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습속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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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후쿠오카 현 동북쪽 끝자락에 항구도시 모지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가면 메카리 곶이 나온다. 그곳 신사의 음력 설 제사가 유명해서, 하이쿠를 지을 때 계절감을 나타내는 계제(季題)에도 들어있다. <계제>라는 책에 실린 '메카리 제사'의 설명을 보면 이렇다.


경내에 큰 화톳불을 피우고 무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세 명의 신관이 각각 횃불과 낫과 나무통을 들고 바다로 이어지는 긴 돌계단을 내려간다. 그러고는 물가에서 축문을 읊고, 밀물이 들이치는 암초 속을 뒤져 미역을 딴다. 축문과 제사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방금 따서 바닷물이 뚝뚝 떨어지는 미역을 정성껏 신에게 바친다.

 

메카리 제사가 치뤄진 날 아침 8시, 고쿠라역 근처 '다이키치'여관에 서른 후반 정도의 미네오카라는 사람이 제사를 보고오는 길이라며 찾아든다. 그는 여관 종업원 후미코가 예쁘장하게 생겼다며 사진을 몇 장 찍어주는데, 다른 종업원 하나가 다급히 달려와 그에게 전보를 전해준다. 그는 전보를 보더니 "뭐, 죽었다고?" 라며 놀란다.


사가미 호수는 가나가와현 북쪽 끝에 있는데, 1938년부터 47년까지 공사를 해서 만든 거대한 인공호수다. 그곳 여관에 남자와 여자가 묵어가기 위해 들렀다가 밤산책을 나선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흘러도 이들이 돌아오지 않자 여관 종업원들이 찾아나선다. 얼마 후 발견된 것은 남자의 시신. 소지품을 통해 알게 된 시신의 이름은 도이 다케오, <교통문화정보>라는 잡지의 발행인 겸 편집자였다. 종업원들은 여자가 꽤 미인이고 여염집 여자 같지 않았다고 했지만, 정작 얼굴은 자세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가 한사코 얼굴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시청의 미하라 기이치 경위는 함께 여관에 든 여자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수사를 시작하지만 행방이 묘연했다. 게다가 원한 관계도 드러나지 않아 수사는 지지부진한 상태가 되고 만다.

그러다 굣코 교통 주식회사의 전무 미네오카 슈이치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미하라 기이치는 그와 도이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는 사이인데, 어째서 여관에서 사망소식을 전보로 받았을까 하고 의심했다. 마치 알리바이를 위해 일부러 조작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도이가 죽던 날 밤 메카리 제사에 참가해 사진을 찍었고, 다음 날 오전에 여관 종업원의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알리바이가 확실했고 기차나 비행기 탑승명단과 시간을 조사해도 별다른 혐의점이 없었다. 하이쿠에 열광적인 그가 메카리 제사를 참석했다는 점도 의심을 옅게 만드는 한 요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하라는 완벽한 그의 알리바이가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이에 후쿠오카 경찰서의 도리카이 주타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메카리 신사 사진이 나중에 찍힌 것은 아닌지 조사하기 시작한다. 분명 가능한 일이었다. 필름을 돌려 뒤쪽을 먼저 찍고 나중에 다시 되감아 찍으면 순서는 조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지 않은 곳의 사진을 찍는 방법이 무엇일까? TV에 중계된 메카리 신사 뉴스를 찍는다거나, 영화관에서 상영된 뉴스를 찍는 방법이 있다. 혹은 남의 사진을 빌려 다시 찍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조사 결과 어느 것도 가능하지 않았다는 게 증명되자 미하라는 상심하고 만다. 도이와 함께 묵었던 여자의 행방도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또 하나의 새로운 단서는 누군가 미네오카가 사건 당일 정기권 매표소 앞에서 서있었다는 증언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유의미한 것이 아닌 듯 싶었다. 정기권을 살 이유가 없었으므로 야심차게 추궁하는 미하라에게 미네오카는 다자이후 근방의 도후 옛터에 들렀다는 말로 간단히 반박한다. 그곳도 하이쿠 계제에 드는 장소였다. 


