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딱 한 개만 더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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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발표된 가가 형사 시리즈로 다섯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여러 명의 용의자 중 누가 진범인지 밝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어떤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가를 가가 형사가 밝혀내는 내용이다.

<거짓말, 딱 한개만 더>는 <잠자는 숲>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이다. 자살한 것처럼 보이는 전직 발레리나가 사실은 살해당했고, 그 범인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또 다른 전직 발레리나라는 내용이다. 살해 동기는 일반인으로서는 언뜻 납득하기 어렵다. 발레 공연에서 자신이 해내기 어려운 부분을 삭제한 것이 들키자 돈을 주고 무마한 후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 살인을 하기 때문이다. 한 분야에서 최고에 올라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자긍심의 영역이 얼마만큼 상처 입기 쉬운지 소설은 이야기하고 있다.

<차가운 작열>은 빠찡꼬에 빠진 주부가 한여름에 어린 아이를 차안에 방치했다가 사망에 이른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씌인 작품이다. 주부는 아이가 죽은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강도가 든 것처럼 꾸민 후 차단기를 내린다. 정전이 되어 아이가 에어컨을 쐬지 못해 탈수로 죽었다고 꾸민 것인데, 이를 눈치챈 남편이 아내를 목졸라 죽인다.

<제2지망>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딸을 통해 이루려는 일그러진 어머니의 모습이 비극을 불러오는 내용이다. 이혼 후 새로 사귄 남자에 대해 딸이 적개심을 품고 살해한다는 엽기적인 내용이다.

<어그러진 계산>은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잘 보여준다. 아내를 소유물로 생각하는 가부장적인 남편을 아내와 그녀의 정부가 살해하려 한다. 그러나 도리어 정부가 살해당하고, 아이러니하게도 남편 마저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남편이 정부를 살해한 후 보여준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행동들이다. 사랑하면서도 구속하며 괴롭히는 알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친구의 조언>은 냉혹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가가 형사의 친구가 어느 날 졸음 운전으로 교통사고를 당한다. 가가는 친구의 교통사고에 뭔가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다고 생각하여 조사에 착수한다. 친구의 아내는 동성애인에게 빠져 남편을 살해하기 위해 드링크에 수면제를 탔었다. 그녀가 한 행동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확실한 보장도 없었지 않느냐는 친구의 물음에 가가는 단지 죽어주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그녀는 행동한 것이라고 말한다. 친구가 아내에게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암시를 주자 아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을 나간다. 눈치챘다면 어쩔 수 없지 라는 식의 태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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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1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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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예프스키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은 1844년 11월에 초고가 완성된 후 다음 해 5월까지 수정되었고, 탈고된 원고가 1846년 1월 <뻬쩨르부르그 선집>에 소개되었다. 그리고로비치, 네끄라소프, 벨린스끼 등은 새로운 고골이 출현했다고 생각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하급 관리 마까르 제부쉬낀과 병이 든 고아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가 주고 받은 편지와 바르바라의 짤막한 수기로 구성되어 있다.

마까르 제부쉬낀의 가난함은 고골의 <외투>에 나오는 아까끼 아까끼에비치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꼴을 갖춘 옷은 모두 저당 잡힌 탓에 단추가 모두 떨어져 나간 옷을 입었고, 구두는 발이 삐져나올 지경이다. 변변한 방에 세를 들 수가 없어 부엌에 칸막이 한 방에서 악취를 맡으며 살아간다. 월급은 벌써 몇달치를 가불해 썼고, 하숙비가 밀려 주인집 여자는 음식조차 주지 않는다. 그에게 유일한 낙이라면 먼 친척인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와 주고 받는 편지다. 

바르바라는 어릴 적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병이 들어 가세가 몰락하자 먼 친척인 안나 표도로브나의 신세를 지게 된다. 당시 그 집에는 폐병에 걸린 뽀끄로프스끼라는 대학생이 있었는데 바르바라는 그의 이지적인 면에 끌려 첫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뽀끄로프스끼가 지병으로 죽고 어머니마저 사망하자 안나 표도로브나는 뚜쟁이처럼 바르바라를 부잣집에 시집 보내 한 밑천 잡을 궁리를 한다. 견디다 못한 바르바라는 하녀 표도라와 함께 그 집을 나와 하숙을 하며 곤궁한 생활을 하게 된다.

