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손에 모두 다섯 개의 손가락이 달려 있는 것은 인간이 데본기에 번성했던 지골이 다섯개인 어류에서 진화했기 때문이다. 지느러미에 뼈가 다섯 개 있는 어류가 우리의 조상이라는 이야기이다. 지골이 여섯 개인 어류에서 진화했다면 지금쯤 우리 손 하나에 손가락이 다섯 개가 아니라 여섯 개씩 달려 있었을 것이며, 아무도 육손인 사람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을 것이다. 지골이 넷인 어류에서 진화했다면 네 개의 손가락으로 자연스럽게 살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십진법을 쓰는 이유도 한손에 다섯개씩 모두 열개의 손가락이 있기 때문이다. 손가락이 열 개가 아니었다면 팔진법이라든가 십이진법도 가능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팔진법을 쓰는 사람들에게 십진법으로 된 숫자를 주면 그들은 번거롭게도 그것을 환산을 해야 한다. 즉 십진법은 새로운 수학의 범주로 밀려날 것이다. "
손가락뿐만 이나라 인간이라는 존재의 여러 다른 근원적 구조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를테면 유전적 재질,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생화학적 반응, 신체의 형태, 자세, 각종 장기의 구조, 사랑과 증오의 감정, 열망과 절망의 염, 상냥한 성격과 공격적 성향, 심지어 우리 인식의 분석 과정에까지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의 근본이, 아니 근본의 적어도 일부분이 진화의 오랜 과정에서 겪었던 겉으로는 사소한 사건들의 누적된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석탄기에 잠자리가 늪지에 한 마리만 덜 떨어졌더라면 지구 위를 누비는 지 적 생물은 깃털을 단 새로서 현재 땅까마귀들이 사는 집과 같은 곳에서 새끼를 키울 것이다. 같은 엉뚱한 상상도 가능할 것이다. 인과율이 초래한 진화의 결과는 얽히고설켜 있다. 우리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수준으로 복잡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 앞에 스스로를 낮추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p.4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