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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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기자 시험에 번번이 떨어지는 '나'(은미)에게 소꼽친구 민이가 말했다. '성악 콩쿠루에서 구성지게 트로트를 부르는 격'으로 작문시험을 치니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어쨌든 이번에도 '나'는 기자 시험에 떨어졌다. 정수리는 원형 탈모로 횡해졌고, 나이는 스물일곱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갈비집에 나와서 일이나 배우라고 왜장치는 걸 뒤로하고, '나'는 죽기 위해 수면제를 사모으기 시작한다. 200알을 모은 '내'가 결행을 앞둔 시점에, 할머니의 특명이 떨어진다. 고모를 만나러 미국에 갔다 오라는 것. 


고모는 임신 육개월이 될 때까지 가족들을 감쪽같이 속였다. 온갖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아이 아버지 이름을 밝히는 걸 거부한 뒤 낳은 아이가 찬이다. 얼마 뒤 재미교포 로저를 따라 미국에 간 고모는 찬이가 다섯 살 되던 해 귀국해 찬이를 맡기고 다시 미국으로 가버렸다. 그 뒤로 고모와의 인연은 끝인 줄 알았는데, 지금 할머니는 그 고모가 미국 항공우주국에서 비행사로 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매달 찬이 몫의 돈을 보내왔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닌가. 

 

자살 소동은 얼렁뚱땅 정리되고 '나'는 민이와 미국갈 준비를 한다. 민이는 어렸을 적부터 성정체성에 혼란을 겪었고, 현재는 성전환수술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상태였다. '나'의 가족은 민이가 그쪽 성향임을 알았기에 같이 여행가는 데 반대하지 않았다.


주소만 달랑 들고 렌터카를 빌려 고모가 사는 동네로 간 '나'와 민이는 레이첼이라는 부잣집 아줌마를 만나게 된다. 편지 속에 나온 룸메이트였다. 레이첼의 안내로 고모를 만나 이야기꽃을 피운 '우리'는 며칠 뒤 고모가 일하는 NASA에 함께 간다. 고모는 NASA 건물의 한켠에서 스낵과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고모의 새 남자친구 조엘도 소개를 받는다. 조엘은 트렁크에 슬리퍼를 싣고 다니면서 해변에서 장사를 하는 욕심 없는 남자였다. 고모와 조엘, 그리고 레이첼 모두 저간의 사정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지만 삶의 구비길을 돌아 현재의 자신과 대면해 충실한 삶을 꾸려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다시 돌아온 '나'는 미국에서 주워온 돌을 월석이라며 할아버지에게 건낸 뒤 고모가 NASA에서 우주비행사로 훌륭한 삶을 살고 있다고 전해준다. 찬이는 고모의 전화에 불같이 화를 내며 괴로워했지만 차츰 화해모드로 돌아서는 눈치다. 민이는 집을 나와 성전환수술 상담을 받은 뒤 나에게 전화해서 작가가 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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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거짓말, 성적 소수자에 대한 포용, 새로운 출발을 향한 벅찬 기대. 그 모든 것들이 적절히 조합되어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 가득한 소설이다. 술술 읽히고, 술술 잊힌다. 삶이 저렇게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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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가 된 엘레나
양유정 지음 / 현대문학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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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리>

 

첸은 펑펑 내리는 눈을 뚫고 이틀을 꼬박 걸었다. 비처럼 쏟아지던 네이팜탄과 새카맣게 타버린 동료의 시체 더미만 간간히 기억날 뿐, 정신은 멍한 상태다.

첸은 38선을 넘기 전 미군에게서 노획한 M-20을 떠맡았고, 그 무기가 이유가 되어 자살특공대에 차출 된다. 랴오, 유엔, 뤄, 그리고 첸, 네 명이었다. 

상관은 포로 한 명과 박격포를 건네주며 미군을 지체시키라고 했다. 훈장과 영웅칭호를 약속하며.

넷은 머리를 짜내 미군 포로를 길 한 가운에 묶어두고 전차부대의 선두가 속도를 줄이면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첸은 수십 대의 탱크를 파괴시키고 살아남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 계획은 자살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미군 전차부대가 나타나자 넷은 M-20과 박격포로 공격을 퍼붓는다. 정신없는 포성과 총성이 오간 뒤, 랴오가 미친듯이 탱크로 돌격한다. 

