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저무는 즈음이면 생각나는 책이 있다. 스위스 출신의 페터 빅셀 산문집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가 그것이다. 며칠 전 책장에서 꺼내어 마음 가는 대로 펼쳐 보았다. 군데군데 그어진 밑줄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이 책을 읽었구나! 언젠가 읽고 싶은 책으로 떠올리곤 했는데.’ 괜스레 입맛을 다시지만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다. 어설픈 독서가로 살다보니 종종 직면하는 상황이다. 이젠 제법 이력도 생겨 나의 평범함과 화해하며 산다.

 

시간이 아쉬운 연말이라 책을 완독할 생각은 없었다. 책 제목으로 선정된 글이라도 읽고 싶어 목차를 살폈다. 표제와 같은 제목의 글은 없었기에 마음이 끌리는 글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향수>를 펼쳤다. 연말에 어울리는 주제라 여긴 한편으론 연말이 아니어도 선택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가령 다가올 것들에 대한 희망이라는 글이 있었다고 해도 나의 선택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 추억의 인물을 한 명 소개했다.

 

나는 에밀을 존경했다. 그는 내 눈에 진정한 어른이었다. 알아야 할 것을 모두 아는 사람. 그리고 시간이 많은, 그것도 아주 많은 사람. 나는 에밀과 같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 그는 나에게 많은 영향을 준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예를 들어 역에 있을 이유 없이, 그러니까 특별히 하는 일 없이, 감탄하며 무언가 구경하거나 자세히 관찰하지 않고서도 그저 거기서 서성이는 법을 배웠다. 그냥 여기 있기, 그냥 존재하기, 그냥 살아 있기.” 

 

밑줄을 그어 놓은 대목인데 이번에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에밀에 대한 소개는 더 이상 하지 않으련다. 행여 책을 읽게 될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고 애초부터 책을 소개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왜 이 책이 떠올랐는지 내 생각을 잠깐 살펴보고 싶었을 뿐이다.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은 오래 전부터 꿈꾸어 온 나의 바람이기도 했다. 시간이 많은 어른은 대체 어떤 어른일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자마자(어쩌면 던지기도 전에) 양극적인 모습이 동시에 떠올랐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읽었던 책들(주로 미국에서 건너 온 자기경영서들)에 따르면 능력 있는 이들은 바쁜 사람이었고, 바쁘게 사는 이들은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많은 사람은 곧 무능력한 사람이었다. “요즘 많이 바쁘시죠?” 라고 인사하는 분들을 종종 만난다. 진의가 따로 있으면 모를까, 대개는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의 표현이리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느라 삶의 질이 많이 떨어지셨군요.” 이런 유의 빈정거림은 아닐 것이다.

 

스위스의 국민 작가가 염원한 시간이 많은 어른은 내가 읽었던 책들이 말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자신만의 안식처를 찾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벡셀은 이렇게 썼다. “기차역은 내가 도주할 때면 찾아가는 목적지가 됐다. 기차 여행은 나를 역으로 데려다주었다. 슬픔이 나를 역으로 이끌었고, 분노와 기쁨도 그랬다.” 나름의 생각을 이어갔다. 시간이 많은 어른은 슬픔과 분노를 달랠 줄 알며 자신의 기쁨을 향유하는 인물일 거라고, 그리고 이것은 얻기 힘든 미덕이라고.

 

나는 매년 12월만이라도 시간이 많은 어른으로 살고 싶었다. 여유롭게 한 해를 성찰하면서 읽고 싶은 책들을 읽기, 마음 맞는 이와 술잔을 기울이며 고마움을 전하기, 묵은 물건들을 솎아내고 공간을 새로운 분위기로 정리정돈하기. 연말을 이렇게 보내길 바랐다. 나에게 시간이 많은 어른이란 과거와 미래 사이의 좁은 틈, 현재로 파고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12월이라는 현재를 멋지게 살아내는 지혜를 꼽자면, 나는 성찰과 감사보다 귀한 것을 알지 못한다.

 

바라던 송년의 모습을 실현한 해는 많지 않았다. 때때로 연말은 가차 없는 폭군이 된다. 시간을 송두리째 빼앗거나 제멋대로 주무른다. 자칫 방심하면 정신없는 연말을 보내기 일쑤다. 분주하게 보냈던 예년의 불찰을 경계한 덕분일까. 올해 연말은 흡족한 시간들로 채워냈다. 고요하고 평온했다. 연말을 어떻게 보냈는지 돌아보았다. 한 해 동안 읽은 책들을 정리했다. 해가 바뀌기 전에 마저 읽고 싶은 몇 권의 책을 부지런히 읽었다.