마까르 제부쉬낀은 가불을 하고 돈을 빌려 바르바라에게 보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파탄을 맞게 된다. 바르바라도 바느질감을 맡아 약간의 돈을 벌어들여 마까르 제부쉬낀에게 보내지만 그녀의 건강이 악화되어 이마저도 불가능하게 된다. 둘 사이에 돈 이야기 외에 문학적인 의견 교류도 약간은 있었지만 마까르 제부쉬낀의 낮은 지적 수준으로 인해 원만히 진행되지는 못한다. 마까르 제부쉬낀은 고골의 <외투>가 권선징악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푸쉬킨의 작품에 대해서도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반면 이웃의 삼류 작가 라따자예프는 훌륭한 소설가라고 생각했다.

미뤄 오던 파국이 눈 앞으로 다가왔을 즈음, 바르바라의 집에 비꼬프라는 부유한 지주가 찾아온다. 그는 바르바라가 겪고 있는 고통은 모두 돈으로 해결될 수 있고, 자신은 유산을 물려줄 아내가 필요하니 가부를 속히 알려달라고 한다. 만약 늦게 알려준다면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겠다면서.

얼마 후 바르바라는 제부쉬낀에게 자신이 비꼬프의 아내가 되기로 결심했고, 이로써 얼마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는 편지를 보낸다. 제부쉬낀에게 몇 차례 편지가 더 온다. 모두 결혼식 준비에 필요한 물품 준비를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에는 제부쉬낀이 그동안 보낸 편지를 모두 살던 집에 놓아 두고 떠날 것이며, 이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 씌여 있었다.

제부쉬낀은 바르바라에게 자신이 점점 더 나아지고 있었다는 말과, 그녀가 여행하기엔 날씨가 너무 험하다는 말과, 그 밖의 이치에 닿지 않는 말들을 횡설수설하는 편지를 쓴다. 그의 마지막 편지가 바르바라에게 전달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도스또예프스키에 관해서는 '악마적'이라는 수식이 많이 붙는다. 막심 고리키는 그가 '러시아가 낳은 악마적인 천재'라고 했고, 토마스 만은 도스또예프스끼가 '불행과 악덕, 욕적과 범죄에 기독교적인 공감을 보인 작가'라고 했다. 꼰스딴찐 모출스끼는 도스또예프스끼가 '인간 지옥의 모든 계(界)를 통과하는데 이 지옥은 <신곡>의 중세적 지옥보다 더 끔찍하다'고 했다.

 

<가난한 사람들>에서도 이러한 악마적 상황은 변함 없이 엿보인다. 얼핏 보면 이 소설은 가난한 사람들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로 읽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끔찍한 지옥이 어른거린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한다고 편지에 쓰고 있지만 둘 사이에 편지를 주고 받는 행위 외에 이렇다 할 진전은 전혀 없다. 기껏해야 푼돈을 주고 받는 상호 부조 행위가 전부이고, 육체적인 관계도 없고, 미래에 대한 약속도 없다. 

제부쉬낀은 자신이 바르바라를 사랑하는 것이 '부성애'라고 애써 선을 긋고 있다. 자신의 욕망이 실현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제부쉬낀의 욕망은 언제나 '이성에 대한 사랑'을 가르키고 있다. 파국을 늦추기 위한 제부쉬낀의 안간힘은 눈물 겹다. 월급을 몇달치나 가불하고, 상여금이 나오면 꽃과 사탕을 보내며, 사채업자를 찾아다닌다. 더 이상 파국을 늦출 수 없는 그 순간, 바르바라는 주저 없이 비꼬프에게 떠난다. 그녀는 편지에 슬픔에 관해 쓰고 있지만 지긋지긋한 가난으로부터 벗어난다는 흥분 역시 감출 수가 없다. 

기형적인 둘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끝이 난다. 제부쉬낀은 바르바라를 통해 자신의 비천한 삶이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녀와 같이 아름답고, 문학적인 소양을 갖춘 젊은 여성과 자신이 '가난'이라는 공통분모를 영유하며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에서 환각을 맛 본 것인지도 모른다. 그 환각이 깨어지는 순간 제부쉬낀의 지옥이 시작된다. 

 

http://blog.naver.com/rainsky94/22017554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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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마켓 스타
가쓰라 노조미 지음, 양억관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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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노무라 사토시는 상급 공무원 시험을 패스한 후 Y현 산업진흥과에 발령 받아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는 인물이다. 주특기는 권력 지형 파악 및 줄서기, 훗날 책임질 일이 발생치 않도록 서류 꾸미기 등이다. 최근에는 Y현에서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직원인사교류' 대상자로 발탁되어 1년간 민간 사업체에서 시간만 때우다 오면 진급도 약속되어 있다.

