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초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8
한수산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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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아프지만 그 소설만큼은 아름다운 그런 소설을 만났다는 느낌.. 그것이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받은 소감이다.

아직도 많은 인생이 남은 나에게 있어 인생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은 지나친 사치일 수도 있다. 하루하루를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내딛기가 어려워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있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인 사람도 있을 테고 또 어떤 사람은 인생이란 즐거움이라고 쉽게 단정하기도 하겠지.. 나에게 인생이란 개척해야 할 그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하고도 암담한 것은 우리네 삶에서 인생이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항상 거기서 거기인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항상 힘든 사람은 힘들고 또 어려운 사람은 어렵다. 오히려 그런 삶이 굳어져가도록 하는 사회가 날 가슴 아프게 한다.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 윤재의 "갈때도 올때도...... 바람뿐이로군" 이라는 뇌까림이 가슴을 울린다.

소설 <부초>는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아니 없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천막을 치고 서커스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이 가진 것이라곤 그들의 몸과 재주뿐이다. 가지지 못한 자와 가진 자.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분류를 하여 가지지 못한 자에겐 무책임한 동정을, 가진 자에겐 무분별한 증오심을 가지지는 말자. 하지만 가지지 못한 자를 끝까지 가지지 못하게 하는 사회적 부조리와 불공정한 사회 제도는 바뀌어야 하고 마땅히 비판받아야 할 대상이다. 그것은 우리를 둘로 나누는 싸구려 사상이 아닌 사회가 올바로 돌아가도록 할 당연한 권리다.

소설 부초가 아름다운 이유가 단순히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한 묘사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단순히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한 묘사로 소설이 그쳤다면 그것은 다큐멘터리나 흔해빠진 삼류 소설에 머물렀을 것이다. 이 소설이 아름다운 것은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한 묘사가 아닌 가지지 못한 자의 처절하고 또 가지지 못했지만 인간이 가진 삶에 대한 진실된 태도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진실한 태도 역시 가진 것이 없기에 몸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자리를 하고 난 석이네는 조용히 옷을 벗었다. 두 사람은 정성을 들여 애무했다. 그것은 이제 서로가 서로에게 바칠 수 있는 고통스런 정염의 불꽃이였다. 가장 진실한 몸짓이였다. 이미 발 밑에 와서 출렁이고 있는 별리의 슬픔과 회한도 지금은 사랑이여따. 그 모든 것이 한데 섞이고 휘몰아 칠때 그것은 두 사람만의 순백한 의식이였다."

섹스에 대한 묘사가 이렇게 아름다운 글은 보지 못했다. 그들은 가장 순백한 진실도 몸으로밖에 할 수 없었고 섹스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삶의 투영이였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어설픈 감상이다. 체험되지 않은 것에 대한 머릿속 관념에서 나오는 감상은 그 자체가 사치다. 그러나 모든 것을 체험하지 못하는 우리로서는 어차피 머릿속에서 나온 자신의 의식으로 세상을 평가해야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다면 진심으로 가슴속으로 그리고 머릿속으로 고민을 처절히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여론에 의해 그리고 무책임한 자신의 윤리의식으로 쉽게 평가하곤 한다. 대표적인 예가 흘러가는 것에 대한 막연한 향수다. 시끌벅적한 장터, 초가집과 기와집, 농악 등등.. 지켜야 할 것도 있고 또 지켜야만 할 것들이다. 그러나 누구나 그런 얘기는 할 수 있다. 과연 누가 지켜야 할까. 과연 누가 지켜야 할까.. 나를 비롯한 우리는 쉽게 그것에 대해 답하지 못한다. 말만 있고 그것에 대한 행동은 없다. 내가 직접 그 말에 대한 행동의 주체가 되기보다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사라져가는 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의 얼굴이 아니라 뒷모습만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라고 소설은 말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다만 심각한 건망증으로 앞모습을 잊어버렸거나 혹은 뒷모습만 기억하고픈 자기 방어기제가 더 크게 작용해서일 것이다. 이제는 사라져가는 그의 앞모습을 기억해야하고 그것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가면 어디로 가겠어요. 훗날을 위해 과거를 버려야 하는 건 저도 압니다. -중략- 써커스는 내 운명의 문신인지도 모르죠. 난 여기서 이렇게밖에 살 수 없어요. 아니죠. 여기서 견디어야 해요. 뭘 견디는진 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런 사라져가는 사람들이 나일수도 그리고 또한 벗어날 수 없는 고통스런 인생의 쳇바퀴에 주인공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사라져가는 주인공에서 다시 나타나는 주인공이 되고자 혹은 삶의 쳇바퀴에 벗어나고자 일탈도 하고 또한 벗어나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은 허영이다. 내 삶은 내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이 인생이다. 주어진 것이 삶이다. 결국 난 내 삶속에 살아야 한다. 과거를 버려야한다. 그래서 견디어야 한다. 그것이 뭘 견디어야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그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삶이 그런 것이라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을 견디어야 할 삶이라면 우리는 그 삶에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어차피 고통도 나의 몫 즐거움도 나의 몫 의무도 나의 몫.. 그것이 외롭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로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삶은 나 혼자만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난 우리만 무대 위에 있고 남들은 다 구경꾼이라고 생각했었지. 그래서 외로웠던 거야. 그건 잘못이야. 그게 아니야. 갈보가 구경오면 그게 구경꾼이지만 우리가 갈보집에 가면 그땐 우리가 구경꾼이잖아. 난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아. 사람들이란 저마나 있는 힘을 다해서 살아간다는 거야. 못난 놈도 제딴에는 자기가 가진 거 남김없이 다 털어서 살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겠어. 그래...... 이 세상 바닥도 서커스 바닥이나 똑같아. 손님이 따로 없다 뿐이지 분 바르고 옷 갈아입고 재주피며 살기는 마찬가지란 생각이야. 어디로 가게 될 지 아직은 정처가 없다만."
"어디엘 가 있든 내가 디디고 있는 땅이 무대가 아니겠어. 하늘이 천막이지. 시퍼렇게 살아 있는 목숨 가지고 어딘들 발을 붙여 볼란다. 어느 동네든 실수해서 떨어지만 죽고 다치기는 매일반일테니까"

없는 사람이나 있는 사람이나 각자의 무대가 있다. 혼자만 어려운 재주를 부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재주를 부리는 서러움도 서러움은 아니다. 어짜피 각자의 천막에서 각자의 무대에서 똑같이 재주를 부리는 거니까.. 모두가 재주꾼이고 모두가 구경꾼인 세상. 그래서 삶은 외로운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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