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마지막에 본 것은 그날, 너는 무엇을 했는가
마사키 도시카 지음, 이정민 옮김 / 모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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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트리 장식과 조명이 도쿄 거리를 수놓은 12월 24일 밤, 빈 건물 1층에 여자가 죽어 있다는 신고가 접수된다. 현장은 도쓰카 경찰서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경찰은 사건성이 없기를 바라고 출동했지만, 도착 즉시 그 기대를 접어야 했다. 시신은 한겨울인데도 블라우스와 슬랙스만 입고 있었는데, 블라우스는 앞이 벌어져 있고 슬랙스 단추 역시 떨어져 없었다으며, 두부에 타박상이 있었다. 나이는 50세에서 60세 사이, 노숙자로 추정되는 그녀를 살해한 범인을 잡기 위해 경시청의 괴짜 형사 미쓰야 슈헤이와 관할서의 가쿠토가 한 조를 이룬다.

시신의 신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확인 된다. 그녀의 지문이 경찰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약 1년 전 히가시야마 요시하루라는 보건복지센터 공무원이 살해 당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의 서류 가방에서 채취된 지문이 그녀의 것이었다. 그녀 이름은 마쓰나미 이쿠코. 남편이 죽은 후 생계가 곤란해지자 노숙자가 된 것 같았다.

그녀가 히가시야마 요시하루를 죽인 범인이었을까? 하지만 지인을 자처한 또 다른 증인에 따르면 그녀는 누군가를 살해할 만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를 죽인 범인은 누구일까, 왜 살해 당했을까? 1년 전 살해당한 히가시야마 요시하루와는 무슨 관계일까? 어째서 괴짜 형사 미쓰야 슈헤이는 히가시야마 요시하루의 아내 히가시야마 리사의 행적을 쫓는 것일까? 불행이 겹치고 겹친 끝에 노숙자로 전락한 그녀가 죽기 전 바라본 것은 무엇이었나...

마사키 도시카는 1965년 도쿄 출생으로 1988년 나오키상 수상작인 도도 시즈코의 <익어가는 여름>에 강렬한 인상을 받아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1992년 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2007년 <지다 피다 돌다>로 제41회 홋카이도신문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은 작가의 히트작 <그날, 너는 무엇을 햇는가>로 시작된 미쓰야&다도코로 형사 시리즈인데, 일본인 특유의 정서가 강해 공감하기 어려운 면이 많다. 특히 주변 사람의 시선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과,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일단 사람에게 책임을 따져 묻는 정서가 그렇다.

마쓰나미 이쿠코는 남편 마쓰나미 히로시와 가난하지만 행복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다니던 회사가 어려워지고, 사장이 남편 마쓰나미 히로시에게 연대보증을 세운 후 도산해 버리자 불행이 시작된다.

남편은 경비 일자리를 얻어 힘들게 일하다 병을 얻었고, 어느 비오는 날 지주막하출혈로 자전거를 타고 가다 쓰러져 사망한다.

그의 사망은 두 가정에 불행을 가져왔다. 마쓰나미 이쿠코는 남편이 사망하자 경제적 정서적 어려움에 빠졌다.

다른 피해자는 이자와 유스케라는 트럭 운전사였다. 그는 본래 광고회사에 다녔으나 회사가 어려워지자 트럭운전사가 된 후 아내와 아들에게 무시 당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쓰나미 히로시를 치게 된 것이다. 마쓰나미 히로시가 지주막하 출혈로 교통사고 전에 이미 사망한 상태라는 것이 밝혀졌음에도 그의 아내는 유스케를 비난한 끝에 이혼한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녀는 자신의 모든 불행을 마쓰나미 히로시의 탓으로 돌렸고, 아내인 마쓰나미 이쿠코가 자신을 찾아와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한다. 그리고 끝내 그녀를 살해하고 만다.

한편, 1년 전에 살해된 남자 히가시야마 요시하루는 보건복지센터 공무원으로 생계가 어려워진 마쓰나미 이쿠코에게 갖은 비난을 쏟아 부은 인물이었다. 그는 아내가 바람을 피우자 정신이 이상해진 끝에 딸에게 집착하고 해치려다 도리어 딸에게 살해 당한다. 그 딸 루미아는 가출 기간 동안 마쓰나미 이쿠코의 집에서 익명으로 생활했는데 사건 현장을 우연히 목격한 마쓰나미 이쿠코가 뒷처리를 해주는 과정에서 서류 가방에 지문을 남긴 것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71268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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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요 엄마
김주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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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셔야 하겠습니다"

전화를 걸어온 이는 어머니 곁에서 교사생활을 하며 고향을 지켜 낸 이부동생이다. 그런데 왠일인지 주인공 '나'는 모친의 죽음에 걸맞는 감정을 드러내지 못한다. '내'가 드러내는 감정은 굳이 따지자면 귀찮음, 짜증, 당혹스러움에 가깝다. 아우는 그런 '나'를 달래가며 시신을 염습하고 장례를 치르고 유골을 뿌린다.

