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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p13.
나는 사진이 절반을 차지하는 여행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종종 여행을 위한 책인지 책을 위한 여행인지 헷갈리게 한다. 그보다 나는 여행을 과시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종종 자신을 위한 여행인지 타인을 위한 여행인지 헷갈리게 한다. 여행을 과시하는 사람은 진짜 가진 게 없어서다. 그래서 나는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지 않는다. 기념품도 사지 않는다. 그건 여행에 방해만 될 뿐이다. 여행은 자유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글을 쓰는 건 좋아한다. 글은 사진이나 기념품보다 덜 사치스럽고 진지하고 사려깊다. 여행지에서 쓴 글은 거짓이 아니고, 그때의 글은 과시하기 위한 게 아니라 자기를 들여다보고 돌보기 위함이다. 우리의 삶 중 머리와 가슴이 가장 열려 있을 때는 여행을 하며 보내는 시간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곤 한다. 인생 중 가장 생각이 많아지는 시간. 어쩌면 평생을 살아도 해보지 못할, 혹은 못했던 생각을 그때 하게 될 수도 있다.
p36.
나는 한 번 봉인한 편지는 절대 열어보지 않는다. 밤새 쓴 편지를 아침에 확인하는 건 자기를 부정하는 행위다. 다시 읽어보면 과거의 잘못처럼 삭제하고 싶은 문장 한두 개쯤은 반드시 발견된다. 너무 감정에 충실해서 혹은 용기가 충만해서 생긴 증상이니 부끄러워하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밤에라도 용기를 가질 수 없다면 우리는 평생 비겁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p52.
신뢰가 깊어지면 지배가 되기도 한다.
p62.
진정한 외로움은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게 아니라 둘이 있어서 외로운 것이다.
p75.
예전에 어떤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면 건강이 좋아진다는 실험결과에 대한 기사였다. 기사에서 박사는 편지쓰기는 학생들의 성적 향상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우울증 감소와 면역력 향상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했다.
p77. <달과 6펜스>에서 나왔다는 구절.
남자가 망신을 당하지 않고 연애할 수 있는 나이의 한계 - 서른 다섯.
p101.
세상은 진실보다 거짓말이 통할 때가 더 많다. 거짓말은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만 몸은 편하게 한다.
p104. 지구가 날 끌어내린 것이다.
p111.
'과거는 현재를 위해 항상 봉헌되고, 현재는 미래를 위해 항상 희생된다.' - 희생된 나의 오늘은 나의 내일을 눈부시게 빛나게 해줄 것이다.
p123.
편지를 쓰는 이유.
- 받고 싶어서?
- 받았으니까?
p130.
인간이 가장 섹시할 때는 옷을 벗고 있을 때가 아니라 자기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이다.
p173. 각자에게 할당된 행복의 양이 정해져 있고, 그 행복을 자신의 의지대로 배치할 수 있는 거라면 그 행복은 앞에 놓는 게 좋을까? 뒤에 놓는 게 좋을까?
p186.
'우린 껌처럼 끈끈하게 붙어서 살자. 내 옆에 평생 있어줄래?'
→ '너란 애는 정말 껌처럼 끈질기구나. 지겨워! 이제 좀 떨어져줄래?'
p189.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상대방의 외모나 재능이나 능력을 빼앗을 수 없는 거라서 파괴하려고 한대.
p197.
헤어진다는 건 그런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기 전의 자기 상태로 돌아가는 것.
p204.
남들보다 오랫동안 가슴 설레여야 하고, 오랫동안 목 놓아 기다려야 하는 인고의 편지.
p231-p232.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된 데는 외모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필요하고, 또 있어야만 하는 거야. 그 이유들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본능에 집착하지 않고 살게 되는 거고, 외모에서 시작된 사랑은 오래가지 못해.
p237.
스탕달.
"썼노라, 살았노라, 사랑했노라."
p240.
다시 쓴다고 해서 어제의 그 감정과 느낌까지 다시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어제라는 시간에 한해서, 그 편지는 고유하다.
p243.
불쌍한데, 더 불쌍해.
<기억해두기>
- 751이 작가지만 자신의 책을 직접 팔러 다니면서, 다음 번 소설을 구상하는 것.
- '누락'되는 것에 대한 심한 거부반응.
- 아버지의 발명품이 탄생하는 시기, 집 안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시기랑 맞아떨어지며, 그 사건을 '부제'로!
- 수학 교사인 어머니의 별명 "벼락맞을 마귀할멈" 그 마귀할멈이 미술을 좋아하던 학생에게 한 짓!
-모텔의 방을 화가의 방, 철학자의 방으로 만들어 놓은 소설 속 배경. 그 안에서 주인공들이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고 한 주제모텔 "소설가의 방, 편지를 쓰기 위한 방"
- 와조의 이름의 유래. "도와줘! 나를 위해 와줘!"
-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고유의 번호를 부여해주는 소설 속 "0",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부여한 번호 "751"
- 성형 중독 여동생인 지윤이 수술 전 사진을 모두 불태운 것에 대한 연민의 시선으로 썼던 편지.
- 마지막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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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생각하는 점이 너무도 닮아 있어서 작가가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쓴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작가가 동향 출신이라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우스운 이유 때문일 것이라고 결론을 짓고.. 책을 덮고 다시 한 번 읽으면서 인상 깊었던 구절을 되짚어 보는데... 읽으면서도 생각한 것이지만 나 역시 "0"처럼 편지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읽는 내내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 일 것이다.
학생 신분을 벗어났기에 '취미'란을 적을 필요가 있는 순간은 이제 자주 못 만나보고 있지만, 취미나 특기를 적어야 할 때면 독서나 편지쓰기 둘 중 하나를 번갈아가면서 쓰는 나로서는... 여행이란 것도 무척 매력적인, 항상 바라고 바라면서도 감히 엄두를 못 내는 것이었기에.. 이 주인공이 떠난 3년간의 오롯한 편지 여행은 정말 질투날 정도로 부러운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마지막에 영화 속 반전!처럼 등장한 주인공의 사연 때문에 그는 떠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겠지만... 흔히들 사진을 찍으면서 떠나고, 떠나있기 마련인 여행지에서 글을 쓰는 것이 "덜 사치스럽고 더 진지하고 사려깊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기에 '여자'라는 이유로 두려워 미뤄두기만 한, 그러나 항상 가고 싶었던 혼자하는 자유 배낭 여행 계획(편지도 쓰고 책도 읽으면서 하는 여행)을 어서 세워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주인공처럼 편지를 전하고 싶다. 소중한 사람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