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이후의 사회
피터 드러커 지음, 이재규 옮김 / 한국경제신문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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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에 발표한 책이다. 당시 소련의 붕괴로 인해 사실상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자본주의 진영의 승리감이 그리고 공산주의 진영에는 패배감이 팽배하던 시절이었다. 저자 역시 소련의 붕괴를 통해 공산주의의 실패에 대해 주목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후쿠야마처럼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성급한 지지를 표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 역시 변할 것이라 예견하며 그 후에 올 체제를 지식노동자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로 보았다.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가 처음 모습을 내보인지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돌아보면 일부는 그의 주장이 맞아들어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또한 틀린 것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너무도 중요한 것을 문제제기 하고 있다. 바로 지식노동자의 등장과 함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그것이다.

드러커가 관심을 갖는 것은 기존 자본주의에 있어서 사용자와 노동자와의 관계 즉, 마르크스식의 표현을 쓰자면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와의 관계가 사라지며 노동자는 지식노동자가 될 것이며 기존 자본주의의 동력원이 자본이었다면 앞으로 올 체제는 지식이 될 것이라는 주장은 상당히 흥미있는 주장이다. 실제로 일부 선진국을 보면 그의 주장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아직도 진정한 자본주의를 완성하고 있지 못한 나라의 경우 자본의 퇴출 후 지식이 동력원이 될 사회, 또한 지식노동자의 등장은 요원해 보인다. 물론 일부 지식노동자의 등장을 목격하기도 하지만 그 지식이 또한 자본의 재투자에 의해 이룩한 부산물이니 그것은 드러커가 주장하는 진정한 지식이 아닌 자본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한다.

오히려 난 그의 주장에서 책임에 기초한 조직에 대한 논의에 흥미를 느꼈다. 특히 요즘 우리나라 기업에 대한 엇갈린 시선은 드러커의 주장에 한번 주목해 봐야 할 듯 싶다. 일부 소위 잘나가는 기업, 그래서 국가 경제에 많은 도움을 주는 기업이 그렇지 않아도 불경기인 우리에게 자존심을 세워주고 있는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사회에서 용납하기 힘든 일들도 서슴없이 저질렀는데 가령 허술한 법을 이용해 정의롭지 않은 부의 상속, 또는 헌법에도 보장되는 노동기본권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등이 그 예이다. 이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사람에게 기업은 원래 이윤을 추구하는 조직이므로 당연한 것이고 또한 많은 이윤과 또는 일자리를 창출하여 우리 사회에 도움을 주었으니 그 정도 잘못은 참아야 한다는 이해하기 힘든 주장을 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드러커는 책임에 기초한 조직을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경제적 성과는 기업의 제일차적 책임이다. 적어도 자본비용을 보상할 수 있는 수준의 이익을 내지 못하는 기업은 사회적으로 무책임한 기업이다. 그런 기업은 사회적 자원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성과는 기초이다. 이것이 없으면 기업은 다른 어떤 책임도 수행할 수 없으며, 훌륭한 고용인, 건전한 시민, 좋은 이웃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성과가 기업의 유일한 책임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교육이 학교의 유일한 책임은 아니며, 치료활동이 병원의 유일한 책임 또한 아니다. 권한은 항상 책임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독재가 된다. 또한 책임이 없는 권한은 항상 아무것도 이룰 수 없게 된다. 조직은 권한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사회적 권력이다.>

기업이란 분명 이윤을 추구하는 조직이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그의 주장은 요즘 힘을 얻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이 경청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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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林火山 2009-01-02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Naver Opencast의 "風林火山의 분야별 대표 도서 소개"(http://opencast.naver.com/BK175)라는 캐스트의 캐스터 風林火山이라고 합니다. 이 글을 제 캐스트에 발행했는데, 혹시라도 발행을 원치 않으시면 '캐스터에게 한마디'에 적어주시거나, itmedusa@gmail.com으로 메일 주세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장미의 이름 - 하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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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였던가? 에코의 책을 강력히 권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당시 나는 다른 종류의 책에 빠져 있었고 또 크게 관심이 없던 에코의 책을 읽을 시간이란 그렇게 많지 못했다.

그러다 여름이 다가오면 보통은 따분하고 재미없는 책보다 추리소설이나 심리묘사가 탁월한 책을 읽곤 했는데 올해도 마찬가지로 날씨가 더워져 추리소설이나 읽어볼 요량으로 책을 고르던 중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생각나 읽기 시작했다.

