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신불 - 김동리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3
김동리 지음, 이동하 책임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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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명이란 것을 믿지 않는다. 운명이라는 것은 마치 나의 의지를 나약하게 만드는 것 같기 때문이다. 미래는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믿는다. 등신불을 읽었다. 김동리의 소설을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소설을 보면 토속적이고 민속적인 면이 저변에 흐르는 듯하여 반갑고도 편안하다. 다만 그의 소설을 읽을 때면 허무주의가 더 맞겠다.

그런 느낌이 들어 가슴 아픔과 저림을 함께 느끼곤 한다. 등신불은 부처가 된 아니 부처라고 사람들에게 불리게 된 이의 이야기다. 들기름을 몸에 부어 절여서 점점 화석이 되게끔 만든 후 나중에 몸을 불살라 몸을 부처님께 공양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타고 남은 그 몸에 금박을 붙여 금불상을 만들어 후세에 부처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그게 바로 등신불. 문제는 그렇게 자신의 몸을 불살라 공양하게 된 계기가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운명 때문이었는데 그리하여 그 불상은 부처의 여유로움과 너그러움과는 거리가 먼 묘한 표정을 짓게 된다.

인간의 허무와 한계라는 것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비록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인공위성을 날리는 시대를 산다 하여도 인간의 사고에서 오는 운명에서 오는 그 한계는 과연 시대가 흐른다 하여도 풀리게 되는 것인지 의문이 온다. 벗어나고자 하나 벗어날 수 없는 한계에서 우리는 간혹 풀썩 주저앉기도 하고 때론 마음속이 오기와 독기로 가득 차기도 한다. 때로는 풍자나 해탈로 모든 것을 극복하려는 또는 회피하려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허나 풍자와 해탈로 독기와 허무로 삶을 설명하고 또 전부가 될 수는 없을 듯 싶다.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에서 나타낸 인간의 운명에 대한 한계성에 대한 허무주의는 그래서 아쉽기만 하다. 비록 그 소설이 어떤 문학사적 가치를 지녔고 또한 아름답고 잘 지어진 소설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는 어쩌면 지나친 낙관주의로 비춰질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 낙관주의가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한 방편이 될 수도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곳곳에 자신의 의지가 꺾여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눈에 자주 띈다. 그 사람들 중에 내가 있기도 하고 내 주변에 그 사람들이 있기도 하지만 하늘이 높고 구름이 아름답다. 이제 한번 하늘을 바라보고 어깨를 필 필요성을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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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CE - 화보집 + 엽서 포함 디지팩 양장케이스
올리버 스톤 감독, 콜린 파렐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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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를 봤다. 무려 세 시간에 달하는 상영시간이 고문의 시간과도 같았다. 플레툰과 JFK 그리고 도어즈를 만든 올리버 스톤의 작품이라곤 생각하기 힘들었다. 예술적 상상력은 사라지고 알렉산더의 일대기를 주절거리는 내용에 세 시간이나 투자할 수 있었다는 것이 대단한 용기로 보인다.

반복적인 감상적 대사, 즉 운명은 용기있는 자를 선택한다란 말 속에 감독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는지 되묻고 싶다.

추측컨대 감독은 영웅으로서의 알렉산더가 아닌 영웅이 되려고 했던 알렉산더의 개인적 고뇌와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어서의 슬픔을 전하고 싶어한 듯하지만 도대체 그런 작업이 왜 필요한가? 또한 큰 꿈을 가진 자와 그 꿈을 실현하는 장애를 극복해 가는 과정에 얻을 감동을 전하고자 한 듯 싶지만 그건 여지없이 실패한 듯 싶다.

우선 알렉산더의 개인사와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고독과 외로움은 지나친 감상주의다. 또한 알렉산더의 커다란 짐으로 묘사되는 모친의 행동과 그로 인한 알렉산더의 심리적 갈등은 세밀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이질적이다. 모친의 정신병적 행동의 원인으로 알렉산더의 부친인 필립과의 갈등을 단편적으로 소개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모친의 정신병적 행동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더군다나 필립의 사망 후에도 계속되는 모친의 행동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알렉산더의 해외 원정 이유를 잠시 어머니로부터의 도피로 설명한 장면들이 보이니 이 또한 우습다. 계속된 알렉산더의 해외원정 이유를 알렉산더의 모험심 내지는 도전 정신으로 설명하다 요즘 말로 쌩뚱맞게 어머니로부터의 도피로 설명하는 것은 가당찮다.