첸은 살기위해 도망친다.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는 것을 첸은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9월, 시에라리온>

 

나, 마르셀 라시튀드는 <세계>라는 프랑스 일간지 기자다. 나는 1988년 9월 갑작스런 연락을 받고 내전의 나라 시에라리온으로 이동한다. 그곳의 특파원 피에르가 아파서 더 이상 임무를 수행할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마중나온 미셸 그리에는 파충류를 연구하는 동물학자로 캄비아 도마뱀을 연구한다고 했다. 미셸은 캄비아 도마뱀과 관련한 흥미로운 목격담을 들려주는데, 어느 날 도마뱀 오백 마리가 대열을 지은 뒤 패를 갈라 싸우더니 백마리 정도로 줄어들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뿔뿔이 흩어졌다는 내용이었다. 먹이도 풍부했고 구역 싸움도 아니었다. 미셸은 도마뱀의 싸움이 마치 시에라리온의 정부군과 반군의 싸움 같았다고 했다.

미셸은 또 말했다. 피에르가 펜뎀부의 대량 학살 사건을 목숨 목숨 걸고 취재했지만, 단 여섯 줄 짜리 일 단 기사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사람들은 백 미터 달리기에서 누가 금메달을 따느냐에 더 관심이 많을 거라고 했다.

지사에 가보니 피에르는 건강해 보였다. 피에르 역시 올림픽엔 스물 다섯 명의 기자가 파견되지만, 이곳에서는 기자 하나 달랑 보냈다며 투덜댔다. 기자가 사망해야 오히려 특종이 될 것이라면서.

사실 피에르는 장 폴렝이라는 부사장 아들 때문에 시에라리온으로 오게 된 것이었고, 이질을 핑계로 퇴사하고 싶어했다. 

며칠 뒤 내전이 격화되어 본사가 폭격 당하고, 피에르와 미셸이 사망한다. 나는 '본사 기자 피에르 드 수삐흐, 내전의 와중에서 순직'이라는 이름의 기사를 작성한다. 사람들은 하루 동안 올림픽 대신 아프리카의 이상한 나라에서 프랑스제 무기에 의해 죽임을 당한 동포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이다. 하지만 다음 날에는 언제나 그랬듯 까맣게 잊어버릴 것이다.


<팔미도 등대>

 

사람들은 백씨의 아버지가 일제 앞잡이라고 했다. 쌀과 광물을 실은 배가 인천항엣에서 무사히 일본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비추어주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들 백씨도 등대지기였다.

어느 날 백씨 집으로 두 명의 삼십 대 남자가 찾아와 성조기를 꺼내 보이며 자신들이 미국 이십사 군단 켈로부대 소속 정보장교라고 말한다. 그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백씨에게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등대를 비춰달라고 부탁한다.

백씨는 종민을 설득해 거사를 하려 하지만 정작 종민은 거부한다. 

'난 형님 아버지처럼 일본 배배를 비추지도 안않을 거고, 형님처럼 미국 배를 비추지도 않을 겁니다.' 라는 말을 하는 종민에게 백씨는 비난을 퍼붓는다. 하지만 종민은 '난 우리나라 사람이에요. 남쪽도 북쪽도 아닙니다' 라는 무뚝뚝한 말을 남긴 채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2003년 5월 31일. 대한민국 정보통신부는 180만 장의 '등대 설치 100주년 기념' 우표를 발행한다. 우표에 그려진 등대는 인천 앞바다 팔미도 섬의 등대이다.

  

<Djibouti>

 

Jun은 아프리카 동부의 지부티Djibouti의 이름을 네 번 들었다. 첫번째 들은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 남자마라톤 동메달 아메드 살라 라는 선수의 출신국가를 들었을 때였다. 두번째는 앙드레 말로의 장편소설 <왕도>에서였고, 세번째는 영국 BBC에서 만든 <인류의 기원>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였다.

마지막은 일주일 전, 친구 J가 보낸 편지에서였다. J는 50만 달러가 필요하니 지부티의 쉐라톤 호텔로 전화하라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편지에 썼다. J는 살인 용의자로 도주 중이었다.