기호학자가 쓴 추리소설이라.. 퍽 흥미로운 책일 것 같다는 느낌을 안고 읽은 책인데 다 읽고 난 지금은 이 책을 추리소설이라는 범주에 넣는 것이 옳은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분명 이 책에서 가장 큰 재미를 준 것은 추리소설이라는 형식이지만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중세시대 즉, 암흑의 시대인 당시 진리란 단지 타협과 정치적 협상의 결과인 종교인들의 해석에만 허용되던 시절, 그 암흑기를 배경으로 이야기한다. 무엇이 진리인지 또한 무엇이 사실을 가리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가장 성스러운 것을 말하는 사람들 내부에 가장 추잡한 인간들의 권력 다툼은 비단 중세시대의 이야기만은 아닐지라..

한동안 난 이 책을 읽은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이 책은 단지 나의 여름나기용 소설 그 이상의 가치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직은 에코와 내가 대화를 나누기란 서로의 거리감이 두터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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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은 흐른다 범우 사르비아 총서 301
이미륵 지음, 전혜린 옮김 / 범우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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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소설은 한마디로 담담한 수묵화이다. 붓이 간 곳보다 그냥 하얀 여백이 더 많은 수묵화에서 우리는 서양화에서 느끼는 갑갑함보다 넉넉함과 평화스러움을 느낄 수 있듯이 <압록강은 흐른다>에서도 화려한 묘사나 기발한 상징과 복선 암시는 없고 거기서 우리는 평화로움을 엿볼 수 있다. 기지 번득이는 사상도, 그렇다고 또 생에 대한 치열한 도전도 없다. 앞으로의 생보다 지난날의 생이 더 많은 늙은 노인의 자기 독백마냥 그냥 편안하게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낸다.

그러나 그 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우리는 읽을 수 있다.
아름다운 우리의 이야기.
개화기의 혼란의 시절..
구 시대 사상이 무너지던 시절..
그러나 그 사상은 시대에 뒤떨어진다 할지라도 고결하고 아름답다.
정겹다.
그리고 그 시절이 그립다.
넉넉하되 그러나 자기 수신에는 치열하다.

비록 남이 보기에는 세월아 내월아 하듯 삶을 바라보는 듯하지만 실상은 세상을 보다 예민하게 느끼기 위해 그리고 올바로 알기 위해 정신을 항상 맑게 한다.
그것이 우리네 진정한 선비의 모습이다.

지금 우리는 그런 선조보다 더 많은 지식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르는 자연과학이 초등학생의 시험문제로 나오고 학생들은 아주 쉽게 그것을 푼다.
미국이나 독일 그리고 영국 등이 미지의 세계도 아니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한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선조 즉, 선비처럼 넉넉하고 여유롭게 그리고 타 문화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갖고 있을까? 
한시나 Ÿ섟?또 사략이나 읽던 선비가 초등학교 자연 교과서를 읽고 링컨 전기문을 흥미롭게 읽는 것은 읽는 것이 아니다. 진정하게 느끼고 감동을 받는 것이다. 왕도 아니며 그렇다고 위대한 사상가도 아닌 또 위대한 시인도 문인도 아닌 링컨의 일생을 미륵의 아버지는 몸으로 치를 떨면서 감동을 받는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선비가 그의 이야기에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자연과학이 발달하고 힘이 있던 한 서양의 지도자에 감동을 받아 눈물 흘린 것이 아니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신념의 일환으로 노예제를 폐지하기 위해 전쟁까지 불사했던 링컨의 사상과 리더십을  이해했기에 그는 눈물을 흘린 것이다. 자신의 소신과 우리 유교에서 이야기했던 왕도정치와 인본정치를 그는 링컨의 일생에서 보았던 것이다. 그가 서양을 힘이 강한 나라라고만 알았다면 비록 그보다 힘은 약할지언정 오랑캐일뿐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링컨을 알고 그래서 미륵에게 서양을 공부하라고 말한다.
 
우리네 선비는 그렇다.

꼬장꼬장하고 고리타분하며 고지식하고 또 배타적이지 않다. 오히려 본받을 것이 있다면 한없이 자기를 낮추고 그 본받을 점을 배우는 그런 정신을 배우는 것이 진정한 선비이며 그것이야말로 고결한 정신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그 옛날 선비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또 알마나 위대한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단편에 불과하며 그 단편에 취해서 우리는 쉽게 우리네 선비는 고리타분했다고 더러운 쓰레기 마냥 매도해버린다.

미륵은 정말 설득력있게 그러나 한 번도 큰소리가 아닌 잠잠한 소리로 무겁게 날 일깨우고 있다. 그렇게 미륵은 우렁차게 날 깨우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소설의 아름다움을 말한다는 것은 우스운 작업일지라.. 그냥 있는 그대로 그냥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글에 흠뻑 날 적시면 된다.