영화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을 미지 세계의 정복자로서의 고귀한 행동으로 묘사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감이 없지 않으나 세계를 하나의 시민으로 만들려는 알렉산더의 의지는 마치 요즘 말하는 세계화를 의미하는 듯 하여 마치 서구 신자유주의자들의 세계화 이념을 전파하려는 내용과 같아 안타깝다. 이는 나의 호들갑스런 판단이 아니다. 왜냐하면 영화와 같은 문화 매체야말로 실상은 이념의 전파에 있어 최첨병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거 문화 매체를 통해 자기 이념을 각국에 이식시킨 과거 역사가 증명한다. 소영웅주의적 가치를 나타낸 록키나 세계의 중심으로의 미국을 나타낸 인디펜던스 데이, 그리고 애국적 정신을 강조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대표적 예에 해당한다. 마찬가지로 알렉산더의 내용 역시 감독이 의도를 했든 안했든 그 속에는 신자유주의적 가치가 지배하고 있고 또 그것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이것이 이 영화의 실패 이유 두 번째인 것이다.

물론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드러냈다고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치 알렉산더의 세계정복이 왜 그토록 위대한 가치인지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이외의 세계를 미개한 나라로 설정하고 정복한 곳에 그리스식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마치 은혜를 배푸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은 그야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중간에 알렉산더의 행동은 문화우월주의를 경멸하는 것처럼 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디테일한 것에 불과하며 근복적으로 알렉산더 역시 세계의 중심은 자신의 세계였다.

정리하자면 영화는 알렉산더의 세계정복 사실만 강조하여 세계정복 과정은 사라졌고 다만 세계정복의 이유가 알렉산더의 모친에 대한 도피와 세계정복에 대한 알렉산더 개인의 갈망이었다는 내용뿐이다. 문제는 모친으로부터의 도피였든 개인적 갈망이였든 명분없는 전쟁조차 단지 결과론적으로 대제국을 이룬 사람이면 신화가 되고 또 영웅이 된다는 듯한 태도다. 더구나 그 태도에 대한 방어책으로 원래 영웅은 외롭기 마련이다란 설정 역시 그 내용에 있어 빈약함을 극명히 드러내고 있다.

여하튼 2005년 1월 1일 첫날부터 본 영화가 이런 영화였다는 것이 유감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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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김탁환 지음 / 동방미디어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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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어투가 있다는 것-소설가는 문체라고 하겠지만-그것은 대단한 재능임이 틀림없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생활에서 성장과정에서 혹은 타고난 재능에서 얻어진 것이라면 행운이라 불려도 좋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는 그렇다. 자신만의 문체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그런 재주를 지닌 소설가. 여기서 문체라는 것은 단순히 어투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안목도 그리고 소설을 씀에 있 어서의 태도도 포함하는 것이다.

나, 황진이란 소설을 읽고 한참을 감동에 휩싸여 그의 글을 찾아 읽겠다고 다짐했었다. 그의 비평도 읽어 보았고 드디어 또 다른 소설 한 권을 읽었다.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이 바로 그 소설이다.
     
마치 삼류 연애소설 같은 제목이 마치 어설픈 유언장 같은 제목이 눈에 거슬렸지만 소설의 이야기 전개 내내 그 제목의 뜻을 유지하면서 맛깔스런 그의 입담을 늘어놓고 있다. 저자가 말했던 추리소설의 형식을 통해 결국엔 인간을 이야기하는 소설이었다. 저자는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충분히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개인적으로 스케일이 크고 주제가 큰 소설을 즐겨 읽긴 하지만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그런 소설들은 소설가가 그의 이야기에 휩싸여 작가가 작품을 이끌지 못하고 휩싸이는 형국을 나타낸다. 소설은 말이고 작가는 그 말을 이끄는 사람이다. 훌륭한 작가는 그 말을 부려 자신의 의도대로 가고자 하는 곳을 갈 수 있어야 한다. 말이 난동을 부려 엉뚱한 곳으로 간다면 훌륭한 마부가 되지도 못하고 목적지에도 도착하지 못한다. 마부와 마부의 재량에 맞는 말이 중요한 것이지 아무리 천하의 명마라 해도 마부가 말을 통제하지 못하면 그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된다. 하여 소설가는 소설을 쓸 때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을 이야기로 써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김탁환은 그 말의 습성을 알고자 끊임없는 노력을 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여기저기서 수줍은 듯 드러나는 고증을 통한 인용은 그의 소설이 힘을 갖고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게끔 해준다. 단순히 그의 문체는 여성스럽고 아름답지만 그의 글 전체가 커다란 힘을 느끼게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요즘 많은 소설가들이 글을 쓰는 것을 너무도 쉽게 생각하고 소설의 상상력이라는 것을 무기로 하여 무책임하게 글을 쓰는 듯 하여 안타까운 이때 이것이 바로 그의 소설에 애정을 갖게끔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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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사람들
임상수 감독, 백윤식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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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다음 날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이란 영화를 봤다. 연휴라는 기간 때문인지 영화의 특성 때문인지 다른 때와 달리 어르신들이 많았다. 또 영화를 보는 내내 산만했다. 영화를 다 본 나는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나 역시 박정희에 대해 호의적인 사람이 못 된다. 어쩌면 적대적이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의 경제성장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 어떤 나라도 해내지 못했던 경제성장을 이룩한 점은 분명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경제발전과는 다른 이야기다. 왜냐하면 경제성장은 단지 국민총생산량이라는 단일 기준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전이라는 것은 단순 생산량뿐 아니라 앞으로의 지속성장가능성 및 자원의 효율적 분배 등과 같은 여러 요소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어쨌든 백번 양보해서 그가 한 경제성장을 발전이라는 데 동의한다고 치자.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성장이든 발전이든 그 이면에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누나 형의 피와 눈물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경제성장이 급한 문제라 치더라도 그 성장이 내 형제를 전쟁터에 팔아서 또는 내 누이를 창녀촌에 팔아서 또는 죽여서 이룩한 성장이라면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도둑질을 해서 혹은 강도질을 해서 부자가 된 것을 존경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사실 이 영화는 나에게 무척이나 재미있는 유머로 다가와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혼란으로 다가온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설마 이 영화의 상영 금지를 주장하는 이들처럼 나 역시 현실과 픽션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것일까? 그러나 그것 또한 말이 안 되는 것이 판사 영감의 판결로 혼란을 줄 수 있는 부분인 다큐멘터리를 삭제하고 방영한 것이 아닌가?