얼마 뒤, 새로운 시신이 한 구 발견된다. 도후로 옛터에서 멀지 않은 미즈키역 부근에서 젊은 남자가 삼끈에 목이 졸린 채 발견된 것이다. 시신 주변엔 여자 장갑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수사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남자가 미네오카와 공범으로 메카리 제사 사진을 찍어준 당사자였고, 입막음을 위해 도이를 죽일 때 함께했던 여자를 이용해 유인한 뒤 죽인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미하라와 도리카이가 기꺼이 발품을 팔아가며 조사한 결과는 의외였다. 남자의 본명은 스가이 신타로지만 다른 이름은 요시코로 '나비'라는 게이바의 종업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이를 꼬여내 호숫가로 산책을 나간 것이 실은 여자가 아니라 요시코라는 이름의 게이가 아니었을까? 또, 정기권을 산 것이 전철을 타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신분증을 대신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당일 정기권을 산 사람 중 오직 한 청년의 행방이 묘연했는데, 조사해 보니 그는 하이쿠에 열심인데다 사진에 취미까지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미네오카와 접점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최근 다니던 공장을 돌연 그만두고 사라졌다. 이제 그의 목숨이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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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초의 걸작 <점과 선>이 일본교통공사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여행>에 1957년부터 연재된 지 4년 만인 1961년 5월부터 1962년 11월까지 연재된 작품으로, 세이초의 작품 중 유일한 속편이다. 

경시청의 미하라 경위와 후쿠오카 서의 도리카이 형사는 <점과 선>에서처럼 하나의 선이 떠오르면 구두굽이 다 닳도록 조사에 조사를 거듭해 막다른 길까지 몰아붙이는 식으로 수사를 해나간다. 


"인간은 절대 틀림없다고 믿어버리면 언젠가 그것이 마음에 맹점을 만든다. 착각하고 있으니까 바로잡을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이 점이 무서운 것이다. 아무리 괜찮다고 믿었어도 다시 한 번 그 믿음을 깨뜨려볼 일이다." 

 

사진기가 보급되는 시점인 1960년대의 시대상이 잘 녹아난 작품으로 컬러슬라이드필름(컬러리버설)은 공장에 맡겨 현상하는 점에 착안, 다른 사람의 정기권을 신분증 대용으로 활용하여 필름과 사진을 중간에 가로챈 뒤 다시 본래 주인에게 우편 송부한다는 설정은 꽤 그럴싸하다. 탑승객 명단 트릭도 취소된 표를 양도받았다고 가정하면 해결된다. 하지만 별다른 혐의점이 없는데도 수사의 촛점을 오직 미네오카에게 맞춰 끈질기게 추적하는 대목은 적지 않게 부자연스러워 평론가와 독자들의 비판도 많았다고 한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1413240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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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앞의 어둠 소설 르네상스 26
박인홍 지음 / 책세상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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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홍은 1954년 광주에서 출생하여 주로 서울에서 자랐다. '학교는 대충 다니다 말았'고 , 1983년 <파리들은 쉬지 않는다>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펴낸 책은 <벽 앞의 어둠(89)>,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91)>, <명왕성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94)>, 책과 영화에 대한 산문을 엮은 <섹스, 깨어진 영상 그리고 진정성(99)>, 그리고 시집 <예, 아니오(13)>이 있다.


