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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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드라이브 마이 카


가후쿠와 다카쓰키는 한 명의 여자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그 여인이 가후쿠에게는 아내이고, 다카쓰키에게는 불륜의 대상이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가후쿠는 아내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고 생각했지만 다카쓰키와 같은 사내에게 몸을 허락한 아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지, 아니면 다카쓰키와 같은 사내에게서 가후쿠는 감지할 수 없는 다른 매력을 느꼈는지... 그러나 이제는 아내가 죽었기 때문에 물어볼 수가 없다. 

가후쿠는 다카쓰키에게 '맹점' 이야기를 한다. 이에 대해 다카쓰키는 한참 고민한 끝에 말한다.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가 속속들이 안다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닐까요?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그거에요...... 만일 그게 맹점이라면 우리는 모두 비슷한 맹점을 안고서 살아가고 있는 거겠지요......"

다카쓰키 역시 가후쿠의 아내가 자신과의 관계를 잘라낸 상황에 대해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리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 완벽한 이해는 있을 수 없다. 완벽하게 이해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기 때문에 괴롭다.

o 예스터데이

기타루는 한신 타이거즈의 팬이기 때문에 도쿄에 살면서도 간사이 사투리를 배워 완벽히 구사하는 괴짜다. 집은 그럭저럭 불편 없는 수준으로 살았고, 와세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삼수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기타루와 '나'는 20대 초반의 한 시기에 만나 친하게 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여자친구 에리카를 '나'에게 소개시켜주고 싶어했다.
기타루의 말은 이렇다. 기타루와 에리카는 소꼽친구로 자랐고 커서는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성적인 대상으로는 생각되지 않아 키스 이상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에리카가 이런 상황에 불만을 느껴 다른 놈팡이와 사귀는 것은 그것대로 기분이 나쁠 것 같으니 가까운 친구인 '나'와 사귀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사실 기타루의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에리카에게 다소 흥미가 있었으므로 사귈 생각은 없었지만 에리카와 몇차례 만나 대화를 나눈다. 에리카 역시 기타루가 걱정하고 있는 그 상황에 대해 '나'에게 털어놓고, 기타루 외의 다른 남자 친구의 존재도 털어 놓는다.
얼마 뒤, 기타루는 말 없이 사라져 버린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나'는 에리카와 우연한 자리에서 조우한다. 그리고 기타루가 사라진 시기와 에리카가 다른 남자친구와 잠자리를 가진 시기가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타루는 짤막한 엽서를 가끔 에리카에게 보내왔는데, 미국에서 초밥 요리사가 되어 있었다는 것 외에는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지 않았다.

단편 <예스터데이>는 머리가 좋고 순발력은 있지만 지극히 비현실적인 사내아이와, 머리는 그다지 좋지 못하지만 사회 통념에 자신을 잘 적응시켜 가는 여자아이 얘기다.
소설 속 기타루와 에리카는 아직 어리고 미숙했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상대편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방법을 몰랐고, 충동적인 행동으로 관계를 망치기도 한다. 그들은 16년이 지난 지금도 서로에 대한 애틋함을 갖고 있다. 하지만 상대편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여전히 잘 알지 못한다.
잘 알지 못하면 이야기해야 한다. 그 과정이 알아가는 과정이다. 물론 대화를 한다고 해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긋나기도 한다. 왜냐하면 '말을 한다'는 행위는 '욕망'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 욕망의 방향이 서로 다르면 '이해'보다는 '다툼'이 끼어들 소지가 많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괜찮다. 다투기라도 하면 서로 무엇이 다른지 확실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o 독립기관


여자들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며 생을 즐기던 도카이씨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 대상과 자신이 '두 척의 보트처럼, 줄을 끊으려 해도 그걸 끊어낼 칼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는' 상태라고 인식한다.
일본에서는 인연이 될 상대와는 빨간 실로 엮여 있다고 생각한다. 도카이가 자신과 상대편 여성을 '로프에 묶인 두 척의 보트'라고 생각했던 것도 일종의 '인연'이나, '운명'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상대편 여인은 세치 혀로 도카이씨를 속여 왔다. 그런데 어쩌면 그녀는 거창한 계획이나, 사악한 마음에서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본인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독립적인 기관'이 시킨 짓인지도 모른다. 자기 편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한 생존 본능 같은 것.
그렇다면 인연이나 운명이 아닌데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도카이씨도 독립적인 기관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o 셰에라자드


