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정원 - 전2권 세트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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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현우가 18년 형기를 마치고 세상으로 나온다. 영치품으로 받은 지갑을 열자 거기에는 어머니가 준 관음보살 부적과 사진 한 장이 들어 있다. 그는 사진 속 얼굴을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지갑을 닫는다. 사진 속의 여자는 한윤희다.


조카가 마중을 나왔다. 누님집에 가서 맛난 음식을 먹고, 건강 검진도 받는다. 여전히 사방 좁은 벽에 막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뻥 뚫린 공간은 아직까지 어색하다. 대충 몸이 추슬러지자 현우는 광주에 간다. 

광주에서 만난 예전의 동지들은 다들 할 말이 많은 듯 보였다. 그들의 현재 삶은 '광주에 대한 태도'도 변모시킨 듯 보였다. '광주'에 기대어 한 자리 꿰어차고 싶은 자가 있었고, 꿰어차지 못해 분한 자도 있었고, 그런 자들을 보며 분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잡혀 가서 젊음을 빼앗겨 버린 현우나, 감옥에서 미쳐버리거나 자살한 동지도 있었다. 현우는 그들과 오랜 시간 같이 하지는 않는다. 그는 갈 곳이 있었다. 갈뫼였다. 그곳에서 윤희를 처음 만났다.


윤희는 현우가 도바리칠 때 소개받은 여자다. 그는 김전우라는 가명을 대었지만 윤희는 본명이 뭐냐고 물었다. 더듬더듬 자신이 사회주의자이고, 도바리 중이고, 블라블라 떠들어대었는데 윤희는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광주에 관한 비디오를 보았다고 했다.

그녀의 아버지도 사회주의자였다. 윤희는 오랜 세월에 걸쳐 아버지와 화해를 했다. 그래서 현우에 대해서도 선입견 없이 대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현우를 통해 아버지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둘은 몇 달간을 갈뫼에서 함께 지낸다. 아무런 약속도 없는 관계였지만 충만한 하루 하루를 보내는 사이 차츰 정이 깊어진다.

하지만 동지들이 하나 둘 잡혀가자 현우는 갈뫼를 떠난다. 고향 집에 들렀다가 여관에서 묵은 어느 날, 임검에 걸린 현우는 간첩 사건의 주동자가 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는다. 직계 가족 외에는 면회나 편지가 되지 않았다. 윤희 역시 현우의 누님을 통하지 않으면 소식도 주고 받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잡혀가 젊음을 뭉텅 잘린 현우가 사회로 나온 것이다. 다시 찾은 갈뫼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지만 윤희와 함께 지내던 교감선생네 뒤채는 깨끗이 수리가 되어 있었다. 윤희는 그 뒤채를 사서 현우와 그녀 명의로 등기도 해놓은 터였다. 그녀가 남겨 놓은 일기와 그림들을 보면서 현우는 없어져 버린 18년의 세월을 다시 채워나간다.


윤희가 누님에게 보낸 편지는 95년 11월, 96년 2월, 96년 여름에 보낸 것이었다. 그녀는 암에 걸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일기를 읽어 나가면서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곱씹던 현우는 자신과 윤희 사이에 딸 은결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일기의 어조가 점점 변해간다. 어조가 변한 것은 그녀가 변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현우를 그리워하는 여린 여성의 어조였지만 점차 독립적인 여성으로 변모하기도 하고, 벽 안에 수인을 그리워하다 지쳐 친밀감을 갈구하는 여성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 편지에서는 현우를 어머니처럼 여기는 중년의 여인이 되기도 한다.