영화의 혼란은 영화 자체에서 온 것이 아니다. 사실 그 영화는 상영 금지를 주장하는 이들처럼 명예훼손을 하려는 악의적인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예훼손을 할까 전전긍긍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영화는 줄곳 지루한 톤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만약 한석규와 백윤식이라는 배우가 없었더라면 그 영화를 끝까지 보는 것조차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영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영화를 둘러싼 정치권 및 여러 이해 당사자에게 있다. 영화를 보고 혼란할 수 있느니 없느니를 따지는 것은 과연 그 영화를 보고 하는 소리인지 묻고 싶다. 이미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의미를 부여한 사람들이라면 영화를 본 후에도 똑같은 소리를 되풀이하겠지만 객관적으로 지켜볼 때 요즘 사회에 그 영화 자체가 이슈가 되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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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유혹 - [할인행사]
장 프랑소아 뽈리어트 감독, 레이몬드 보챠드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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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유혹을 보았다. 오랜만에 유쾌하게 웃게끔 만든 그런 영화였다. 유머란 것은 이런 것이다, 라고 하는 듯 보였다. 약 120명의 노인만 남은 작은 섬마을. 그곳의 고민은 단지 작고 도시에서 얻는 편의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할 일이 없어서 연금이나 타서 생활비를 충당해야 하는 그곳은 자존심을 잃었다는 점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 저맹은 의사가 있다면 그 섬마을에 공장이 지어질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마을과 계약할 의사를 구한다. 공장이 지어진다면 다시 그 마을에는 아침에 일어나 직장에 가고 또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난 후 가정에서 얻는 달콤한 휴식.. 곧 마을에는 새로운 활기와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섬마을과 계약할 의사는 당연히 없었다. 편의시설도 없고 활력도 없고 또 돈벌이도 안 되는 그런 마을과 누구도 계약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한 달간 그 마을에 있게 될 의사를 구하게 되고 그 의사와 5년 장기 계약을 하기 위해 저맹을 중심으로 한 마을 사람들은 그 의사를 속이기 시작한다. 영화는 그 마을의 사랑스러움을 또 의사가 그 마을을 떠나게 하지 않기 위해 모든 마을 사람들이 그를 속이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유쾌하게 그려낸다.

그 사건 사건을 부담없이 즐기는 과정에서 난 그동안 잃었던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또한 그 영화의 종반에 치달으면서 남을 속이는 것에 대한 윤리적 고민을 살짝 곁들이기도 한다. 그 의사는 도시 사람들의 영악하고 남을 속이는 모습에 회의를 느끼고 섬마을 사람들의 순박함에 매력을 느끼지만 사실은 그곳에서도 그는 속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너무 깊이 고민할 필요는 없다. 영화는 유쾌한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난 그것을 즐긴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 온 마을 사람들이 하루가 시작되면 모두 열심히 일을 하고 저녁이 되면 각자의 가정에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부부간 섹스를 하고 섹스의 쾌감을 자유롭게 만끽하는 장면을 우화적으로 그렸는데 상당히 인상깊은 장면이었다. 가장 원시적이지만 생명력이 왕성한 어쩌면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아름다운 그런 일.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 즉, 인간은 단순한 편리보다는 일을 함으로써 얻는 노동의 가치와 또 자기 삶에 충실함으로써 얻는 성실성이 강하고 아름다우며 그럴 때 원시적인 쾌락 또한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나타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장면. 인상 깊은 그 장면은 아마 앞으로 잊지 못할 장면으로 내 가슴속에 간직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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