그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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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짐 콜린스 지음, 이무열 옮김 / 김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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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의 재목을 보고 엔론사태 이후 논의되고 있는 윤리경영에 대한 책인 줄 알았다. 그러나 사실 이 책은 미국의 기업 중 기업이 속한 산업의 주식 성장율보다 3배가 넘는 성장을 15년 이상 보인 회사를 샘플로 하여 공통점을 연구한 책이다.

또한 이 책은 짐 콜린스의 전작인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 (Built to last)> 의 후속작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물론 저자는 어떻게 보면 이 책이 전작의 후속작이 아닌 전작이라고 하지만 전작이 <창업에서 수성(built to last)>를 연구한-즉, 창업 후 좋은 기업이 되는 조건을 연구한- 책이라면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는 말 그대로 더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한 더 좋은 기업들을 연구한 책이므로 후속작으로 보는 것도 틀린 것이 아닐 듯하다.

어쨌든 이 책은 상당히 쉽고 재미있게 씌어졌다. 특히 많은 연구와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 책을 읽는 내내 느껴져 그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다만 나의 통계학적인 지식이 부족한 탓에 본 연구의 방법론에 대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위대하다고 정의한 기업들이 보인 특징들이 단순히 상관관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다. 무엇보다도 위대하다고 정의한 기업들이 이러이러한 공통된 특징이 있다. 따라서 그러한 것을 수행하면 위대한 기업이 될 것이다라는 주장은 상관관계와 인과관계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다. 조금 억지스러운 예가 될지 모르겠지만 서울대에 많이 들어가는 학생들의 출신지가 강남이라는 조사를 보고 서울대에 가기 위해서는 강남에 살라는 결론을 내린 것과 같다. 즉, 이 책에서 말하는 위대한 기업으로 가는 조건들이 상관관계를 보이는 결과라면 그 조건들과 위대한 기업으로의 성과 중 어떤 것이 독립변수이고 종속변수인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물론 이런 의심은 내가 통계학에 대해 아주 무지하고 또한 본 책을 힐끔 본 결과로 책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것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다시 읽어보고 생각을 더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그동안 우리가 오해하고 있고 또는 인지하고 있으나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했던 것들을 쉽고 명쾌하고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그 분석하는 방법적인 측면이나 서술하는 방식이 <초우량 기업의 조건>과 같으나 그 책과는 다른 경영 성과에 대한 본질에 대해 근본적으로 접근하고 있듯 보인다.

어쨌든 책을 읽고 뿌듯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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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초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8
한수산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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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아프지만 그 소설만큼은 아름다운 그런 소설을 만났다는 느낌.. 그것이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받은 소감이다.

아직도 많은 인생이 남은 나에게 있어 인생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은 지나친 사치일 수도 있다. 하루하루를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내딛기가 어려워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있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인 사람도 있을 테고 또 어떤 사람은 인생이란 즐거움이라고 쉽게 단정하기도 하겠지.. 나에게 인생이란 개척해야 할 그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하고도 암담한 것은 우리네 삶에서 인생이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항상 거기서 거기인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항상 힘든 사람은 힘들고 또 어려운 사람은 어렵다. 오히려 그런 삶이 굳어져가도록 하는 사회가 날 가슴 아프게 한다.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 윤재의 "갈때도 올때도...... 바람뿐이로군" 이라는 뇌까림이 가슴을 울린다.

소설 <부초>는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아니 없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천막을 치고 서커스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이 가진 것이라곤 그들의 몸과 재주뿐이다. 가지지 못한 자와 가진 자.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분류를 하여 가지지 못한 자에겐 무책임한 동정을, 가진 자에겐 무분별한 증오심을 가지지는 말자. 하지만 가지지 못한 자를 끝까지 가지지 못하게 하는 사회적 부조리와 불공정한 사회 제도는 바뀌어야 하고 마땅히 비판받아야 할 대상이다. 그것은 우리를 둘로 나누는 싸구려 사상이 아닌 사회가 올바로 돌아가도록 할 당연한 권리다.

소설 부초가 아름다운 이유가 단순히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한 묘사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단순히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한 묘사로 소설이 그쳤다면 그것은 다큐멘터리나 흔해빠진 삼류 소설에 머물렀을 것이다. 이 소설이 아름다운 것은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한 묘사가 아닌 가지지 못한 자의 처절하고 또 가지지 못했지만 인간이 가진 삶에 대한 진실된 태도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진실한 태도 역시 가진 것이 없기에 몸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자리를 하고 난 석이네는 조용히 옷을 벗었다. 두 사람은 정성을 들여 애무했다. 그것은 이제 서로가 서로에게 바칠 수 있는 고통스런 정염의 불꽃이였다. 가장 진실한 몸짓이였다. 이미 발 밑에 와서 출렁이고 있는 별리의 슬픔과 회한도 지금은 사랑이여따. 그 모든 것이 한데 섞이고 휘몰아 칠때 그것은 두 사람만의 순백한 의식이였다."