대학 다닐 때 좋아하는 선배가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을 꼭 읽어보라고 했다. 여기 저기에 소개된 글을 통해 내용은 알고 있었는데 결국 읽지 않았다. 나는 누가 추천해주는 책은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청개구리 기질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추천해준 책을 읽고 실망하면 왠지 미안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그렇게 추천해준 책이라면 '아꼈다가 읽자' 하는 마음이 들어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황석영의 다른 소설들을 먼저 읽었다. <무기의 그늘>을 처음 읽었는데 기억이 나는 대목은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미군 무기가 베트콩에게 흘러 들어가던 부분이다. 선이 굵은 소설이라고 느꼈다. <손님>은 잘 쓴 소설이라고 생각했지만 딱히 공감했던 것 같지는 않다. <장길산> 역시 후반부로 갈수록 성긴 느낌이 들어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래된 정원>은 한동안 꽤 오랜 기간 공백 이후 발표된 작품인데 여러 번 쉬어 가면서 읽었다. 특히 윤희의 마지막 편지를 읽고는 먹먹해져서 책을 덮기까지 했다.


그곳을 떠난 뒤에 당신의 젊은 얼굴을 그린 적이 있어요. 나중에 그림의 빈 여백에는 이만큼 늙어버린 나를 그려넣었지요. 그랬더니 당신은 내 아들 같아 보였어요.


이 부분이 마음에 와 닿아서 여러번 반복해서 읽어 보았다. 정말 애잔하고 쓸쓸하면서도 멋진 표현이다. 바로 저 표현 때문에 윤희가 독일에서 다른 사람과 사랑을 하고, 그 사람을 잃고 슬퍼할 때도 질투하지 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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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1-21 0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기의 그늘 ㅡ손님 ㅡ장길산 ㅡ까지 그냥 다 넣고 이어 쓰시는게 더 자연스럽고 좋은데요!^^
원글이 훨씬...부드럽게 ㅡ^^
문제되지 않는데 그냥 쓰시는게...어떤가..합니다.만?^^

잘 읽고 갑니다.

황석영 작가 책 중 저는 이 책을 가장 아낍니다.
ㅎㅎㅎㅎ무기의 그늘은 오래되서 이젠 기억이 희미하고
장길산은 ..눈앞에 떡 있지만 ㅡ확실히 뒤로갈수록 아쉽고...손님은 독특하지요. 오래된 정원은 가끔씩 지금도 열어봐요..감정을 잃어버린 기분일때...막 이별
한 기분에 젖고 싶을때...울고 싶을때...그럴때 봅니다.
 
망원동 브라더스 - 2013년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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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가 사는 집 근처'를 말한다. 그러니 누구나 '동네'를 갖고 있다. '동네'에 관한 느낌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엔 그곳에 가면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부대끼며 정을 나누고,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들이 있을 것 같다. 그런 이유로 한 동네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을 보면 무척 부럽다. 동네의 역사와 그 사람의 생이 사이 좋게 어우러져 자라왔을 것 같은 느낌이다. 또, 무슨 동이 들어간 소설이나 노래 등에 남다른 애착이 간다.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 이문구의 <우리 동네> 같은 소설도 좋았고, 김현철의 <동네>나 동물원의 <혜화동> 같은 노래도 좋다. 미노루 후루야의 만화들도 주로 한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고 있어서 흥미롭다. '동네'를 소재로한 대부분의 소설이나 노래는 그 시선이 과거를 향하고 있다. 이제는 없어져버려서 서운하고 애틋한 감정을 노래한다.


하지만 <망원동 브라더스>는 현재형이다. 잡지 만화가로 등단했으나 현재는 일거리가 줄고 의욕도 저하되어 망원동 옥탑방에서 근근히 생계를 연명하는 주인공, 직장을 잃고 캐나다로 이민 갔다가 대안이 없어 한국으로 되돌아온 기러기 아빠 김 부장, 한 때 잘나가는 만화 스토리 작가였으나 지금은 황혼 이혼 당할 처지에 놓인 주인공의 싸부, 그리고 만년 공시생 삼척동자가 망원동 브라더스의 일원이다.