나는 잘 나가는 회사 때려치고 지부티 행 비행기에 오른다. 하지만 비행기 엔진이 폭발하고 예멘에 불시착한다. 선착장에서 배를 얻어 타고 지부티로 간 뒤 닛산 자동차를 구입해 호텔로 간 나는 J를 살해한다. 아무도 Jun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살해 뒤 Jun은 장애물이 없는 도로를 뜻 대로 달렸다. 누구도 간섭할 자는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발굴>

 

불도저 기사가 터 파기를 하다 군인으로 보이는 유골을 발견한다. 대구시청 무문화재워원회, 건축과장, 국방부 정훈기획관실, 문화재청, 기자 등이 몰려온다. 발견된 시체가 중공군인지, 북한군인지, 아니면 일본군인지 의견이 분분했다. 부장은 나에게 보고서 작성 임무를 시달한 뒤 소장과 술을 푸러 가버린다. 군복에서 나온 사진을 토대로 그들의 신분을 추정하고, 도서관에서 관련 도서를 뒤져 보고서를 작성하려 애쓴다. 그 와중에 일본 후지TV 기자들이 냄새를 맡아 사건은 요령부득이 되고 만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일 저녁은 딸 지희와 무슨 일이 있어도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한다.


<1월 1일>

 

4천 년 전 북서쪽 바다에 오십명 가량의 민초가 사는 마을이 있었다. 그 곳에서는 100년에 한 번 용이 나타났는데, 무명씨가 용의 먹이가 되고 만다. 무명씨의 아내도 슬픔을 못 이겨 바다로 걸어들어가 목숨을 던지고 만다. 


오슬로발 비행기에서 소영씨는 <1월 1일>이라는 이름의 단편소설을 읽고 있다. 스물아홉이고, 2천년에 서른이 된다. 2년 전 결혼 했지만 최근 권태를 느껴 훌쩍 여행을 떠난 것이다. 

그때 비행기에 소동이 일어난다. 에어 프랑스 스튜어디스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털보의 손에 끌려 나왔다. 털보는 자신이 제이미라고 소개한 뒤 수류탄을 보여주며 비행기를 잭슨 폴록과 같은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잠시 감상에 빠져 이틀 전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에서. 압생트라는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동양여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여자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다고 털보는 말하더니, 이내 그런 여자가 왜 자기 따위와 말이나 섞겠냐고 조소한다. 소영씨는 그 여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지만, 털보가 폭발 버튼을 누른다. 


다시 북서쪽 바다 마을로 돌아가서 곽씨라는 사람의 제안으로 마을 사람들은 무명 씨 아내 몸을 잘라 먹은 뒤 애도하며 액막음을 했다고 생각한다. 

 

<지평리 가는 길>


크롬베즈 대령이 출발을 명령한 뒤 전차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L중대의 베렛 대위는 부원들에게 탱크에 올라타라고 지시한다. 탱크 위에 올라 탄 자신의 병사들은 중공군의 표적이 될 것이다. 그들의 희생으로 전차부대는 저지선을 돌파할 것이다.

얼마 뒤 중공군의 총탄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부대원들이 하나 둘 총에 맞아 전차에서 떨어진다. 베렛 대위도 총에 맞아 전차 위에 눕는다. 한참을 하늘을 보고 있으니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수많은 눈송이들과 함께 흐린 하늘 속을 이리저리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희생양>

 

1. 라카엘랑라와 네그로스의 축제

 

사람을 가축처럼 키우는 원시부족민이 있었다. 추장이 소녀와 성행위를 해서 희생양 낳으면 사육했다. 그들은 희생양의 사지를 절단해 제사를 지냈다. 그들은 단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악을 제거함으로써 부족을 구성하는 모든 이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네그로스 섬 원주민들은 일 년에 단 한 명의 희생양을 낸다. 그에 반해 유럽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희생양이 필요하다.


2. 존의 희망과 절망

 

모파상 같은 위대한 작가가 되는게 꿈이던 존이 참전한다. 그러다 아군끼리 총질을 해서 많은 수의 병사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다섯 명의 희생양을 고르는데 존이 거기에 끼게 된다. 존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뿐이다. 조국이 무엇이고 애국이 다 무어란 말이냐' 라고 수기에 적는다.


