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 좌파 - 김규항 칼럼집
김규항 지음 / 야간비행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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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아주 평범하고 당연한 상식의 틀에 서 있다고 믿고 있다. 사실 그건 틀린 말은 아니다. 통계학의 어려운 정의를 빌리지 않고도 상식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이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지식과 생각이라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의 모습은 정규분포를 보일 것이고 그 영역을 크게 벗어나는 것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사회는 그 정규분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정규분포가 가장 자연스러운 확률분포이듯 우리 사회의 사상적 스펙트럼도 종 모양의 정규분포를 형성해야 하지만 분명 우리나라의 보통의 사상적 편차는 극단으로 종을 반으로 자른 모양, 때에 따라서는 오히려 가운데가 볼록한 것이 아니라 오목한 모양을 취하는 것이 우리의 사상적 확률분포였다.

그런 것을 깨닫게 된 것은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안 있어서였다. 복지와 정의 그리고 진리와 같은 말들은 효율과 생산성 그리고 현실이라는 이름에 묻혀져 갔고 또 그런 것을 주장했다간 자칫 빨갱이로 낙인 찍여야 했던 것이 대학사회였다. 심지어 대학 내에서 진보주의적이라고 밝히는 무리들 마저 자신의 생각 이외에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폐쇄적인 양태를 보인 것도 사실이었으며 가장 무서운 것은 좌파적이거나 우파적이거나 민족과 애국이라는 전제조건 아래에서는 그 둘이 너무도 흡사하게 꿍짝이 잘 맞았다는 점이다.

어쩌면 좌파와 우파라는 이름은 그들의 이해관계를 나타내는 하나의 학문적 기반일 뿐 그것이 진정한 좌파와 우파의 이념이 얼마만큼 실현되느냐는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나 생각해본다.

황우석 사태 때만 해도 그렇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그 두 앙숙과 같은 사상적 격차 속에서도 황우석의 성과 앞에서는 마치 쌍둥이 형제와 같이 애국와 민족이라는 이름 앞에 얼마나 잘 어울렸던가? 그 앞에서는 진리나 진실은 더러운 그 무엇이었는지도 모른다

B급 좌파. 어쩌면 우리의 좌파는 진정한 좌파가 아닐런지 모른다. 단지 지식과 사상의 스펙트럼 속에 우파의 반대편에 서기 위한 하나의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장 안 어울리면서도 또 가장 잘 어울리는 파시즘적인 좌파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런 우리의 현실 속에서 진정한 진리와 파시즘을 싫어하는 좌파는 정통 좌파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B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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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 - 나무를 다루다, 사람을 다루다
신응수 지음, 서원 사진 / 열림원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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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정해진 틀에 콘크리트를 부어 넣고 굳기를 기다리는 방법으로 짓지만 예전에는 나무를 기르고 자르고 망치로 두들기며 지었던 것이 집이다.

두 방법의 차이는 빨리 짓느냐 혹은 기술적 발전이냐를 떠나 집이라는 것이 상품이냐 아니냐의 차이라고 생각이 든다. 아무리 신자유주의 파고 속에 산다고 한다지만 내가 사는 집조차 상품이어야 하는 것은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하긴 집이 일터에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쉬는 공간을 넘어선 건 오래 전이긴 하다. 집이란 하나의 재테크 수단이자 자산이고 또 나를 보여주는 또 다른 힘이기도 하다. 그런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을 아웃사이더 혹은 사회 부적응자라고 평할지 모르겠지만 다른 건 다 몰라도 적어도 집만큼은 그런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다.

바로 상품이 아닌 의식주 즉, 우리네 삶의 기본적 원형이었을 때의 집을 짓던 사람을 우린 목수라고 불렀다. 비록 목수라는 직업이 하찮은 것일지라도 그는 우리의 집을 지었고 우리의 삶과 가장 닮은 나무를 다룬 사람이기에 우리의 삶을 정확히 꿰뚫는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 대목수 신응수의 <목수>가 그 글이 다소 매끄럽지 못하고 새로울 것이 업는 내용임에도 신선하고 가슴에 와닿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 시대 나무와 함께 했고 우리 시대 집짓기에 모든 열정을 담은 사람의 짧은 글들 속에 인간애가 담겨 있고 그 속에 세상을 바라보는 진실이 묻어난다.

잊힌 것을 붙드는 사람은 미래를 쫒는 사람이다. 현재와 미래에 두팔을 허우적거리는 사람보다 과거를 붙드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미래를 잡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래서 신응수의 <목수>는 잃어가는 과거를 아쉬워하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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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동양고전 슬기바다 2
맹자 지음, 박경환 옮김 / 홍익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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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고전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지만 실제로 읽는 이는 드문 책이 아닐까? 특히 동양 고전의 경우 서구 시스템에 적응된 공교육의 현실 속에서 더욱 천대받고 고리타분한 책으로 전락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하지만 서양 철학이 이미 그 한계를 보이고 있으며 동양적 정서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시점에서 동양 고전은 새로운 의미를 찾지 않을까?