이들은 과거에 성공가도를 달렸거나, 미래에 달리고 싶지만, 어찌됐건 현재에는 몹시도 '별볼 일 없는' 처지이다. '책력 봐 가며 밥 먹는 처지' 만 겨우 면한 상태다. 그러다 보니 서로가 서로에게 사실상 짐이 되는 관계지만, 용케도 민감한 부분은 건드리지 않으려 애쓰며 나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조화가 조만간 깨어질 것이 확실한데, 바로 그 점이 '현재형'임에도 불구하고 애틋함과 향수를 자아낸다. 조만간 과거가 될 모습을 현재형으로 그리고 있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망원동 브라더스>는 30대 중반부터 50대까지 다 큰 성인 남성들이 주요 등장 인물이지만 '청춘'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들의 나이와 무관하게 '청춘'이 느껴지는 것은 그들이 '유예된 처지'에 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대충 짐작 가는 진행과 결말에도 불구하고 아기자기하게 에피소드 중심으로 재미있게 꾸며져 있는 점은 이 소설의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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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말로 좋은 날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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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서재에는 내가 산 기억이 없는 책이 꽂혀 있을 때가 있다. 그런 경우는 둘 중 하나인데, 누가 선물했지만 관심이 없어 꽂아놓고 잊어버렸거나, '훔친 책'이다. 훔친 책이라고 해서 적극적인 의사를 가지고 '지불 과정'을 생략했다는 의미는 아니고, 어디선가 빌렸다가 돌려주지 않아 결과적으로 '훔친 책'이 된 경우이다. <참말로 좋은 날>도 그런 책이다. 원래는 회사 CEO(?)가 야심차게 꾸린 서가에 꽂혀 있던 책인데 6년 전에 빌렸다가 갑자기 발령을 받아 돌려주는 것을 잊었다.  


2006년에 출간된 <참말로 좋은 날>은 기존 성석제 소설과 달리 폭력적이고 건조하다. 해학과 유머도 다소 덜하다.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네>를 보자. 소설의 시작은 여느 성석제 소설 처럼 약간의 유머가 느껴진다. 아내로 부터 전화가 걸려오자 김종호는 "여보세요. 지금 오데로다 전화 건 겁니까요?"라고 응대한다. 김종호씨 핸드폰이 아니냐는 물음에 "전화는 맞는디 고 친구 시방 숨 넘어가느라 무진장 바쁩니다이." 한다. 아직은 성석제 소설이다.

그런데 아내가 이렇게 다급한 건 법원에서 통지서가 날아왔기 때문이다. 화가의 꿈을 아직 버리지 않은 김종호씨는 나름 식자연 하며 멍텅구리 같은 주변 사람들보다 약빠르게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같은 빌라에 사는 무식한 사람들보다 발빠르게 움직여 화를 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종호씨의 순진한 바램이었을 뿐임이 드러난다. '법대로' 종호씨는 전세보증금을 날릴 처지에 놓이고, 아내는 점점 말을 잃어간다.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말을 하라'며 다그치던 종호씨는 급기야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대고, 도움을 받던 후배에게는 쥐새끼 취급을 받는다. 집달리들이 들이닥치자 아내가 빌라 창 밖으로 뛰어내린다.

엽기적이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가 더하다. 어느 날 이민간 여동생이 한국에 명의를 빌려 투자하고 싶다고 하자 형제가 극적으로 화해한다. 여동생이 사준 부동산을 통해 얻게 될 프리미엄 덕분이었다. 하지만 택시 기사와 다툰 원호가 휴대폰을 분실하고, 휴대폰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묻어 두었던 가정사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돼지같은 자식놈은 아비 말을 듣지 않고, 아내는 바람난지 오래다. 아들의 머리통을 콜라병으로 내리쳤는데 이 돼지 같은 놈이 숨을 쉬지 않는다. 아늘돔이 라면을 끓이기 위해 켜놓은 가스불에서 불이 옮겨붙어 집안이 불탄다.

<집필자는 나오라>는 박태보에 관한 이야기이다. 박태보는 장희빈에 빠져 중전을 폐하려는 숙종에게 소를 올렸다가 친국을 당해 죽게 된다. 숙종은 집요하리만치 박태보에게 매질을 가한다.