하바라에게는 어떤 사정이 있어 집 밖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 그런 나를 수발 들어주기 위해 '그녀'가 온다. 그녀는 나와 성교도 했는데, 성교가 끝나면 셰에라자드처럼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녀는 학창 시절 수업을 빼먹고 좋아하던 남자애의 집에 몰래 들어가 잃어버려도 금방 티 나지 않을 물건들을 훔쳤다. 대신 자신의 머리카락이나 탐폰을 남겨두고 온다. 그 행위는 그녀를 몹시 흥분시켰다. 어느 날, 남자애의 어머니가 열쇠를 바꾸었기 때문에 그 행위는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하바라는 자신이 칠성장어가 되어 송어가 다가오길 기다리는 상상을 한다.


o 기노


아내가 친구와 바람이 나자 기노는 아내와 이혼하고 집을 나온다. 이모가 살던 집을 개조해 술집을 차렸는데 처음에는 손님이 없었다. 길고양이가 기노의 가게에 오기 시작했고, 가미타라는 남자 손님이 주기적으로 찾아 주었다. 어느 날, 가게에서 행패를 부리던 손님을 가미타가 처리해준다. 그리고 얼마 뒤, 가미타가 매우 애석하다는 표정으로 기노가 가게를 떠나야 하리라고 말한다. 얼마 전부터 가게 주위에서 뱀이 보이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가미타의 말대로 기노는 가급적 멀리 떠나 여행을 하기 시작한다. 절대로 사연을 쓰지 말라던 가미타의 충고를 어기고 이모에게 엽서를 보낸 날 밤, 기노가 묵는 곳의 유리창을 누군가 '똑똑' 하고 끊임 없이 두드린다. 그제서야 기노는 자신이 몹시 상처받았음을 시인한다.


o 사랑하는 잠자


어느 날 일어나보니 그는 그레고르 잠자(카프카의 <변신>주인공)로 변신했음을 알게 된다. 사람으로 변했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적응을 하지 못했지만 곧 익숙해진다. 밥을 먹고, 옷을 입고 하는 동안 낯선 곱추 여자가 잠자의 집에 방문한다. 잠자는 그녀가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와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진다. 잠자는 차분히 자신이 세계에서 배워야할 것들에 대해 생각하며 온기를 느낀다.


o 여자 없는 남자들


한밤중 한시가 넘어서 전화가 걸려온다. 목소리의 주인은 그녀의 남편이었는데, 그녀가 자살했다는 것을 알려왔다. 나는 그녀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와 '나'는 열네살에 만나 사랑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세상 물정을 잘 아는 뱃사람들이 그녀를 꼬여내어 '우리'는 헤어지게 된다. 그녀는 익숙하고 밝은 멜로디를 좋아했으므로 그녀가 천국, 혹은 그에 비견되는 장소에서 <A Summer Place> 같은 음악을 들으며 행복하고 평안하게 지내기를 기도한다. 여자 없는 남자들의 일원으로 그렇게 기도하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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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는 직원들을 위해 '독서통신' 이라는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해 준다. 한 달에 한 권 목록에 적친 책 중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면 며칠 후 사무실로 책이 배달된다. 배달된 책을 읽은 후 일정한 평가를 치르면 점수가 매겨지고, 3개월이 지나면 교육 수료가 된다. 지난 번에는 신청자가 많아 선착순으로 선발을 했으므로 교육 신청 메일이 오는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가능하다면 또 선정 되었으면 한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승진을 했다. 어제 발표가 났지만 실제로는 오늘부터다. 직장 생활을 한 뒤 세 번째 승진이다. 상대적으로 빠르다.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겸손하게 처신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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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틱 개미지옥 - 2007년 문학수첩작가상 수상작
서유미 지음 / 문학수첩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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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소재 백화점에서 사흘간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는 <판타스틱 개미지옥>은 2000년대 한국 작가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2000년대 한국 작가가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전 세기의 작가들과 달리 밀레니엄 이후 한국 작가들에게서는 치열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재기발랄한 문체나 입담, 혹은 그동안 다루지 않았던 소재를 파헤쳐보는 시도, 형식의 극단적 파괴 등 어느 한 측면만을 강조하여 좋은 평을 받고 문학상을 수상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세대규정'을 통해 극찬을 받기도 한다. 저간의 사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늘의 작가상> 최근 수상작은 죄다 '세대규정'류의 함량 미달 작품이고, <한겨레문학상>과 <창비장편소설상>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전작 <쿨하게 한걸음>에서도 느꼈던 점인데 서유미의 소설은 쉽게 씌여진 글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궁구하여 써낸 글에서 느껴지는 그런 묵직함이 없다. 경험의 폭과 깊이가 한정적이고, 역사의식이나 세계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쿨하게 한걸음>에서 '현상을 걸터듬으며 스토리는 이어나가지만 개개인의 삶이 왜 그러한 상황에 처한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없는' 모습을 보였는데, <판타스틱 개미지옥>에서도 이 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를 분석하기 위해 상품을 분석한다. 상품의 속성에 자본주의의 모든 것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품이 가장 많은 곳이 백화점이다. 소설은 백화점 세일 기간에 벌어지는 일들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다루고 있는데,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얘기들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매우 진부한 얘기들이다. 백화점에 있다 보니 상품의 매력에 도취되어 쇼핑 중독에 빠지거나, 자신의 몸을 상품화하기 위한 살인적 다이어트에 몰두하거나, 노동력을 파는 것을 넘어 몸을 파는 지경에 이르거나 하는 얘기들. 그러나 이 작품은 제5회 문학수첩작가상 수상작이다.