 

한 해를 수놓은 십여 건의 일들을 돌아보면서 하나하나 적합한 키워드를 선정해 제목으로 붙여 두었다. 친구와 이틀 동안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온천에서 몸과 마음을 녹이며 서로의 한 해를 이야기하고 기쁜 일을 축하했던 시간이었다. 날마다 정리정돈을 행했더니 집안이 조금씩 살뜰해졌다. 여유를 누렸던 몇 주를 보내고 난 어느 날, 반가운 단상이 찾아들었다. 나에게 시간이 많은 어른이란 한가한 사람이기보다는 소중한 일에 빠져드는 사람이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샐리 티스데일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1장을 읽었다. 잠깐 책 바깥 얘기부터 해야겠다. ‘죽음’을 다룬 책들은 여러 세부 주제로 나뉜다. 분류 기준도 다양하다. 죽음 이전, 죽음의 순간, 죽음 그 이후 등 시기별로 구분하거나 상실, 웰다잉, 애도 등 죽음을 둘러싼 주제별로 구분하거나.


가령, 필립 로스의 소설 『에브리맨』은 죽음을 앞둔 한 노인의 육체적 정신적 쇠락을 고통스럽게 묘사한다. 죽어간다는 것의 고통스러운 실제를 구체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죽음의 실제가 어떠한지 손에 잡히게 만드는 이야기다. 


덴도 아라타의 소설 『애도하는 사람』은 소중한 사람의 사망으로 비탄에 잠긴 이들을 위로하는 이야기다. 작가는 이 세상에 꼭 있었으면 하는 사람을 제목으로 지었다. 죽음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을 애도하는 주제로 풀어낸 이야기다. 


죽음을 다룬 논픽션 역시 여러 세부 주제로 나뉘어질 것이다. 내 서재에는 웰다잉, 애도,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유에서부터 안락사와 자살까지 다양한 책들이 꽂혀 있다. 스물 다섯 살 무렵부터 종종 죽음 관련서를 읽어왔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의 주제는 웰다잉이다. 1장은 긴 에필로그에 해당되는 내용이었다. 저자는 분명히 밝혀 두었다. 죽음에 대한 멋들어진 얘기나 명상에 관한 얘기는 없다고.


“이 책은 오로지 죽음을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을 다룬다.”(p.32)

“이 책은 당신 자신의 죽음은 물론이요 당신과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책이다.”(p.28)


죽음 이전의 문제들이 아니라 사별 이후의 힘겨움을 완화시키고자 하는 나로서는 번지수를 잘못 찾은 셈이다. 그렇지만 계속 읽어갈 생각이다. 문장이 뛰어나거나 기막힌 표현은 없는데(저자의 문장력이 빈약한 탓인지 번역자의 실력 탓인지는 모를 일이다) 1장을 읽고 나니 작가에게 호감이 생겼다. 예상치 못한 길에서 진정한 해방구를 찾기도 하니까.


나의 호감은 작가가 효과적으로 1장을 써낸 덕분이리라. 그녀는 덤덤하게 자신의 이력을 밝혀 두었다. 그녀는 대학 때 해부생리학을 수강하면서 수많은 죽음(정확하게는 사체들)을 만졌고, 간호사이자 임종 지도사로서 죽음을 가까이에서 목격했다. 『숨결이 바람될 때』에 나오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배움과 직업 그리고 독서를 통해 죽음을 탐구해 왔음을 넌지시(그래서 믿음직스럽게) 알렸다. 호들갑스러움은 종종 빈약함의 표지가 아니던가. 


1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절을 옮겨 둔다.


“그때는 죽는 게 무척 두려웠다. 끔찍하리만치 무서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죽음을 똑바로 바라보고, 만져보고, 죽음에 대해 생각해봤기 때문이다. 경험이 중요하다. 직접 경험해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 죽음 자체에, 당신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에 좀 더 편해지고 싶으면, 그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저자처럼 되고 싶다는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킨 문장이다. 동시에 죽음이 편안해지는 경지(?)를 꿈꾸어 보자고 생각했다. 회의감도 들었다. 죽음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면 편해지기도 하겠지만 트라우마를 남기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하는. 


- 2019. 9. 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디세이아』 1권부터 4권까지의 주인공은 오디세우스가 아닌 그의 아들 텔레마코스다. 아들은 아버지의 생사 여부와 귀향 소식을 듣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아테나 여신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텔레마코스를 열정적으로 도왔다. 그녀는 곳곳에서 활약했다. 실질적 주인공이 아테나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아테나는 1권에서 텔레마코스에게 지혜를 전수하고 용기를 북돋웠다. 특히 253행부터 305행까지 이르는 당부는 감동적이다. 따뜻한 공감, 구체적인 조언, 도전적인 당부, 섬세한 칭찬, 비전의 제시가 담겼다. 일부를 옮겨 둔다.