3. 마녀가 된 엘레나

 

동생 미구엘이 절벽에 오르다 떨어져 엘레나와 부딪힌다.  이 사고로 엘레나의 이마에 상처가 생기는데, 이 사건 뒤로 그녀의 외모가 추하게 변해버린다. 엘레나는 시집가는 것도 포기하고 세상을 저주하며 홀로 살아간다. 산티아고의 대지진이 나자 사람들은 엘레나를 마녀로 몰아 화형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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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유정은 1971년 대구 출생으로 계명대 경제학과 졸업 후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였다. <마녀가 된 엘레나>는 작가의 첫 창작집인데, 신인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소재를 다루는 기법이 가볍지 않고, 이야기 전체를 끌고 나가는 힘도 상당하다.


작가는 국가(또는 전체)의 욕망과 개인의 욕망이 일치하지 못하는 지점을 포착하여 소설의 실마리를 풀어 나간다.

개인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뭐니뭐니 해도 목숨이다. 그런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극한의 능동성을 요구한다. 욕망, 가치관, 명분, 도덕 등이 모두 합치 된다 해도 일말의 주저함 없이 목숨을 내놓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우연이나 상황논리가 내 목숨을 요구할 때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저항해야 한다. 우물쭈물 하거나 그럴싸한 말들에 휘둘릴 때가 아니다.

하지만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은 종종 개인의 목숨을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그리고 목숨값으로 영웅 칭호니, 진실이니, 희생이니 하는 따위의 공허한 말들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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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램 호텔에서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5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정성희 옮김 / 해문출판사 / 199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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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런던의 웨스트 엔드 중심가에는 택시 운전사들 말고는 거의 아는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골짜기 같은 장소들이 꽤 여럿 있다. 하이드 파크에서부터 뻗은 조촐한 길거리에서 벗어나 왼쪽으로 돈 다음 오른쪽으로 한두 번인가 더 돌아 들어가면 어느 한적한 길거리에 이르게 되는데, 그 길거리 오른쪽에 있는 것이 버트램 호텔이다. 

전쟁 중에도 버트램 호텔은 용케 포격을 피해 제 모습을 지킬 수 있었고, 1955년경에는 약간의 보수를 거쳐 1939년 때와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즉, 위엄이 있으면서도 수수하고 또 은근한 가운데 호화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호텔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던 것이다.

버트램 호텔의 모습이 바로 그랬기 때문에 이 호텔은 오랜 세월 동안 고위 성직자들이며, 시골에서 올라온 귀족 미망인들 같은 단골손님들의 열렬한 성원을 받아왔다.


이 버트램 호텔에 모험가 세지윅 부인이 체류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딸이자 막대한 부를 곧 상속받게 될 엘바이러가 나타난다. 한편, 같은 호텔에 묵던 건망증 심한 페니파더 신부가 회의 참석 일정을 헤깔려 엉뚱한 날에 여행을 떠난 직후 실종되는데... 

얼마 뒤 안개가 낀 어느 날 괴한이 엘바이러에게 권총을 발사하고, 빗겨간 총탄에 맞은 마이클 고먼이라는 호텔 수위가 사망하고 만다.

마이클 고먼은 세지윅 부인이 기겁할 만한 비밀을 알고 있었던 듯 한데 그 총탄으로 입을 다물게 되고, 세지윅 부인과 딸 엘바이러 모두에게 집적대는 자동차 경주선수 말리노스키가 용의자로 의심 받는다. 


평생 세언트 메어리 미드 마을을 떠나보지 않았던 마플 양이 하필이면 버트램 호텔에 묵게 되는 바람에 사건의 진실이 밝혀진다. 온 세상이 진보해도 조금도 변하지 않은 단 하나의 장소인 버트램 호텔은 진정 '전통과 품격'을 지키기 위해 이윤이라는 달콤한 사탕을 포기한 장소일까, 아니면 다른 목적을 위해 '전통과 품격'이 필요한 장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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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지윅은 범죄단의 수괴로 사회적 저명인사가 호텔에 머물고 있는 동안 그들의 모습으로 변장한 채 범죄를 저질러 알리바이 문제를 해결해 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페니파더 신부가 날짜를 착각해서 호텔방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범죄단은 혼란에 빠지고, 어쩔 수 없이 페니파더 신부를 기절시켜 실종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아가사 크리스티의 고질적인 단점이 드러나는데, '마이클 고먼과 세지윅이 사실은 과거에 부부였다' 라는, 작가만 알고 있던 사실을 트릭으로 사용한 점이다. 기껏 제공된 단서는 마이클 고먼이 어떤 비밀을 알고 있고, 세지윅이 질색을 했다는 점 정도이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독자와 정당한 게임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세지윅이 고먼과 이혼하지 않은 채 다른 남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중혼이 되고, 따라서 딸 엘바이러가 받게 될 막대한 유산 역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중혼에 의한 결혼은 무효이므로 엘바이러는 정당한 상속자가 되지 못함)