 

http://blog.naver.com/rainsky94/220562584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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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괴수전
이지월 지음 / 민음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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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프로필에 씌여 있는 말들에 혹해서 집어든 책. "마지막 LP 세대, 혹은 첫 번째 CD 세대" 그렇다면 나와 연배가 비슷하다. 게다가 '해적판 만화책과 대본소용 무협지' 대목에 이르러서는 호감마저 든다.

 

작품의 시작은 조세희의 단편 <기계도시>에서 따온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 또한 반갑다.

 

은강은 크고 그 안은 복잡하다. 은강 사람들이 자기네 도시를 두고 이야기할 때 얼른 이해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갑갑하다>는 말이다. 은강은 서울에서 멀지 않은 서해 반도부에 위치해 있어 삼면이 바다이다.

 

은강이 곧 인천이 아닌가! 게다가 인천에서 다만 얼마간이라도 살았다면 주인공이 활약하는 무대가 제물포역 인근이고, 그가 다니는 학교가 선인재단의 선인고등학교라는 사실을 눈치채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낯익은 것들은 계속 등장한다. 신포시장의 닭강정 가게,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심지>임에 분명한 음악감상실, 그리고 3M(Metallica, Megadeth, Metal Church)으로 일컬어지던 쓰레쉬 메탈 밴드들까지... 하지만 소설에 대한 호감과 설렘은 딱 여기까지이다. 작품은 지극히 개인적인 끄적임 수준에서 그치고 만다.

 

정확하진 않지만 영화 <장미빛 인생>에서 무협지 작가가 경찰에게 쫓기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가 쓴 무협지 내용이 너무나 현실 정치와 비슷해서였던 걸로 기억한다. 정권은 무협지 형식을 빌어 현실정치를 까댄 그 작가를 용서할 수 없었고, 남영동 쯤으로 끌고가 매운 맛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무협지 작가는 아무 생각 없이 썼던 글이었고, 억울하기 짝이 없어했던 것이 기억난다.

2010년에 씌여진 이 소설은 이와는 정반대 상황이다. 인천으로 대표되는 변두리에서, 선인재단으로 대표되는 거지 같은 사학재단에 맞서 주인공이 한바탕 활극을 벌이는 내용이 무협지 형식을 빌어 씌여졌다. 