“내 그대에게 이르노니, 그대는 어떻게 해야 구혼자들을 궁전에서 내쫓을 수 있을지 잘 생각해보시오.”(270행)


“그대의 결심을 말하되 신들을 증인으로 삼으시오.”(273행)


“그대는 더는 어린애 같은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되오. 그럴 나이는 이제 지났소.”(296~297행)


“용기를 내시오. 후세 사람들이 그대를 칭찬하도록 말이오.”(303행)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점에서 스티븐 그린블랫의 신작을 발견하자마자 집어 들었다. 구매는 당연했다. 역사 서술의 경이를 만끽하게 했던 『1417년 근대의 탄생』을 쓴 저자니까! (게다가 정영목 선생의 번역이다.) 흥분과 설렘을 느끼며 계산대로 향했다. 책값만 치렀을 뿐인데 행복감을 덤으로 받았다.


cf. 『1417년 근대의 탄생』에 대한 나의 열정적인 한 마디! “이 책을 읽고 나면 르네상스가 무엇인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보문고 합정점에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라는 책을 구입했습니다.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실질적 조언." 내용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만드는 책의 부제입니다. 이 딱딱한 문구에 이끌려 선택했네요. 나에게 죽음이란 단어는 머릿속 관념이 아니라 일상 곳곳을 점령하고 있는 실체거든요. 정의나 용기 같은 ‘개념어’가 아니라 어제 만난 친구처럼 또렷한 ‘기억’이고 창밖의 밤나무처럼 눈에 보이는 구체적 ‘형상’에 가깝습니다.


아, 삶의 소중함을 깨닫거나 현재에 몰입하기 위한 예비 단계로써 죽음을 사유하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메멘토 모리라는 라틴어 금언을 곱씹거나 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의 첫 번째 장을 읽는 것처럼 말이죠. 저의 애장 도서인, 그래서 기억하고 있는 이 책의 표현 하나는 적어 두고 싶네요. “죽음이 임박할 때에서야 갑자기 찾아드는 삶에 대한 애착”)


소중한 분들의 죽음을 여러 차례 경험했습니다(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의 선생님 그리고 두 명의 친구). 어떤 임종은 마지막 표정이 뇌리에 깊이 박혔고, 어떤 죽음은 수년 동안 힘들고 슬펐습니다. 요즘도 사별의 아픔과 허전함을 일상 곳곳에서 불쑥 불쑥 느끼며 살고요. 사별이야 누구에게나 벌어지는 일이지만 이 모든 사별을 젊은 나이에 경험해서일까요? ‘내가 잘 이별하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충분히 애도하는 것의 중요성을 뒤늦게야 깨닫습니다.


죽음을 다룬 훌륭한 책을 발견하면 구입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당장 읽지 못하는 상황일 때에도(직면이 두렵거나, 바쁜 시기이거나) 지나칠 수가 없네요. 그렇다고 해서 죽음을 다룬 명저들을 일별하면서 신중히 장서를 구비해온 것은 아닙니다. 서점 나들이를 하면서 만나거나 인터넷 서점을 노닐다가 발견하면 그냥 지나치지 않은 수준이죠. 마음먹고 저의 사별들과 대면할 작정은 아직도 하지 못한 겁니다.


제 인생에 벌어진 죽음에 직면하는 일이 구체적이고 절실한 문제라 생각하면서도 실제로 어떤 행동을 취하지는 못했습니다.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슬픔이 몰려와 일상이 멈춰 버리더군요. 며칠에 걸쳐(어쩌면 몇 주 동안) 애도할 여유와 자신도 없었습니다. 지혜로운 용기가 필요한 일인데 지혜는 머나먼 메아리처럼 들리고 용기 앞에서는 작아지고 마네요. 사실 지혜까지는 바라지도 않죠. 삶의 희열과 생의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회복하고 싶을 뿐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는 죽음에 관한 에세이집입니다. 에세이 읽기는 이론서와는 다른 종류의 유익을 주더군요. 이론서들이 명쾌하게 따를 지침이나 조언을 안긴다면 에세이는 어깨를 다독이는 느낌입니다. '여기 또 한 사람이 있구나' 하는 동료의식과 '내 문제와 씨름해야겠다'는 (창조적 의미에서의) 투쟁심이 생겨요. 어떤 싸움은 승패의 결과보다 샅바를 놓지 않는 과정이 중요할 텐데, 그런 투지를 발휘하고 싶어지더군요.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는 순간, 제목과 부제뿐만 아니라 띠지까지 시선을 끌더군요. “뉴욕 타임즈 평론가들이 선정한 2018년 올해의 책”이란 문구가 구입을 한몫 거들었습니다. (띠지에 관심이 가는 일도 있긴 하네요.) 저는 교보문고 베스트셀러보다 스테디셀러나 언론사가 선정한 올해의 책을 더 즐기는 편이더라고요. (2004년을 전후로 수년 동안 베스트셀러와 올해의 책이 얼마나 일치하는지 조사한 적이 있는데 15~30% 선이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검증된 책이라는 다소 성급한 판단으로 책을 펼쳐보지도 않고 구입했습니다.


삶의 문제를 뒤로하고서 책 속으로 도망갈 생각은 없습니다. 종종 그러고 싶어서 새로운 분야의 책을 찾기도 있지만 그런 와중에도 외면을 시도하는 저를 인식하곤 했습니다. 인식한 대로 행동을 바꾸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는 부끄럽지만 말이죠. 어떻게든 살아있다는 생동감을 되찾고 싶은 마음으로 또 한 권의 책을 서재에 꽂았습니다. 마음속의 저항을 몰아내고, 절실한 순서대로 책을 읽는다면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