭고 남들에게 불편함을 주는 그런 자기 비판이라고 생각해온 터였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그런 식의 노출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삶과 죽음, 절대적인 자유와 상대적인 억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 자의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군복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무렵이었다.

그때 강연호 시인의 시집을 읽었다.

그 시집에는 온갖 통증으로 범벅진 한 사내의 생애가 신음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달관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그건 죽음의 그림자를 흘깃 눈치 챈 자의 자세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의 시에 곡을 붙여 흥얼거리기도 했는데, 그는 내 노래가 맘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이 시집에는 병약한 심약한 사내가 행간을 활보하고 있다. 그는 여러 곳에서 출몰한다. 근 십 년 동안 아무도 발길하지 않은, 마지막으로 불을 밝혔던 게 근조등인 폐가에서, 바닷가에서, 교수실에서, 서재에서, 출근 길에서, 퇴근 길에서 그는 나직이 중얼거린다.

그 목소리가 낯익은 것은 나 역시 한 번쯤 되뇌어본 탄식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지금 아프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온전히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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