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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평점 :
o 드라이브 마이 카
가후쿠와 다카쓰키는 한 명의 여자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그 여인이 가후쿠에게는 아내이고, 다카쓰키에게는 불륜의 대상이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가후쿠는 아내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고 생각했지만 다카쓰키와 같은 사내에게 몸을 허락한 아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지, 아니면 다카쓰키와 같은 사내에게서 가후쿠는 감지할 수 없는 다른 매력을 느꼈는지... 그러나 이제는 아내가 죽었기 때문에 물어볼 수가 없다.
가후쿠는 다카쓰키에게 '맹점' 이야기를 한다. 이에 대해 다카쓰키는 한참 고민한 끝에 말한다.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가 속속들이 안다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닐까요?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그거에요...... 만일 그게 맹점이라면 우리는 모두 비슷한 맹점을 안고서 살아가고 있는 거겠지요......"
다카쓰키 역시 가후쿠의 아내가 자신과의 관계를 잘라낸 상황에 대해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리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 완벽한 이해는 있을 수 없다. 완벽하게 이해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기 때문에 괴롭다.
o 예스터데이
기타루는 한신 타이거즈의 팬이기 때문에 도쿄에 살면서도 간사이 사투리를 배워 완벽히 구사하는 괴짜다. 집은 그럭저럭 불편 없는 수준으로 살았고, 와세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삼수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기타루와 '나'는 20대 초반의 한 시기에 만나 친하게 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여자친구 에리카를 '나'에게 소개시켜주고 싶어했다.
기타루의 말은 이렇다. 기타루와 에리카는 소꼽친구로 자랐고 커서는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성적인 대상으로는 생각되지 않아 키스 이상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에리카가 이런 상황에 불만을 느껴 다른 놈팡이와 사귀는 것은 그것대로 기분이 나쁠 것 같으니 가까운 친구인 '나'와 사귀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사실 기타루의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에리카에게 다소 흥미가 있었으므로 사귈 생각은 없었지만 에리카와 몇차례 만나 대화를 나눈다. 에리카 역시 기타루가 걱정하고 있는 그 상황에 대해 '나'에게 털어놓고, 기타루 외의 다른 남자 친구의 존재도 털어 놓는다.
얼마 뒤, 기타루는 말 없이 사라져 버린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나'는 에리카와 우연한 자리에서 조우한다. 그리고 기타루가 사라진 시기와 에리카가 다른 남자친구와 잠자리를 가진 시기가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타루는 짤막한 엽서를 가끔 에리카에게 보내왔는데, 미국에서 초밥 요리사가 되어 있었다는 것 외에는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지 않았다.
단편 <예스터데이>는 머리가 좋고 순발력은 있지만 지극히 비현실적인 사내아이와, 머리는 그다지 좋지 못하지만 사회 통념에 자신을 잘 적응시켜 가는 여자아이 얘기다.
소설 속 기타루와 에리카는 아직 어리고 미숙했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상대편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방법을 몰랐고, 충동적인 행동으로 관계를 망치기도 한다. 그들은 16년이 지난 지금도 서로에 대한 애틋함을 갖고 있다. 하지만 상대편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여전히 잘 알지 못한다.
잘 알지 못하면 이야기해야 한다. 그 과정이 알아가는 과정이다. 물론 대화를 한다고 해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긋나기도 한다. 왜냐하면 '말을 한다'는 행위는 '욕망'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 욕망의 방향이 서로 다르면 '이해'보다는 '다툼'이 끼어들 소지가 많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괜찮다. 다투기라도 하면 서로 무엇이 다른지 확실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o 독립기관
여자들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며 생을 즐기던 도카이씨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 대상과 자신이 '두 척의 보트처럼, 줄을 끊으려 해도 그걸 끊어낼 칼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는' 상태라고 인식한다.