세 편의 소설을 보면 '아비'라는 존재가 더 이상 '아비'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그들이 특정 조건 하에서 '아비'로 기능하지 못하고 파국을 맞는다는 점이다.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네>의 종호씨는 미술 분야에서 상도 수상했고 재능도 있는 사람이다. 그는 얼마든지 자식과 아내의 존경을 받으며 '아비'로 기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법' 앞에 무너져 가정을 파탄낸다. 사실 그를 무너뜨린 것은 '법'이라기 보다 '돈'이다. '돈'의 영역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자 돈이 '법'의 외피를 쓰고 나타나 종호씨를 파탄낸 것이다. 과거에는 식자층이 곧 중산층이었다. 대학물을 먹었으면 최소한 밥벌이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산층이 붕괴되며 그러한 공식은 깨진 지 오래다. 식자층의 몰락은 더욱 드라마틱하다. 그들의 손은 노동을 모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 텃밭을 가꾸는 1층 할머니를 계속 대비시킨 것이 아니었을까.

<아무것도 아니었다>의 원호씨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돈 덕택에 형제와 화해도 하고  떵떵거리고 살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이미 약간의 돈으로 붕괴된 가정을 일으킬 시기는 지났다. 이 소설에서는 패륜 아들이 아비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아비가 아들을 콜라병으로 때린다. <집필자는 나오라>에서도 아비(임금)이 아들(신하)를 때린다. 아비는 아들을 죽이고자 한다. 친국은 집요하고 매섭다.


<악어는 말했다>는 헛웃음이 픽 새나오는 소설이다. 한 때 호형호제 하던 인물들이 모여 술을 마신다. 과거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그들 사이에 공감대가 별로 없다. 동생뻘인 악어가 자꾸 '나'에게 술을 먹자고 한다. 사실 술을 같이 먹으며 풀어야 할 회포도 없고, 아쉬움에 붙잡는 것도 아니다. 그냥 술이 먹고 싶은 거다. 그래서 거듭 안 먹겠다는 나에게 악어는 말한다. "잘 가라, 돼지야."


이 밖에 향지라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쓴 <고욤>, 추억의 장소를 본래 지명과 사투리 이름을 대비시켜 풀어나가는 <환한 하루의 어느 한때>, 건강을 위해 일가를 이룬 인물이 한 순간의 실수로 트럭에 치여 죽고 만다는 <고귀한 신세>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http://blog.naver.com/rainsky94/22058009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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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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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드라이브 마이 카


가후쿠와 다카쓰키는 한 명의 여자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그 여인이 가후쿠에게는 아내이고, 다카쓰키에게는 불륜의 대상이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가후쿠는 아내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고 생각했지만 다카쓰키와 같은 사내에게 몸을 허락한 아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지, 아니면 다카쓰키와 같은 사내에게서 가후쿠는 감지할 수 없는 다른 매력을 느꼈는지... 그러나 이제는 아내가 죽었기 때문에 물어볼 수가 없다. 

가후쿠는 다카쓰키에게 '맹점' 이야기를 한다. 이에 대해 다카쓰키는 한참 고민한 끝에 말한다.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가 속속들이 안다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닐까요?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그거에요...... 만일 그게 맹점이라면 우리는 모두 비슷한 맹점을 안고서 살아가고 있는 거겠지요......"

다카쓰키 역시 가후쿠의 아내가 자신과의 관계를 잘라낸 상황에 대해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리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 완벽한 이해는 있을 수 없다. 완벽하게 이해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기 때문에 괴롭다.

o 예스터데이

기타루는 한신 타이거즈의 팬이기 때문에 도쿄에 살면서도 간사이 사투리를 배워 완벽히 구사하는 괴짜다. 집은 그럭저럭 불편 없는 수준으로 살았고, 와세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삼수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기타루와 '나'는 20대 초반의 한 시기에 만나 친하게 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여자친구 에리카를 '나'에게 소개시켜주고 싶어했다.
기타루의 말은 이렇다. 기타루와 에리카는 소꼽친구로 자랐고 커서는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성적인 대상으로는 생각되지 않아 키스 이상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에리카가 이런 상황에 불만을 느껴 다른 놈팡이와 사귀는 것은 그것대로 기분이 나쁠 것 같으니 가까운 친구인 '나'와 사귀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사실 기타루의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에리카에게 다소 흥미가 있었으므로 사귈 생각은 없었지만 에리카와 몇차례 만나 대화를 나눈다. 에리카 역시 기타루가 걱정하고 있는 그 상황에 대해 '나'에게 털어놓고, 기타루 외의 다른 남자 친구의 존재도 털어 놓는다.
얼마 뒤, 기타루는 말 없이 사라져 버린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나'는 에리카와 우연한 자리에서 조우한다. 그리고 기타루가 사라진 시기와 에리카가 다른 남자친구와 잠자리를 가진 시기가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타루는 짤막한 엽서를 가끔 에리카에게 보내왔는데, 미국에서 초밥 요리사가 되어 있었다는 것 외에는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지 않았다.

