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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 제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1997년 2월
평점 :
품절
한 여자가 대여섯 살 난 아이와 호숫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자의 이름은 김이나이고, <문창문화>라는 잡지사에서 기자일을 하여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그런 여자를 먼 발치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 한 때 소설을 썼으나 지금은 <문창문화>를 꾸려가고 있는 중년의 사내 정서현이다.
정서현은 이나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녀의 존재가 그의 마음을 달뜨게 한다. 하지만 2년간 그녀를 지켜봤으면서도 정작 결혼은 했는지, 남편이 있는지, 등등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었다. 지금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그녀를 먼발치에서 발견하고선, '아들이 있구나' 할 뿐이다.
태인은 이나와 아이에게 어떤 약속의 말도 건네지 않는다. 이따금 나타나 몸을 섞고 갈 뿐이다. 구속과 위장취업과 도피를 반복하며 운동권의 삶을 사는 태인의 집에는, 유정수라는 현장 노동자 출신의 아가씨가 기숙하고 있다. 유정수는 태인을 선생님이라 부르며 추종하고, 태인은 그녀를 떨쳐내지 못한 채 한 지붕 아래 기묘한 동거를 이어가고 있다.
그런 태인에게 이나는 정수가 '당신의 현재에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유일한 지지자이며 유일한 군중이며 유일한 정당성'이기 때문에 내치지 못하는 것이라며 비난한다. 이나가 생각하기에 태인은 '마주쳐야 할 평범한 생의 무게가 두렵'고, '누추한 생에 도저히 굴복할 수가 없'는 사람 같다.
태인은 이나의 말에 제대로 된 반박을 하지 못한다. 운동의 미래도 불확실했다. 소련은 붕괴했고,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거대한 물결은 제대로된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고, 97년 대선을 앞 둔 운동권 진영은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었다. 비합법 전위정당에 의문을 품는 자들은 합법정당을 통한 선거투쟁을 부르짖었다. 그 과정에서 선배들은 후배를 책임질 수 없다는 자괴감에 사실상 전향을 의미하는 복학을 권하기도 했고, 자신의 몸뚱아리를 노동으로 혹사하며 세월을 견뎌내기도 했다.
이나가 태인의 두번째 아이를 밴 뒤 입덧이 시작되자 <문창문화>에 사표를 낸다. 매일같이 병원에 가야 하리라 다짐을 거듭하다 마침내 산부인과에 간 날, 이나는 길거리에서 쓰러지고 때마침 이나를 발견한 정서현이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정서현은 자신이 아무런 조건없이 그녀를 사랑하노라고,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겠노라고 거듭 말한다. 심지어 아이까지 책임지겠다고. 하지만 이나의 마음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간 이나가 하혈 끝에 유산을 하고, 또다시 정서현의 도움으로 몸조리를 하게 된다. 이나는 정서현이 거듭 고백하는 사랑의 말들에 진심이 담겨있음을 느낀다.
한편, 태인은 불확실한 전망과 이나에 대한 그리움에 유정수와의 관계를 매듭지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후배 상기의 인쇄소에 정수를 떠맡기다시피 보내고 이나에게 연락을 취하지만 회사와 집 어디에도 이나의 흔적이 없다. 초조해하는 태인에게 정수는 거듭 애정을 갈구하고, 태인은 그럴수록 정수를 모질게 대한다. 몇 번이나 편지가 태인에게 배달됐지만 태인은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정수가 자립해서 자신을 잘 떠날 수 있기를 바라며 마지막으로 옷을 사들고 자취방으로 간 태인은 끔찍한 장면을 목도하고 만다. 정수가 약을 먹고 식칼로 자신의 팔목을 그어 자살해버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배달된 편지에서 정수는 자신이 흩어져 버린 유리구슬 같았다고, 태인을 사랑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황소 고집만 부려서 미안했다고 쓸쓸하게 읊조린다. 그 편지는 정수의 유서였다. 정수는 태인에게 미안해 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태인은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어 폐인이 되고 만다.
이나와 정서현이 별장으로 여행을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둘은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둘 사이는 정서현의 바람대로 결혼이라든가, 동거의 형태로 발전되지 않는다. 이나는 자신의 몸을 '허락'하고, 그 연장선에서 자신을 위치짓는 따위의 관계는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명확히 표시한다. 옛친구 명혜가 있는 시골로 가서 낮에는 마네킹에게 화장 따위를 시켜주는 육체노동을 하고, 밤에는 자신의 내부에서 차고 넘치는 무엇에 대해 글을 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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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중반 후일담 소설이라는 것이 유행했다. 가장 순수했던 젊은이들이 어둠의 길로 내달려 절망하던 그 시절이 아직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마치 몇 십년이나 지나버린 것처럼, 전혀 새로운 세상이라도 온 것처럼 잘도 떠들어댔다.
그들은 침몰하는 배에서 잽싸게 탈출해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을 비웃고 손가락질하며 비난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도덕적이지 않았다고, 그들이 악마와 싸우다 악마를 닮아버렸다고, 그래서 현명한 '나'는 거기서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노라고 왜장쳤다.
공지영 같은 작가들이 그런 낯부끄런 소설을 잘도 써댔고,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지도 않았던 파렴치한 자들은 함께 기뻐하고 춤을 췄다. 마치 '후일담 소설'의 결과론적 태도가 불의한 시대에 대한 자신의 알리바이를 제공해주기라도 하는 듯이.
전경린의 이 작품도 굳이 분류하자면 후일담 소설이겠으나, 공지영 따위의 작가가 써낸 잡문과는 사뭇 다르다. 작가의 문장에서는 치열한 고통과 아픔이 느껴진다.
전경린은 패배한 자, 실패한 자를 안쓰럽게 쳐다본다. 그리고 왜 젊디 젊은 그들이 그렇게 처절하게 망가지고, 깨어져야만 했는지 아프게 아프게 적고 있다. 작가의 창작과정이 무척 고통스러웠을 것으로 보인다.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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