섹스에 대한 묘사가 이렇게 아름다운 글은 보지 못했다. 그들은 가장 순백한 진실도 몸으로밖에 할 수 없었고 섹스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삶의 투영이였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어설픈 감상이다. 체험되지 않은 것에 대한 머릿속 관념에서 나오는 감상은 그 자체가 사치다. 그러나 모든 것을 체험하지 못하는 우리로서는 어차피 머릿속에서 나온 자신의 의식으로 세상을 평가해야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다면 진심으로 가슴속으로 그리고 머릿속으로 고민을 처절히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여론에 의해 그리고 무책임한 자신의 윤리의식으로 쉽게 평가하곤 한다. 대표적인 예가 흘러가는 것에 대한 막연한 향수다. 시끌벅적한 장터, 초가집과 기와집, 농악 등등.. 지켜야 할 것도 있고 또 지켜야만 할 것들이다. 그러나 누구나 그런 얘기는 할 수 있다. 과연 누가 지켜야 할까. 과연 누가 지켜야 할까.. 나를 비롯한 우리는 쉽게 그것에 대해 답하지 못한다. 말만 있고 그것에 대한 행동은 없다. 내가 직접 그 말에 대한 행동의 주체가 되기보다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사라져가는 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의 얼굴이 아니라 뒷모습만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라고 소설은 말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다만 심각한 건망증으로 앞모습을 잊어버렸거나 혹은 뒷모습만 기억하고픈 자기 방어기제가 더 크게 작용해서일 것이다. 이제는 사라져가는 그의 앞모습을 기억해야하고 그것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가면 어디로 가겠어요. 훗날을 위해 과거를 버려야 하는 건 저도 압니다. -중략- 써커스는 내 운명의 문신인지도 모르죠. 난 여기서 이렇게밖에 살 수 없어요. 아니죠. 여기서 견디어야 해요. 뭘 견디는진 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런 사라져가는 사람들이 나일수도 그리고 또한 벗어날 수 없는 고통스런 인생의 쳇바퀴에 주인공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사라져가는 주인공에서 다시 나타나는 주인공이 되고자 혹은 삶의 쳇바퀴에 벗어나고자 일탈도 하고 또한 벗어나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은 허영이다. 내 삶은 내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이 인생이다. 주어진 것이 삶이다. 결국 난 내 삶속에 살아야 한다. 과거를 버려야한다. 그래서 견디어야 한다. 그것이 뭘 견디어야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그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삶이 그런 것이라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을 견디어야 할 삶이라면 우리는 그 삶에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어차피 고통도 나의 몫 즐거움도 나의 몫 의무도 나의 몫.. 그것이 외롭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로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삶은 나 혼자만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난 우리만 무대 위에 있고 남들은 다 구경꾼이라고 생각했었지. 그래서 외로웠던 거야. 그건 잘못이야. 그게 아니야. 갈보가 구경오면 그게 구경꾼이지만 우리가 갈보집에 가면 그땐 우리가 구경꾼이잖아. 난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아. 사람들이란 저마나 있는 힘을 다해서 살아간다는 거야. 못난 놈도 제딴에는 자기가 가진 거 남김없이 다 털어서 살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겠어. 그래...... 이 세상 바닥도 서커스 바닥이나 똑같아. 손님이 따로 없다 뿐이지 분 바르고 옷 갈아입고 재주피며 살기는 마찬가지란 생각이야. 어디로 가게 될 지 아직은 정처가 없다만."
"어디엘 가 있든 내가 디디고 있는 땅이 무대가 아니겠어. 하늘이 천막이지. 시퍼렇게 살아 있는 목숨 가지고 어딘들 발을 붙여 볼란다. 어느 동네든 실수해서 떨어지만 죽고 다치기는 매일반일테니까"

없는 사람이나 있는 사람이나 각자의 무대가 있다. 혼자만 어려운 재주를 부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재주를 부리는 서러움도 서러움은 아니다. 어짜피 각자의 천막에서 각자의 무대에서 똑같이 재주를 부리는 거니까.. 모두가 재주꾼이고 모두가 구경꾼인 세상. 그래서 삶은 외로운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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