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들은 살상용 핵무기를 자체 조달하고 비축하는 데에 대한 자기 나름의 정당화 논리를 구축해 놓고 있으며, 그 논리의 당위성을 만방에 열심히 홍보하고 있다. 항시 가상 적국의 문화적 하자를 지적하고 그들이 저지를지 모르는 비이성적 행태를 상정하여 사람이 아직 갖고 있는 파충류의 뇌를 자극하는 데 유효적절하게 활용함으로써, 자국민을 파충류적 행동 기제로 몰고 가고는 한다. 자국은 상대국과 달리 문화적 하자가 없고, 타국을 해칠 의도가 없으며, 건전한 세계 시민으로서 세계의 정복 따위는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국가에는 결코 실현돼서는 안 되는 일들의 목록이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목록에 들어 있는 일들이 일어나도록 결코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것이다. (구)소련의 경우 자본주의, 신앙의 자유 등이 그 목록의 주요 내용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사회주의, 무신론 등이 그것을 대신한다. 국가 주권의 포기는 양쪽 모두의 목록에 공통으로 들어 있다. 세계 어디에서든 우리는 똑같은 노지의 주장을 귀 아프게 들을 수 있다.p.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