아우가 인도하는 대로 '나'는 과거로 조금씩 이끌린다. 동네에 하나 뿐이었던 중국집, 방학이면 머물던 외삼촌의 집, 어머니가 일하러 다니던 권씨 댁. 그곳들을 하나 하나 방문하는 동안 '나'는 어느덧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두 번의 결혼을 호적 변경도 없이 치르고 큰아들에 대한 미안함을 평생 간직하고 살다 가신 어머니, 사촌누나로 알고 지냈지만 사실은 친누나였던 애숙이 누나, 어렸을 적 유일한 친구였던 정태 등을 떠올리는 동안 '나'는 '내' 안의 무언가가 변화하고 있음을 느낀다.

어머니의 뒤늦은 재가로 인해 받은 상처, 새아버지로 부터 받았던 정서적 학대, 월사금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따돌리고 폭행했던 학교 선생에 대해 복수하는 길은 멀고 먼 곳으로 떠나는 것이라 굳게 믿고 고향을 향한 문을 꼭꼭 걸어둔 채 화해의 손길을 거부하던 '나'의 마음은 어느덧 조금씩 슬픔으로 화하며 풀려가고 있었다.

어머니가 불평없이 받아들인 죽음, 그리고 귀향과 회상. '나'는 고향을 떠나 배웠다고 생각했던 눈부신 형용과 고결한 수사 들은 허세에 불과했음을, 어머니가 내게 주었던 것은 가난과 학대의 기억이 아니라 자유의 시간이었음을 깨닫는다.

소설은 새벽 세 시에 아우로 부터 전화가 걸려오면서 시작한다. 오랜 타관 생활 끝에 고향으로부터 걸려오는 전화, 그리고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한 귀향. 전형적인 귀향형 소설의 설정과 전개에도 불구하고, 거장이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허투루 읽어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삶의 비밀을 들여다본 사람만이 해줄 수 있는 말들의 울림이라고 해야할지, 극심한 고통의 시기를 견디고 초극의 경지를 맛본 이가 풍기는 고요한 분위기라고 해야할지...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70656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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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한 규제자 염소자리 아스트로크리미스 범죄소설 3
군터 게를라흐 외 지음, 강병창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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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아이히보른 출판사가 기획한 아스트로크리미스(Astrokrimis) 시리즈는 독일을 비롯한 세계 70여 명의 작가들이 12개 별자리에 관해 쓴 소설을 모은 범죄소설 총서이다. 각각의 별자리는 다음과 같은 별칭을 갖고 있다.

죽음의 활화산, 양자리(3.21.~4.20.)

무정한 폭군, 황소자리(4.21.~5.20.)

위험한 이중인격자, 쌍둥이자리(5.21.~6.21.)

간교한 형식주의자, 게자리(6.22.~7.22.)

잔인한 승부사, 사자자리(7.23.~8.23.)

냉혹한 현실주의자, 처녀자리(8.24.~9.23.)

야누스의 얼굴, 천칭자리(9.24.~10.23.)

비밀스러운 처세꾼, 전갈자리(10.24.~11.22.)

오만한 사냥꾼, 궁수자리(11.23.~12.21.)

냉정한 규제자, 염소자리(12.22.~1.20.)

어두운 자유주의자, 물병자리(1.21.~2.19.)

불안정한 신비주의자, 물고기자리(2.20.~3.20.)

작품집에는 총 여섯 편이 실려 있다.

<킬레> - 군터 게를라흐

잘 팔리지 않는 소설작가이자, 빈집털이범인 '나'는 연인 킬레가 점성술사이자 예언가를 자처하는 쿠르트 마이어-슈타인에게 빠져 정상적인 판단을 못하자 그의 집을 털기로 결심한다. 만약 그가 빈집털이를 당한다면 자신의 미래조차 예언 못하는 머저리라는 것이 입증될 뿐 아니라 킬레가 가져다 바친 돈도 되찾아오게 될 터였다.

하지만 빈집털이에 성공한 직후 점성술사가 누군가에게 습격 당하고, '나'는 얼떨결에 킬레와 함께 점성술사를 찾아 갔다가 점성술사와 동성애인의 화해를 주선하게 된다.