단편 <예스터데이>는 머리가 좋고 순발력은 있지만 지극히 비현실적인 사내아이와, 머리는 그다지 좋지 못하지만 사회 통념에 자신을 잘 적응시켜 가는 여자아이 얘기다.
소설 속 기타루와 에리카는 아직 어리고 미숙했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상대편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방법을 몰랐고, 충동적인 행동으로 관계를 망치기도 한다. 그들은 16년이 지난 지금도 서로에 대한 애틋함을 갖고 있다. 하지만 상대편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여전히 잘 알지 못한다.
잘 알지 못하면 이야기해야 한다. 그 과정이 알아가는 과정이다. 물론 대화를 한다고 해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긋나기도 한다. 왜냐하면 '말을 한다'는 행위는 '욕망'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 욕망의 방향이 서로 다르면 '이해'보다는 '다툼'이 끼어들 소지가 많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괜찮다. 다투기라도 하면 서로 무엇이 다른지 확실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o 독립기관


여자들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며 생을 즐기던 도카이씨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 대상과 자신이 '두 척의 보트처럼, 줄을 끊으려 해도 그걸 끊어낼 칼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는' 상태라고 인식한다.
일본에서는 인연이 될 상대와는 빨간 실로 엮여 있다고 생각한다. 도카이가 자신과 상대편 여성을 '로프에 묶인 두 척의 보트'라고 생각했던 것도 일종의 '인연'이나, '운명'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상대편 여인은 세치 혀로 도카이씨를 속여 왔다. 그런데 어쩌면 그녀는 거창한 계획이나, 사악한 마음에서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본인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독립적인 기관'이 시킨 짓인지도 모른다. 자기 편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한 생존 본능 같은 것.
그렇다면 인연이나 운명이 아닌데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도카이씨도 독립적인 기관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o 셰에라자드


하바라에게는 어떤 사정이 있어 집 밖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 그런 나를 수발 들어주기 위해 '그녀'가 온다. 그녀는 나와 성교도 했는데, 성교가 끝나면 셰에라자드처럼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녀는 학창 시절 수업을 빼먹고 좋아하던 남자애의 집에 몰래 들어가 잃어버려도 금방 티 나지 않을 물건들을 훔쳤다. 대신 자신의 머리카락이나 탐폰을 남겨두고 온다. 그 행위는 그녀를 몹시 흥분시켰다. 어느 날, 남자애의 어머니가 열쇠를 바꾸었기 때문에 그 행위는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하바라는 자신이 칠성장어가 되어 송어가 다가오길 기다리는 상상을 한다.


o 기노


아내가 친구와 바람이 나자 기노는 아내와 이혼하고 집을 나온다. 이모가 살던 집을 개조해 술집을 차렸는데 처음에는 손님이 없었다. 길고양이가 기노의 가게에 오기 시작했고, 가미타라는 남자 손님이 주기적으로 찾아 주었다. 어느 날, 가게에서 행패를 부리던 손님을 가미타가 처리해준다. 그리고 얼마 뒤, 가미타가 매우 애석하다는 표정으로 기노가 가게를 떠나야 하리라고 말한다. 얼마 전부터 가게 주위에서 뱀이 보이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가미타의 말대로 기노는 가급적 멀리 떠나 여행을 하기 시작한다. 절대로 사연을 쓰지 말라던 가미타의 충고를 어기고 이모에게 엽서를 보낸 날 밤, 기노가 묵는 곳의 유리창을 누군가 '똑똑' 하고 끊임 없이 두드린다. 그제서야 기노는 자신이 몹시 상처받았음을 시인한다.