박인홍 소설은 고아의식, 탈집단 지향, 해체주의, 의식의 흐름기법, 초현실주의 등 다소 난해한 이미지들의 집합체이다. 작가는 현실에 기반한 사건이나 이야기는 철저히 배제되고,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이미지의 집합으로 소설을 꾸며내는데 이러한 난해함을 독자가 해석할 수 있는 연결고리나 단서를 제공하는데도 매우 인색하다. 이러한 反소설적 실험은 미완으로 끝난 것 같은데, 94년 이후로 더 이상 소설은 발표하지 않는 것 같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140901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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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분의 1의 우연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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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신문은 1월 27일자 조간에 <독자 뉴스사진 연간상>을 발표했다. 매년 투고된 작품 중 가장 훌륭한 작품에 수여되는 이 상의 수상작은 여섯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도메이 고속도로의 대형 추돌사고를 찍은 <격돌>이라는 작품에 돌아갔다. 작품은 사고 발생 순간을 찍은 사진으로, 화염의 빛 속에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사진을 찍는 순간에도 차량 안에 희생자들이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고에 대한 기사를 보면 이 순간이 어째서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지 명징해진다. 먼저 시속 120킬로미터로 달리던 12톤 탑차 트럭이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어 전복되었고, 역시 고속으로 달리던 후속 중형 승용차 두 대가 연달아 추돌하며 불이 일어났다. 다시 라이트밴 한 대가 추돌하여 불길에 휩싸였고, 뒤따라 오던 소형 트럭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중앙분리대를 넘어 상행선으로 돌입, 승용차와 충돌하여 두 차량 모두 대파되었다.

<격돌>을 찍은 야마가 교스케는 촌도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사고현장을 포착,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다고 했고 그 결과 참혹하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일부 독자들은 <격돌>에 연간상을 주는 것은 뒷맛이 고약하다고 생각했다. 1955년 시코쿠 다카마쓰 앞바다에서 충돌 사고로 침몰한 시운마루 호의 사진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인명을 구하기 보다는 '좋은 사진을 찍고 싶다'는 지독한 이기심의 소산이라는 일부 독자들의 항변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카메라맨이 도울 수 없는 객관적 사정이 있었으므로 비난은 억지에 불과한 반면, 처절할 정도로 사실적인 기록사진이 남아 사고의 비극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경각심을 고취시켰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사진의 도덕성이 아니라, 사고 자체에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었다. 사고로 죽은 야마우치 아키코의 애인이었다. 그는 사고 직전 붉은 불빛을 봤다는 운전자의 진술에 주목해 야마가 교스케의 뒤를 파헤치는데... 과연 <격돌>은 10만 분의 1의 우연의 산물일까, 아니면 조작된 우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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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은 사회파 미스터리로서의 가치 뿐만 아니라 시대소설로서의 가치도 높다. 소득수준의 상승에 따라 카메라를 취미로 삼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시대 풍속을 잘 담아낼 뿐만 아니라 대마초 등 사회문제가 된 소품들도 적절히 활용하기 때문이다. 1981년 작품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1404095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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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테스크
기리노 나쓰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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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인 '나'는 스위스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로, 못생긴 외모를 가진 '악의'에 찬 인물이다. 반면 동생 유리코는 어떤 남자라도 단번에 반하게 만들만한 가공할 '미모'의 소유자였다.

동급생 미쓰루는 뛰어난 '지능'의 소유자였지만 어머니가 물장사를 했기 때문에 급우들이 쑥덕거렸고, 또 다른 동급생 가즈에는 외모나 지능이 최고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노력'으로 그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다소 순진한 학생이었다.


이야기는 '나'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스위스로 돌아가면서 시작된다. '나'는 일본에 남기로 결정하는데, 어머니와 아버지는 외모가 아름다운 유리코를 싸고 돌았고 '나'는 주워온 아이처럼 취급했기 때문이었다. 외할아버지 집에 들어가 갖은 노력을 다해 일류사립학교에 입학한 '나'는 지긋지긋한 가족들과 떨어져 독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기뻐하지만, 그런 해방감은 오래가지 않는다. 스위스에서 어머니가 자살하자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재혼하고, 이로써 오갈데 없어진 유리코가 일본으로 돌아온 것이다.