사토시가 배정받은 곳은 중간 규모의 슈퍼마켓. 동네 슈퍼 보다는 크고 백화점 규모에는 미치지 못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하여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 보리라던 처음 작정과 달리, 슈퍼마켓에서 사토시에게 주어진 일은 그야말로 팔리지 않는 상품들 앞에서 자리 보전이나 하는 역할이다. 점장과 부점장은 매사 의욕 부족, 동료 사원들은 근무 시간 중 홀연히 사라진다. 게다가 그 슈퍼의 실세는 어처구니 없게도 파트 타임으로 일하는 니노미야라는 귀염성 없는 중년 여성이다.

함께 민간에 배치 받았던 현청 동료들이 민간의 접객 태도에 진저리를 내고 현청으로 복귀하는 동안 사토시는 슈퍼마켓의 비능률적인 시스템을 바꿔보려 한다. 하지만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기존해 해왔던 방식만큼도 따라가지 못하는 사태에 사토시는 당황한다. 그리고 자신이 시스템만 바꾸려 했지 '사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게다가 슈퍼마켓에서 시간만 보내며 빈둥댔다고 생각했던 동료들도 저마다의 고민으로 슈퍼마켓을 위해 일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원제는 <현청의 별>로 니시타니 히로시 감독, 오다 유지와 시바사키 코우가 주연으로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 시스템과 구조를 바꾸면 조직을 체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열심히 뛰는 사토시가 그 안에서 실제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 들과 부딛혀 가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재미있다. 아들과의 대화가 매사 어긋나는 니노미야가 자신의 진심을 표현하기 위해 내면을 응시하는 모습도 흥미롭다.

 

 

http://blog.naver.com/rainsky94/220174627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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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실의 바다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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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여 오라>는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에 나온 노래를 모티프로 하여 죽음과 이에 대한 대자뷰를 환상적으로 매치시킨 작품이다. 소개된 노래는 다음과 같다.

 

올해 처음 봄을 알게 될 벚꽃

지는 것은 배우지 않기를

...

봄마다 꽃은 피지만

만남은 목숨이 있어야

...

봄이 오늘뿐이라 생각하지 않으면

꽃그늘을 뜨기도 쉬우련만

 

<작은 갈색 병>, <국경의 남쪽>은 호러 소설로 타인의 피를 보물처럼 수집하는 전직 간호사 출신의 직장여성과 손님에게 비소를 조금씩 먹여 죽이는 한편 언젠가는 국경의 남쪽으로 떠나겠다는 꿈을 갖고 있는 카페 여급의 이야기이다. 호러지만 별다른 공포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사오 오설리번을 찾아서>는 SF 소설로 작가의 다른 소설에서도 언급이 된다. 대작 SF 소설의 첫머리로 쓰여졌다고 하나 아직까지 그 소설은 씌여지지 않았고, 자체적인 완성도도 그다지 높지 않다.

 

<수련>과 <피크닉 준비>는 그야말로 요령부득의 작품이다. <수련>은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에 등장하는 미즈노 리세의 어린 시절 이야기이고, <피크닉 준비>는 <밤의 피크닉>의 하루 전 이야기이다. <도서실의 바다> 역시 이런 작품 중 하나인데 <여섯 번째 사요코>에서 파생된 이야기로 이 작품만으로는 무슨 내용인지 짐작하기가 어렵다.

 

<어느 영화의 기억>은 호러미스터리물이다. 우연히 영화를 보고 작은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생각이 난 주인공이 과거 기억을 더듬다 보니 작은아버지와 어머니가 공모해 작은어머니를 죽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오디세이아>는 자체적으로 완결적인 이야기이다. 거창한 제목과는 달리 움직이는 도시에 관한 이야기이다.

 

<도서실의 바다>는 1995년에서 2001년 사이에 씌여진 단편을 묶어 놓은 책으로 SF, 미스터리, 호러 등 다양한 장르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온다 리쿠의 마니아라면 꽤나 매력적인 작품집이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에게는 지그소 퍼즐의 한 조각만을 손에 들고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의아해 할 작품들이 많다.