o 사랑하는 잠자


어느 날 일어나보니 그는 그레고르 잠자(카프카의 <변신>주인공)로 변신했음을 알게 된다. 사람으로 변했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적응을 하지 못했지만 곧 익숙해진다. 밥을 먹고, 옷을 입고 하는 동안 낯선 곱추 여자가 잠자의 집에 방문한다. 잠자는 그녀가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와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진다. 잠자는 차분히 자신이 세계에서 배워야할 것들에 대해 생각하며 온기를 느낀다.


o 여자 없는 남자들


한밤중 한시가 넘어서 전화가 걸려온다. 목소리의 주인은 그녀의 남편이었는데, 그녀가 자살했다는 것을 알려왔다. 나는 그녀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와 '나'는 열네살에 만나 사랑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세상 물정을 잘 아는 뱃사람들이 그녀를 꼬여내어 '우리'는 헤어지게 된다. 그녀는 익숙하고 밝은 멜로디를 좋아했으므로 그녀가 천국, 혹은 그에 비견되는 장소에서 <A Summer Place> 같은 음악을 들으며 행복하고 평안하게 지내기를 기도한다. 여자 없는 남자들의 일원으로 그렇게 기도하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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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는 직원들을 위해 '독서통신' 이라는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해 준다. 한 달에 한 권 목록에 적친 책 중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면 며칠 후 사무실로 책이 배달된다. 배달된 책을 읽은 후 일정한 평가를 치르면 점수가 매겨지고, 3개월이 지나면 교육 수료가 된다. 지난 번에는 신청자가 많아 선착순으로 선발을 했으므로 교육 신청 메일이 오는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가능하다면 또 선정 되었으면 한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승진을 했다. 어제 발표가 났지만 실제로는 오늘부터다. 직장 생활을 한 뒤 세 번째 승진이다. 상대적으로 빠르다.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겸손하게 처신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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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틱 개미지옥 - 2007년 문학수첩작가상 수상작
서유미 지음 / 문학수첩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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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서울 소재 백화점에서 사흘간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는 <판타스틱 개미지옥>은 2000년대 한국 작가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2000년대 한국 작가가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전 세기의 작가들과 달리 밀레니엄 이후 한국 작가들에게서는 치열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재기발랄한 문체나 입담, 혹은 그동안 다루지 않았던 소재를 파헤쳐보는 시도, 형식의 극단적 파괴 등 어느 한 측면만을 강조하여 좋은 평을 받고 문학상을 수상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세대규정'을 통해 극찬을 받기도 한다. 저간의 사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늘의 작가상> 최근 수상작은 죄다 '세대규정'류의 함량 미달 작품이고, <한겨레문학상>과 <창비장편소설상>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전작 <쿨하게 한걸음>에서도 느꼈던 점인데 서유미의 소설은 쉽게 씌여진 글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궁구하여 써낸 글에서 느껴지는 그런 묵직함이 없다. 경험의 폭과 깊이가 한정적이고, 역사의식이나 세계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쿨하게 한걸음>에서 '현상을 걸터듬으며 스토리는 이어나가지만 개개인의 삶이 왜 그러한 상황에 처한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없는' 모습을 보였는데, <판타스틱 개미지옥>에서도 이 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를 분석하기 위해 상품을 분석한다. 상품의 속성에 자본주의의 모든 것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품이 가장 많은 곳이 백화점이다. 소설은 백화점 세일 기간에 벌어지는 일들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다루고 있는데,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얘기들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매우 진부한 얘기들이다. 백화점에 있다 보니 상품의 매력에 도취되어 쇼핑 중독에 빠지거나, 자신의 몸을 상품화하기 위한 살인적 다이어트에 몰두하거나, 노동력을 파는 것을 넘어 몸을 파는 지경에 이르거나 하는 얘기들. 그러나 이 작품은 제5회 문학수첩작가상 수상작이다.

 

http://blog.naver.com/rainsky94/220562584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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