 

여성의 사회 참여가 한층 확대되는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던 작가가 여성 모험가를 범죄단 두목으로 삼아 쓴 <버트램 호텔텔에서 At Bertram's Hotel, 1965>는 그녀의 72번째 추리소설이고 56번째 장편으로 비교적 후기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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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 제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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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대여섯 살 난 아이와 호숫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자의 이름은 김이나이고, <문창문화>라는 잡지사에서 기자일을 하여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그런 여자를 먼 발치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 한 때 소설을 썼으나 지금은 <문창문화>를 꾸려가고 있는 중년의 사내 정서현이다. 

정서현은 이나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녀의 존재가 그의 마음을 달뜨게 한다. 하지만 2년간 그녀를 지켜봤으면서도 정작 결혼은 했는지, 남편이 있는지, 등등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었다. 지금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그녀를 먼발치에서 발견하고선, '아들이 있구나' 할 뿐이다. 


태인은 이나와 아이에게 어떤 약속의 말도 건네지 않는다. 이따금 나타나 몸을 섞고 갈 뿐이다. 구속과 위장취업과 도피를 반복하며 운동권의 삶을 사는 태인의 집에는, 유정수라는 현장 노동자 출신의 아가씨가 기숙하고 있다. 유정수는 태인을 선생님이라 부르며 추종하고, 태인은 그녀를 떨쳐내지 못한 채 한 지붕 아래 기묘한 동거를 이어가고 있다. 

그런 태인에게 이나는 정수가 '당신의 현재에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유일한 지지자이며 유일한 군중이며 유일한 정당성'이기 때문에 내치지 못하는 것이라며 비난한다. 이나가 생각하기에 태인은 '마주쳐야 할 평범한 생의 무게가 두렵'고, '누추한 생에 도저히 굴복할 수가 없'는 사람 같다. 


태인은 이나의 말에 제대로 된 반박을 하지 못한다. 운동의 미래도 불확실했다. 소련은 붕괴했고,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거대한 물결은 제대로된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고, 97년 대선을 앞 둔 운동권 진영은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었다. 비합법 전위정당에 의문을 품는 자들은 합법정당을 통한 선거투쟁을 부르짖었다. 그 과정에서 선배들은 후배를 책임질 수 없다는 자괴감에 사실상 전향을 의미하는 복학을 권하기도 했고, 자신의 몸뚱아리를 노동으로 혹사하며 세월을 견뎌내기도 했다.


이나가 태인의 두번째 아이를 밴 뒤 입덧이 시작되자 <문창문화>에 사표를 낸다. 매일같이 병원에 가야 하리라 다짐을 거듭하다 마침내 산부인과에 간 날, 이나는 길거리에서 쓰러지고 때마침 이나를 발견한 정서현이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정서현은 자신이 아무런 조건없이 그녀를 사랑하노라고,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겠노라고 거듭 말한다. 심지어 아이까지 책임지겠다고. 하지만 이나의 마음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간 이나가 하혈 끝에 유산을 하고, 또다시 정서현의 도움으로 몸조리를 하게 된다. 이나는 정서현이 거듭 고백하는 사랑의 말들에 진심이 담겨있음을 느낀다.


한편, 태인은 불확실한 전망과 이나에 대한 그리움에 유정수와의 관계를 매듭지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후배 상기의 인쇄소에 정수를 떠맡기다시피 보내고 이나에게 연락을 취하지만 회사와 집 어디에도 이나의 흔적이 없다. 초조해하는 태인에게 정수는 거듭 애정을 갈구하고, 태인은 그럴수록 정수를 모질게 대한다. 몇 번이나 편지가 태인에게 배달됐지만 태인은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정수가 자립해서 자신을 잘 떠날 수 있기를 바라며 마지막으로 옷을 사들고 자취방으로 간 태인은 끔찍한 장면을 목도하고 만다. 정수가 약을 먹고 식칼로 자신의 팔목을 그어 자살해버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배달된 편지에서 정수는 자신이 흩어져 버린 유리구슬 같았다고, 태인을 사랑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황소 고집만 부려서 미안했다고 쓸쓸하게 읊조린다. 그 편지는 정수의 유서였다. 정수는 태인에게 미안해 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태인은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어 폐인이 되고 만다. 