그리스 시대 수많은 철학자의 토의와 논쟁이 서양 문화의 뿌리가 되었듯 동양의 춘추전국 시대 수많은 학문적 실험과 논쟁은 동양의 풍부한 문화적 토양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유학은 제도, 주류 학풍, 정치관으로 형성되어 있기에 그에 대한 바른 이해야말로 동양에 대한 바른 이해가 되지 않을까? 그 중 맹자의 경우 유학에서도 정통 유학의 뿌리로 일컬어지고 또 동양 고전 중에서도 고전으로 평가받는 필독서다.

난 이 책을 읽는 내내 맹자의 그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사상에 놀라곤 했다. 모든 것이 인과 예에서 벗어난다면 그 당시 정권을 뒤집을 수 있다는 혁명가의 정신과 원칙과 원리를 바로 지켜야 하는 고고하고 자존심 강한 철학자의 모습을 동시에 보았기 때문이다.

유학을 고리타분하다, 시대에 뒤떨어졌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잘 모르고 하는 소리가 아닐까? 맹자가 말하는 유학은 바로 원리와 원칙에 맞게 행동해야 하며 그것은 기존에 갖고 있는 풍습도 아니고 지위고하의 권력의 힘에  따라 행해지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혁명이론이 나오는 것이고 또 과격한 진보적 사상도 도출된다.

예전에 어느 철학자가 말하길 자본주의의 궁합이 서구 기독교와 잘 맞고 체면 중시와 겉 모양에 너무 신경 쓰는 유교적인 바탕의 동양은 자본주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평했는데 난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난 맹자에서 올바른 인간관계과 조직이론을 이끌어낼 수 있으며 전략적 비전과 함께 경영전략이 도출된다고 믿는다. 뿐만 아니라 조직계발의 이론도 함께 내포되어 있기에 맹자는 새로운 경영서로 재평가될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고전의 재미는 그 고전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도 필요하지만 나에게 맞는 방법으로 이해하고 재평가하는 것에서 재미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엔 맹자와 대립각을 세운 묵자도 읽고 싶다.

단, 안타까운 것은 홍익출판사의 책들은 오자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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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미학 - 서양미술에 나타난 에로티시즘
미와 교코.진중권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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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창부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와 같이 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가장 크게 번창되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자본의 힘이 더 큰 성욕을 자극한다는 것을 의미할까? 이에 대해 내가 아는 교수님은 자본주의의 특성을 들어 설명을 하셨다. 자본주의란 소비를 기반으로 한 경제체제이므로 무엇이든 상품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 첫째가 일반적인 눈에 보이는 물건으로써의 상품이고 두 번째가 서비스를 기반으로 한 눈에 보이지 않는 상품이다. 세 번째는 아마도 웰빙이나 건강상품 혹은 보험 등 인간의 심리를 기반으로 한 것이 상품이 될 것이고 마지막은 무엇이 될까?

어쨌든 성은 우리네 가장 큰 욕구 중 하나이자 가장 큰 자본주의 상품이기도 하고 예술적 모티브를 제공하고 소재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가장 원초적인 것이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제도의 궁극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성의 미학은 자칫 진부한 소재로 보인다. 서양미술에 나타난 성에 대한 담론은 예전부터 있어 왔고 그런가 하면 새로운 글쓰기나 새로운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글이 재미를 끄는 것은 미술에 그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성에 초점을 맞춰 미술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자칫 흥미 위주로 넘어갈 수 있는 소재이기도 하고 또는 그저 그런 이야기로 머물 수 있는 이야기가 살아 있는 것은 바로 그림 속에 감춰진 여러 상징을 해설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성에 대한 담론을 그림을 빌어 재치있게 끌어냈기 때문이 아닐까?

진중권은 문제에 대한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에 대한 설명을 상대가 듣기 쉽게 전달한다. 성의 미학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새로운 것은 없지만 진중권식 재치과 재미가 가득한 책이며 그의 또 다른 책 춤추는 죽음과도 비슷한 듯 다른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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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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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글은 재미있다. 무엇보다도 그저 진솔한 이야기가 있는 그대로 묻어 나와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박완서의 글이 그의 경험과 소설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 남자네 집도 마찬가지다. 돈암동에서 만난 첫사랑의 기억은 전쟁의 기억과 같다. 어수선함 속에 정상이 비정상이고 비정상이 정상인 시대에 첫사랑의 기억은 바로 정상과 비정상의 갈팡질팡하는 그런 기억이다.

그와 함께 하면 왠지 모를 설렘과 즐거움이 함께 하지만 그는 주인공과 맞는 배우자는 되지 못한다. 그를 떠나 낭만과는 거리가 먼 대신 생활력 강하고 현실적인 남편을 만나 결혼하지만 그 첫사랑의 기억은 그리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곁에서 지켜보면서 첫사랑의 상처를 바라보는 주인공의 기억은 전쟁의 기억이자 가슴아픈 기억이고 그와 동시에 한편으론 설렘이 함께 하는 복잡한 기억이다.

그런 그의 기억이 그나마 잊혀질 수 있었던 것은 세월의 힘이라고 단순히 말할 수 있을까?

어쨌든 재미있는 소설이다. 전쟁 후 치열했던 삶과 그 삶 속에 비린내 나는 삶의 고단함도 그렇지만 인간내 나는 우리네 삶도 모두 소중하다.

 하지만 다소 진부함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특히 그간 나오던 소설마다 굵직한 무게감을 주던 것과 달리 공허함이 더 큰 무게를 차지한다. 그건 박완서라는 작가의 힘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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