유리코는 뛰어난 외모 덕에 외국인 가정에 입양되고, 역시 외국인 전형으로 '내'가 다니는 일류사립학교에 손쉽게 편입한다. 

그녀의 '괴물'과 같은 미모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다. 남자들은 그녀에게 돈을 주고 몸을 사기 위해 안달이 났고, 여자들은 그녀와 비슷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가즈에는 노력만 있으면 뭐든 이룰 수 있다고 믿어왔지만, 그녀의 외모가 해낼 수 있는 일들 앞에 금새 무릎 꿇고 만다. '나'는 유리코 때문에 평온한 삶에 균열이 가고 있다고 느꼈고, 이에 그녀의 매춘 행위를 폭로하는 투서를 학교에 보낸다. 유리코는 퇴학을 당한다. 자매의 인연은 이로써 끊기는 듯 했다.


고등학교를 마친 뒤 그저그런 대학을 졸업한 '나'는 구청에 무기계약직 일자리를 얻어 한가롭게 살아간다. 그러다 유리코와 가즈에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둘 다 매춘을 하다가 죽었다고 했다. 피해자 가족이므로 재판에서 증언을 했고, 법원을 나서다가 미쓰루를 만난다. 

미쓰루는 학창시절 뛰어난 머리로 매번 1등을 놓치지 않던 수재였다. 도쿄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 출세가도를 달릴 것 같았던 그녀는 지금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어머니, 남편과 함께 수상쩍은 사이비 종교에 빠져 대량살상에 관여한 혐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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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3월 도쿄의 번화가 한 아파트에서 미모의 여성이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다. 경찰 조사 결과 이 여성은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 동경전력에서 간부로 근무 중이던 39세의 여성으로 밝혀진다.

기이한 점은 번듯한 직장을 가진 그녀가 퇴근 후에는 번화가 뒷골목에서 지나가는 남성을 상대로 매춘 행위를 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부랑자와 외국인 노동자도 가리지 않았고, 돈이 없다고 하면 푼돈에도 몸을 팔았다. "있는 대로 주면 된다.", "얼마든 상관 없다.", "아무데서나 해도 된다.". 그녀가 손님들에게 했던 말들이라고 한다.

얼마 뒤 유력한 용의자로 불법 체류중인 네팔인 마이나리가 경찰에 체포되어 10개월 동안의 재판을 거쳐 1심 무죄, 2심 무기징역, 그리고 6년 뒤 2003년 10월 대법원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이것이 바로 <동경전력 여사원 매춘부 살인사건>이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왜 좋은 학력과 번듯한 직장을 가진 여성이 매춘을 일삼았을까?" 였다. 기리노 나쓰오는 이 궁금증에서 시작하여 긴 장편을 구상했고, 유리코라는 압도적인 미모의 여성을 창조해낸다.

소설에서 미쓰루와 가즈에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든 자리 잡기 위해 노력한다. 미쓰루는 '지능'을 무기로 전문직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가즈에는 일정 수준의 '미모'와 '학력'을 '노력'을 통해 갖추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이 유리코의 압도적인 미모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를 활용해서 '남성'의 힘을 요구하기만 하면 됐던 것이다. 이런 부조리 때문에 가즈에와 미쓰루의 삶은 기형적으로 변해버린다.

그리고 그런 부조리를 어릴 적부터 경험했던 '나'는 '악의' 와 '위악'을 무기로 남자들과 일절 관여하지 않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게임 자체를 거부해버린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질문을 바꿔보면 어떨까? '왜 그녀는 매춘을 했을까?' 가 아니라 '왜 그녀는 푼돈에도 몸을 팔았을까?'로. 그녀는 수많은 남자와 잤지만, 단 한번도 연애는 하지 못했다. 돈을 주고 받지 않고 성을 주고 받는 상황. 사실 그것이 연애 아닌가. 돈을 받으면 받을수록 공허해지는 관계가 싫었기 때문에 되는대로, 아무데서라도, 라는 절망적인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왔던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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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아래 봄에 죽기를 가나리야 마스터 시리즈
기타모리 고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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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아래 봄에 죽기를>은 '가나리야'라는 주점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안락의자 탐정으로 분류될 수 있는 구도 데쓰야가 주점의 마스터이다. 10석 정도의 L자형 바와 2인용 탁자 2개의 단촐한 식당에서 4종류의 맥주와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음식을 내놓는 구도는 상당부분 <심야식당>의 마스터와 오버랩 된다.