일본에서는 인연이 될 상대와는 빨간 실로 엮여 있다고 생각한다. 도카이가 자신과 상대편 여성을 '로프에 묶인 두 척의 보트'라고 생각했던 것도 일종의 '인연'이나, '운명'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상대편 여인은 세치 혀로 도카이씨를 속여 왔다. 그런데 어쩌면 그녀는 거창한 계획이나, 사악한 마음에서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본인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독립적인 기관'이 시킨 짓인지도 모른다. 자기 편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한 생존 본능 같은 것.
그렇다면 인연이나 운명이 아닌데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도카이씨도 독립적인 기관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o 셰에라자드
하바라에게는 어떤 사정이 있어 집 밖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 그런 나를 수발 들어주기 위해 '그녀'가 온다. 그녀는 나와 성교도 했는데, 성교가 끝나면 셰에라자드처럼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녀는 학창 시절 수업을 빼먹고 좋아하던 남자애의 집에 몰래 들어가 잃어버려도 금방 티 나지 않을 물건들을 훔쳤다. 대신 자신의 머리카락이나 탐폰을 남겨두고 온다. 그 행위는 그녀를 몹시 흥분시켰다. 어느 날, 남자애의 어머니가 열쇠를 바꾸었기 때문에 그 행위는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하바라는 자신이 칠성장어가 되어 송어가 다가오길 기다리는 상상을 한다.
o 기노
아내가 친구와 바람이 나자 기노는 아내와 이혼하고 집을 나온다. 이모가 살던 집을 개조해 술집을 차렸는데 처음에는 손님이 없었다. 길고양이가 기노의 가게에 오기 시작했고, 가미타라는 남자 손님이 주기적으로 찾아 주었다. 어느 날, 가게에서 행패를 부리던 손님을 가미타가 처리해준다. 그리고 얼마 뒤, 가미타가 매우 애석하다는 표정으로 기노가 가게를 떠나야 하리라고 말한다. 얼마 전부터 가게 주위에서 뱀이 보이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가미타의 말대로 기노는 가급적 멀리 떠나 여행을 하기 시작한다. 절대로 사연을 쓰지 말라던 가미타의 충고를 어기고 이모에게 엽서를 보낸 날 밤, 기노가 묵는 곳의 유리창을 누군가 '똑똑' 하고 끊임 없이 두드린다. 그제서야 기노는 자신이 몹시 상처받았음을 시인한다.
o 사랑하는 잠자
어느 날 일어나보니 그는 그레고르 잠자(카프카의 <변신>주인공)로 변신했음을 알게 된다. 사람으로 변했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적응을 하지 못했지만 곧 익숙해진다. 밥을 먹고, 옷을 입고 하는 동안 낯선 곱추 여자가 잠자의 집에 방문한다. 잠자는 그녀가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와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진다. 잠자는 차분히 자신이 세계에서 배워야할 것들에 대해 생각하며 온기를 느낀다.
o 여자 없는 남자들
한밤중 한시가 넘어서 전화가 걸려온다. 목소리의 주인은 그녀의 남편이었는데, 그녀가 자살했다는 것을 알려왔다. 나는 그녀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와 '나'는 열네살에 만나 사랑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세상 물정을 잘 아는 뱃사람들이 그녀를 꼬여내어 '우리'는 헤어지게 된다. 그녀는 익숙하고 밝은 멜로디를 좋아했으므로 그녀가 천국, 혹은 그에 비견되는 장소에서 <A Summer Place> 같은 음악을 들으며 행복하고 평안하게 지내기를 기도한다. 여자 없는 남자들의 일원으로 그렇게 기도하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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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는 직원들을 위해 '독서통신' 이라는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해 준다. 한 달에 한 권 목록에 적친 책 중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면 며칠 후 사무실로 책이 배달된다. 배달된 책을 읽은 후 일정한 평가를 치르면 점수가 매겨지고, 3개월이 지나면 교육 수료가 된다. 지난 번에는 신청자가 많아 선착순으로 선발을 했으므로 교육 신청 메일이 오는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가능하다면 또 선정 되었으면 한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승진을 했다. 어제 발표가 났지만 실제로는 오늘부터다. 직장 생활을 한 뒤 세 번째 승진이다. 상대적으로 빠르다.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겸손하게 처신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