내용은 상당히 아스트랄하다. 절대 무공을 자랑하는 스승, 절대 미모를 자랑하는 소피와 더불어 주인공은 선인재단 비리에 맞서 학생들을 규합하여 한 바탕 혈전을 벌인다. 하지만 절대적 힘의 차이로 굴욕적인 패배를 시인한 뒤 스승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소피 역시 해직 교사와 프랑스로 편도행 티켓을 끊어 날아가버린다. 일상생활로 돌아와 그동안 이쁜줄 몰랐던 미술학도 아가씨(파랑새?)가 사실은 귀여웠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다음 이어지는 내용은 그냥 마무리를 위한 중언부언인데 딱히 이렇다할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다 읽고 나면 뭔가 '하다 만 느낌', '찜찜함' 등을 강하게 느끼게 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주인공 스스로가 한 발 빼고 있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공권력과 재단에 맞서 한바탕 혈전을 치르면서도 일면 방관자처럼 군다. 해직 교사와 소피 등을 통칭 '간첩단'으로 부르며 그들의 행태에 대해서 미심쩍은 상황을 나열하고, 학교 측에 붙어 '구사대' 노릇을 하는 '애교심' 넘치는 자들에 대해서는 '희화화'라는 기법을 통해 그 악랄함과 잔인함에 면죄부를 준다. (결국 주인공은 담배 한 대에 그들과 화해하고 만다)

왜 그런가? 작가 스스로가 그러했기 때문이 아닌가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그러다 보니 '무협지적인 화법' 이 가능한 것이다. '무협지적인 화법'을 일상 생활에 적용했을 때는 그 과장됨 덕분에 현실을 얼마든지 희화화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는 양날의 검이 된다. 정말로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할 때는 이 '희화화' 때문에 모든 것이 우스꽝스러워질 수가 있다. 진정 끝까지 가본 자, 경험해본 자는 희화화를 남발할 수가 없다. 하지만 작가에게는 그러한 경험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재기발랄한 '무협지적인 화법'이 주는 신선함과 '인천' 이라는 추억은 금새 사라져버리고, 알맹이 없는 '말투'만 남은 소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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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소년
김하기 지음, 김홍모 그림 / 청년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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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기는 1958년 경남 울산 출생으로 1980년 5월 부산대 철학과 재학 중 계엄법 위반으로 강제 징집 당했고, 부림사건으로 재구속되어 10년 형을 받는다. 1988년 가석방으로 출소 후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1996년 7월 중국을 거쳐 월북, 15일간 체류하다가 돌아와 투옥되었다가 1998년 특사로 풀려났다.

 

그런 김하기의 소설을 2015년에 읽는다. 스스로 생각해도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하면서.

김하기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1993년이었다. 내 책이 아니었다.

김하기의 노선을 나는 지지하지 않았지만 그의 소설은 챙겨 읽었던 것 같다. 비전향 장기수에 관한 짧은 소설은 특히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있다.

 

과거의 김하기였다면 <식민지 소년>의 배경은 현재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일제강점기 이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내용이 짤막짤막하게 담겨 있으므로 과거의 김하기를 알고 있는 독자라면 고개가 갸웃거려질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인공 덕경은 장난꾸러기로 온갖 말썽을 부려가며 살아간다. 이런 저런 사건들이 덕경의 정신을 살찌우는데, 과거의 김하기가 이야기할 법한 내용이 아니다. 지극히 평이하다. 딱 한번, 덕경이 중학교에 올라가서 친한 친구와 사회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 내용이 나온다. 덕경은 함께 하자는 친구의 청을 뿌리치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겠다고 한다.

 

하지만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일어난 봉기들도 그 성급함과 잔인성으로 인해 쉽사리 대의명분을 잃어버리곤 했다

 

소설 말미에 덕경은 6.25 직후 좌익들의 활동상에 대해 이렇게 짤막한 평을 한다. 그제서야 이 소설의 의미가 이해된다. 이 소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선생으로 삶을 살아간 가공의 인물 덕경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김하기의 전향서이다. 자신이 과거에 집요하게 다루었던 비전향 장기수 문제에 대해 이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http://blog.naver.com/rainsky94/220556934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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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 - 오상원 중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37
오상원 지음, 한수영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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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평안북도 신천에서 태어난 오상원은 전쟁이 발발하자 남하하였고, 서울 용산고등학교와 서울대 불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53년 희곡 <녹스는 파편>으로 문단에 데뷔하였고,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유예>가 당선되어 정식 등단하였다. 1958년 <모반>으로 제3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기도 한다. 1970년대에는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맡아 언론계 활동에 종사하다 1985년 사망하였다.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은 중편 <황선지대>와 단편 <유예>, <균열>, <죽어살이>, <모반>, <부동기>, <보수>, <현실>, <훈장>, <실기> 등 총 10편이다.