이나와 정서현이 별장으로 여행을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둘은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둘 사이는 정서현의 바람대로 결혼이라든가, 동거의 형태로 발전되지 않는다. 이나는 자신의 몸을 '허락'하고, 그 연장선에서 자신을 위치짓는 따위의 관계는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명확히 표시한다. 옛친구 명혜가 있는 시골로 가서 낮에는 마네킹에게 화장 따위를 시켜주는 육체노동을 하고, 밤에는 자신의 내부에서 차고 넘치는 무엇에 대해 글을 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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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중반 후일담 소설이라는 것이 유행했다. 가장 순수했던 젊은이들이 어둠의 길로 내달려 절망하던 그 시절이 아직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마치 몇 십년이나 지나버린 것처럼, 전혀 새로운 세상이라도 온 것처럼 잘도 떠들어댔다. 

그들은 침몰하는 배에서 잽싸게 탈출해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을 비웃고 손가락질하며 비난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도덕적이지 않았다고, 그들이 악마와 싸우다 악마를 닮아버렸다고, 그래서 현명한 '나'는 거기서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노라고 왜장쳤다. 

공지영 같은 작가들이 그런 낯부끄런 소설을 잘도 써댔고,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지도 않았던 파렴치한 자들은 함께 기뻐하고 춤을 췄다.  마치 '후일담 소설'의 결과론적 태도가 불의한 시대에 대한 자신의 알리바이를 제공해주기라도 하는 듯이. 


전경린의 이 작품도 굳이 분류하자면 후일담 소설이겠으나, 공지영 따위의 작가가 써낸 잡문과는 사뭇 다르다. 작가의 문장에서는 치열한 고통과 아픔이 느껴진다. 

전경린은 패배한 자, 실패한 자를 안쓰럽게 쳐다본다. 그리고 왜 젊디 젊은 그들이 그렇게 처절하게 망가지고, 깨어져야만 했는지 아프게 아프게 적고 있다. 작가의 창작과정이 무척 고통스러웠을 것으로 보인다.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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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계곡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0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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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을 살해한 뒤 에드가 엘런 포의 시구를 남겨두어 '시인'이라는 별칭을 얻었던 연쇄살인마. 전작 <시인>에서 기자 잭 매커보이의 끈질긴 추격 끝에 드러난 그의 정체는 FBI 팀장 로버트 배커스였다. 그가 레이철 월링 요원의 총에 맞아 계곡으로 떨어지면서 사건은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그때로부터 8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레이철 월링은 '시인'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시골 한직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다 후배 셰리 데이 요원의 전화를 받는데, GPS 하나가 콴티코에 배달되었고 기계가 지정하는 장소인 라스베이거스 사막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시체만 4구이며 추가로 발굴중이라는 말도. 살해방법과 매장방법, 그리고 GPS에 남겨진 메시지 'Hello Rachel'. '시인'이 다시 나타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LA 경찰에서 은퇴한 뒤 탐정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는 해리 보슈 역시 얼마 전 사망한 동료 테리 매컬렙의 미망인의 전화를 받는다. 테리 매컬렙 역시 '시인'과 관련 있는 프로파일러였는데, 은퇴 후 보트 용선계약으로 먹고 살았다. 

그의 사인은 심장마비였는데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다. 심장이식 환자인 그가 반드시 복용해야 할 약들이 바꿔치기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테리 매컬렙의 보트에 승선했던 인물들을 조사하던 중 수상스러운 인물과 사막을 나타내는 지도가 발견되자 해리는 행동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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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연쇄살인마를 지옥에서 소환했지만, 귀기 서린 악마가 아니라 성형수술로 외모를 바꾼 잡범이 나타나고 말았다. FBI와 경찰의 이종교배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고, 구성도 정교하지 못하다. 

마이클 코넬리 필생의 역작 <시인>, 그리고 그가 스스로 써낸 아류작 <시인의 계곡>. 괜히 읽었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1424747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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