<내부감사실> - 알무트 호이너

은행 외부감사실의 그로페가 엘리베이터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시체는 단 한 차례의 가격으로 두개골의 손상을 입어 사망한 것으로 보였고, 단정한 상태로 앉혀져 있었다.

범인은 내부감사실의 이베쉬였는데 그녀는 은행 내부에 걸린 그림의 복제본을 만들어 빼돌리다가 우연히 그로페에게 발각되자 주저없이 살해한 것이다.

<우린 경찰이었어> - 로베르트 브라크

페너-와-파울이 친구 막스에게 자신이 협박 당하고 있다면서 도와달라고 한다. 막스는 기꺼이 돕겠다고 나선 뒤 협박범이 돈을 찾아가는 시점을 노려 총기로 제압하고 몽둥이 찜질까지 안겨준다. 이렇게 해서 유쾌한 몰카를 찍어보려던 방송국 사람들은 혼찌검이 나게 된다.

<정원의 염소> - 아만다 크로스(캐롤린 하일브런)

이웃의 80 넘은 파르시와 50대 후반의 '나'는 매우 절친한 사이다. 그녀의 의붓자녀가 자신을 정신병자로 몰아 재산을 빼앗으려 든다는 것을 전해들은 '나'는 '재산상의 변동을 가져오지 않는 결혼'을 친구로서 제안한다. 파르시가 이를 받아들이자 의붓자녀 중 아들과 며느리는 찾아오지 않게 되었고, 딸과 그녀의 여자친구는 예전처럼 주말마다 찾아왔다. 그의 정원에 찾아온 염소와 염소자리 별자리는 이번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 밝혀진다.

<카프리코르노 피자> - 에디트 크아니플

사냥꾼 제프 후머는 자신의 여자친구 로제마리 게반트탈러가 또 다른 사냥꾼 알로이스와 바람을 피웠다는 것을 눈치 챘으면서도 그녀가 아무일도 없었다고 강력히 주장하자 그녀와 결혼하기로 한다.

그후 제프는 알로이스를 사냥 중 사고를 가장하여 살해한다. 하지만 로지의 뱃 속 아이가 알로이스의 아이였기 때문에,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임신기간 동안 로지가 매우 뚱뚱해졌기 때문에, 제프는 또 다른 여인 구스틀과 관계하게 되고 결국 쌍둥이를 낳게 된다. 얼마 후 제프는 사고를 당해 사망하고(로지가 도와줬더라면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버림받은 로지는 자살을 기도하다 만난 또 다른 연인과 카프리코르노 피자 가게를 열어 행복하게 산다. 카프리코르노는 이탈리아어로 염소자리라는 뜻이다.

<동물의 왕국에서 벌어지는 삶과 죽음> - 프랑크 고이케

오페레타의 프리마돈다 도를레 칠러는 60이 넘은 나이임에도 실력과 정렬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불행하게도 과년한 딸이 있었고, 그녀는 생활력도 없는 주제에 아버지 없는 아이까지 임신한 뒤 그녀의 수입에 기생해 살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 도를레 칠러는 각종 법의학 서적을 탐독한 뒤 완벽한 유아 살인을 계획한다. 계획은 성공하고, 딸은 정신병에 걸려 입원하게 된다. 도를레 칠러는 늦은 나이에 오페라 <투란도트>의 연출과 프리마돈나 역을 거머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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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심은 사람 - 개정2판
장 지오노 지음, 최수연 그림, 김경온 옮김 / 두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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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심은 사람>은 장 지오노가 1910년대에 오트 프로방스 고산지대를 여행하다 우연히 만난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물이 떨어져 곤란을 겪는 장 지오노에게 그는 자신의 오두막으로 데려가 물과 음식, 그리고 휴식할 공간을 제공했다.

사내의 이름은 엘제아르 부피에였고, 나이는 쉰 다섯이었다. 양을 치면서 개와 함께 단순한 삶을 사는 그는 황무지에 나무를 심었다. 그는 나무가 없기 때문에 그곳의 땅이 죽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달리 해야 할 중요한 일도 없었으므로 그런 상태를 바꾸어 보기 위해 그는 나무를 심었다.