자신의 작품들 사이에 연관을 만들고, 에피소드를 추가하고, 이야기를 확장시켜나가는 온다 리쿠의 소설에 흥미를 갖는 독자라면 모르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난해한 수수께끼 같은 작품 모음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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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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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평양에서 기독교 목사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자행된다. 열네 명의 목사가 공산군 비밀경찰에게 끌려갔고, 그 중 두 명만이 살아 남았다. 그나마 한 명의 목사는 정신에 이상이 생겼다.

1950년 11월, 평양을 수복한 후 육본 정보처 장대령은 이 집단 처형 사건을 수사하게 된다. 장대령은 열 두명의 목사가 살해당한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했고, 변수를 최소화 하고 싶었다. 장대령에게 변수는 신목사였다. 그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진실이 무엇인지에 따라 정치 선전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대령이 원하는 최상의 그림은 열두 명의 목사가 공산군에게 의연히 맞선 순교자가 되는 그림이었다.

장대령은 이대위를 시켜 살아남은 신목사와 미쳐버린 한목사가 공산군에게 부역하고 목숨을 구걸한 것은 아닌지, 열두 명의 최후가 어떠했는지 조사하게 한다.

하지만 신목사는 처형 당시의 일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살아남은 것은 신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애매한 증언을 할 뿐 그 외의 질문에는 일절 대답하지 않았다. 장대령은 이대위에게 그들이 부역한 정황이 있는지 매우 다그쳤지만, 이대위는 어쩐지 신목사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진실을 감추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던 중, 이대위의 친구이자 중앙 교회 목사의 아들인 김대위가 평양으로 온다. 김대위는 어렸을 적 아버지의 광신적인 태도 때문에 불화하다 의절까지 했었다. 이제 그가 궁금해하는 것은 자신의 아버지가 과연 죽음 앞에서도 과거의 태도를 고수하다 사망했는가였다. 만일 그러한 광신적인 태도를 견지하다 사망했다면 아버지가 죽었을지라도 화해는 불가능할 것이었다.

진실을 둘러싸고 신목사의 침묵은 이어지고, 장대령은 어느 순간 신목사의 부역 행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사실 장대령은 죽은 열두 명의 목사가 순교자로 추앙 받기만 하면 정치적인 선전 활동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가 우려한 것은 신목사가 열두 명의 목사가 순교자가 되지 못하는 증언을 할까 우려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자락 진실이 밝혀진다. 열두 명의 목사는 의연하게 사망하지도 않았고, 서로 밀고했으며, 박대위의 아버지는 끝내 공산군에게 협조를 거부하긴 했지만 자신의 신에 대해서도 절망하여 기도를 올리지 않은 채 사망했다. 정작 최후까지 저항했던 것은 신목사였다.

신목사는 침묵으로 그들을 보호했으나 어느 순간 입을 연다. 모두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긴장한다. 뜻밖에도 그는 죽은 열두 명의 목사가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고, 자신이 비겁했었노라고 말한다. 진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발언이었다.

 

열두 명의 목사가 처형 당했다. 그들은 공포에 질렸고, 서로를 배신했으며, 자신의 신을 저버렸다. 그 와중에 한 명의 목사가 미쳤고, 의연하게 버티어 살아남은 목사는 진실의 수호자가 된다.

 

진실은 하나이지만, 장대령과 이대위, 신목사, 고군목, 박대위는 각기 다른 진실을 요구한다. 아니,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자신들의 욕망이 투영된 '증거'로 진실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신목사는 끝내 진실을 은폐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나는 인간이 희망을 잃을 때 어떻게 동물이 되는지, 약속을 잃었을 때 어떻게 야만이 되는지를 거기서 보았소......희망 없이는, 그리고 정의에 대한 약속 없이는 인간은 고난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 희망과 약속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면(하긴 이게 사실이지만) 다른 데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신목사는 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희망이라고 말한다. 그 희망이 없어 인간이 야만이 된다면, 진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고 묻는 것이다.

 

1932년 함흥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김은국은 1947년 공산주의 정권을 피해 남한으로 내려와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 1950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곧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에 입대하여 참전한 후, 미군 사령관 아서 G.트루도 소장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건너간다.

1964년 발표된 <순교자 The Martyred>는 김은국의 처녀작으로 언론과 문단의 호평을 받았고 20주 연속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기도 한다. 국내에서는 1965년 유현목 감독이 영화화하였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다수의 한국소설을 영어로 번역하여 미국에 소개하였고, 다큐멘터리 작업에도 참가한다. 한국계 작가로는 처음으로 1967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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