<황선지대>에서는 노란선을 중심으로 두 개의 삶이 대비된다. 노란선 너머는 미군이 지배하는 곳인데 풍요로운 삶이 펼쳐진다. 반면 노란선 바깥의 삶은 처참하고 황폐하다. 노란선 바깥에 존재하는 정윤과 영미는 전쟁 전까지만 해도 학생이었고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며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등 꿈이 있었지만, 전쟁을 겪으면서 날개가 꺾여버리고 말았다. 영미는 군인들에게 강간당한 뒤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고 정윤은 그런 영미와 떠나고 싶지만 현재로서는 도리가 없다. 설혹 미군 부대를 터는데 성공하더라도 그녀가 따라나설지 의문이다. 너무나 망가져버린 각자의 모습이 둘의 미래를 상상할 수 없도록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유예>는 적군의 포로가 된 후 사살당하기 직전까지의 짧은 기록이다. 사살 당하기 직전 소회를 묻는 인민군에게 국군 포로가 말한다. "생명체와 도구와는 다른 것이오. 내 이상 더 무엇을 말하고 싶겠소? 나는 포로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내가 확실히 호흡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을 뿐이오. 나는 기쁘오. 내가 한 개 기계나, 도구가 아니었다는 것, 하나의 생명체인 인간으로서 살아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인간으로서 죽어간다는 것, 이것이 한 없이 기쁠 뿐입니다."


<균열>은 정치적 혼란기에 정적을 암살하는 내용이다. 어쩔 수 없이 총을 들면서도 끝내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암살자의 모습을 통해 인간이 도구적 존재로 기능하는 상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암살당하고 마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다룬 <죽어살이>, 암살 직후 그 길을 지나갔다는 이유만으로 살인자가 되고 마는 불쌍한 사내의 이야기인 <균열>에도 나타난다.


<부동기>는 전후 가족의 해체와 비참함을 자연주의적 수법으로 그린 소설이다. 과거 직원이 꾸려가는 술집을 기웃거리며 잔술 얻어먹는 데 골몰하는 아버지, 몸을 파는 딸,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품고 정치적으로 과격해져가는 큰 아들과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막내의 이야기이다.


<보수> 미군 부대를 털다 걸리면 동료를 도망치게 하여 미끼로 삼고 자신은 살아남았던 얌생이꾼이 '자기 사는 궁리' 만은 하는 사내와 일을 도모하다 목숨을 잃는 내용이다. <현실>은 전쟁이 얼마나 비정할 수밖에 없는지, 전쟁에 처한 인간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그리고 있다. 하사는 마을 주민에게 길을 묻고나면 어김없이 쏘아 죽인다. 그가 돌아가 입을 열면 내 목숨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훈장>은 그러한 잔인함과 비정함을 거친 인간이 받은 훈장이 전후에는 쓰레기나 매한가지인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실기>는 어린아이들의 눈으로 전후를 보여주는데 아이들은 어른들의 질문에 번번이 '길을 잃었다'고 대답한다. 아이들은 '어른이 길을 잃으면 찾을 수가 없다' 고 말하는 사내를 만난 뒤다. 이 아이들에게 길을 가르쳐 줄 어른은 누구인가?


전쟁에 나서는 군인은 '자신이 왜 전쟁에 나서야하는지', '이 전쟁의 도덕적 명분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신의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외부의 의지에 의해 편이 갈려 서로에게 총질을 하게 되어 있다.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북쪽 군인을 죽여야 한다든가, 내 나라가 어디이기 때문에 타국 사람의 피를 봐야 한다든가 하는 이유는 사실 개인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끌려가 어딘가에 배속되고, 일단 배속된 뒤엔 '주체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 '주체적인 판단'은 곧 항명이고, 항명은 즉결 사살이다.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타인의 목숨을 빼앗아서는 안된다'는 윤리도 곧장 폐기된다. 많이 죽일수록 영웅이되고, 훈장을 받고, 애국자가 된다. 거대한 부조리를 겪은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결핍을 갖게 되고, 망가지게 된다. 오상원의 소설을 읽고 나면 하나의 이미지가 남는다. 비가 내리는 어두컴컴한 거리의 이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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