<꽃 아래 봄에 죽기를>은 자유율 하이쿠 모임의 회원 가타오카 쇼고가 사망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한때 그와 교분을 나눴던 프리랜서 작가 이지마 나나오는 쇼고의 쓸쓸한 죽음이 애닯아서 그의 고향으로 여행을 떠난다. 40년 전의 대화재로 고향과 이름을 버린 하이쿠 시인은 죽기 전까지 매일 먹은 음식들을 담담하게 적어 놓는다. 간소한 식사들을 적어놓았을 뿐인데,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니 슬픈 정조를 자아낸다.


<가족사진>은 이혼 경력이 있는 샐러리맨과 지하철역 대출 서가에 꽂혀있는 가족사진에 관한 이야기이다. 가족사진이 왜 책들 사이에 끼어 있었는지에 대해 가나리야의 단골들이 이런저런 추리를 쏟아낸다. '이혼'과 '가족'이라는 상반된 이미지가 어울리면서 독특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마지막 거처>는 다마 강변에 사는 노부부와 카메라맨 쓰마키 오부히코의 이야기이다. 포스터를 뜯어간 노파가 보낸 '가지 겨자절임'이 메인 테마이다.


<살인자의 빨간 손>은 어렸을 적 강렬한 기억이 만들어낸 괴담에 대해 가나리야의 마스터와 손님들이 각자의 추리를 내놓는 이야기이고, <일곱 접시는 너무 많다>는 회전초밥집에서 참치만 일곱 접시를 먹은 손님이 왜 그랬을까 추리하는 에피소드이다. <물고기의 교제>는 <꽃 아래 봄에 죽기를>과 연관되는 스토리로 가타오카 쇼고와 기누에라는 여인의 슬픈 사랑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1961년 야마구치 현에서 태어나 고마자와 대학 문학부 역사학과를 졸업한 기타모리 고는 1995년 <광란의 사계절>로 제6회 아유카와 데쓰야 상을 받고 데뷔하였다. 뒤이어 발표한 <아누비스신의 산성(97)>, <여우 덫(97)> 역시 좋은 평을 받았으며, 1999년에 발표한 본작 <꽃 아래 봄에 죽기를>은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의 단편 및 연작단편집상을 수상하였다. (에도가와 란포상이 신인의 장편을 대상으로 하는 반면,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은 기성작가를 대상으로 한 연간 최우수상으로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권위있는 상이다) 일본 추리소설이 장편 위주로 흘러갔기 때문에 3년 만의 단편 수상이라고 한다.


"번개가 어둠을 찢고 모습을 드러내듯, 카메라의 플래시가 모델의 모공까지 놓치지 않듯이, 단편은 인생의 진실을 한순간에 보여 준다. 짧기 때문에 더욱 선명하고 강렬하며, 허무하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소설 형식이 단편이다." 권말에 해설을 쓴 고하라 히로시가 헨리 슬레서의 말, '단편은 섬광의 인생' 을 인용하며 부연설명한 대목인데 참으로 맞는 말이다.


기타모리 고의 소설은 구성과 기교가 뛰어나고 독특한 정조를 활용하여 이야기를 끌고 나가기 때문에 장르소설의 한계에 갇히지 않는 미덕을 갖추고 있는데, 2010년 48세의 젊은 나이에 심부전으로 사망해서 독자들을 안타깝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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