얼마 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장 지오노는 5년 동안 보병으로 복무한 뒤 다시 황무지로 갔다. 그곳은 아무런 기술적인 장비도 갖추지 못한 오직 한 사람의 영혼과 손에 의해 숲이 되어 있었다. 장 지오노는 인간이란 파괴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는 하느님처럼 유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20년 이래 장 지오노는 1년에 한 번씩 엘제아르 부피에를 찾아갔다. 그는 실의에 빠지거나 자신이 하는 일에 의심을 품지 않고 나무를 심어 나갔다.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 시기 잠깐 위기를 겪은 외에는 계속 숲이 확장되었고, 수자원이 복원되어 생태계가 활성화되었으며, 사람들이 마을을 이뤄 살게 되었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1947년 바농 요양원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삼체> 1권에서 황무지에 나무를 심는 에반스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 인물에 영감을 준 것이 <나무를 심은 사람>의 엘제아르 부피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확고한 신념으로 일을 추진해 가는 에반스와 달리 엘제아르 부피에는 매우 단순하고 소박한 믿음으로 나무를 심는다. 1953년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발표되고 1954년 책으로 출판된 이후 7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문학작품으로서, 환경·생태 교육 자료로서 읽히는 이유가 어쩌면 그 '소박한 믿음'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의 의도가 소박하기 때문에 여러가지 상상을 더해볼 여지가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작품의 판화는 마이클 매커디의 작품인데 어딘지 모르게 그로테스크해서 글의 분위기와 성기는 느낌이 든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70582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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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레스 공항을 떠나며 - 한말숙 소설선집
한말숙 지음 / 창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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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 <덜레스 공항을 떠나며>는 2002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911 테러 직후 미국에 사는 딸의 집에 방문하는 노년 여성의 이야기다. 교수인 남편이 미국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초청되어 주최측으로부터 비즈니스석 티켓을 제공받는다. 화자 본인도 잘 사는 사위가 티켓을 끊어주어 미국 나들이를 하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911 테러 직후라 시국이 어수선해 화자는 갈까 말까 망설인다. 고심 끝에 가는 것으로 결정한 뒤 미국 가서 잘 먹고 쉬고 나니 문득 미국 오는 비행기의 이코노미석이 텅텅 비었던 것이 떠올랐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싼 이코노미석으로 바꾸고 빈좌석까지 넓게 이용할 생각에 뿌듯해하는데 막상 덜레스 공항에 가보니 이코노미석 줄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우여곡절 끝에 비행기를 탄 뒤 홀로 똑똑한 체를 하다가 고생하게 된 점, 과거 해외 여행을 하려면 겪어야 했던 불편들, 남편과 둘이 유학하던 당시의 에피소드, 한국의 위상이 한층 올라온 것에 대한 소회 따위를 떠올리다 보니 인천에 무사히 도착했고, 갔다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데뷔작 <신화의 단애>는 1957년 작품이다. 미술대학생 진영은 며칠 전 방세를 밀려 화구 일체를 빼앗기고 집도 없이 떠돌고 있다. 며칠 몸을 팔아 생활비를 벌 생각을 하기도 하고, 같은 과 남학생의 집에 신세를 지기도 한다. 우연히 얻어걸린 놈팡이에게서 큰 돈을 받게 된 진영은 남자가 빌린 호텔에서 고흐의 소묘집을 보고, 위스키를 마시며 실존을 재확인한다. 마음이 있는 경일에게 사랑한다고 써보내려다 그저 보고싶으니 어서오라고 편지를 끝냊은 진영은 베드에서 일어나 창가에 스케치북을 들고 앉는다. 창밖은 밤이었고 무수한 불빛이 어둠 속에서 별빛처럼 명멸하고 있었다.

이밖에 미국에 여행갔다가 현지 교인들과 함께 병문안을 가서 겪는 에피소드를 다룬 <이준씨의 경우>, 전쟁통에 헤어진 쁘띠부르주아 서울대 출신 청춘남녀의 재회를 그린 <초콜릿 친구>, 외국인과 결혼하려는 자녀 문제를 소재로 쓴 <사랑에 지친 때>, 중년 여성화가의 정념과 욕망의 변화를 관찰한 <여수>, 어린딸이 사경을 헤매자 신에게 기대었다가 딸이 회복되자 신과 적당히 타협하는 <신과의 약속>, 호상을 치룬 집안의 소소한 풍경을 다룬 <행복>, 거문고만 탈줄 알지 여성과의 관계나 돈에는 숙맥인 가인을 다룬 <광대 김선생>, 갓 결혼한 젊은 사내가 홍수통에 살림에 도움이 될 것을 건져내려다 죽다 살아난 뒤 새색시 품으로 돌아오는 <장마>, 노파와 고양이를 내세워 스냅샷을 보여주는 <노파와 고양이>가 실려 있다.

딱히 와 닿는 작품이 없다. 초기 작품은 실존주의의 겉껍질을 다소간 건드리며 삶의 비의를 해석해보려는 시도라도 보이지만, 중기 이후의 작품은 그저 가벼운 터치로 중산층의 삶의 편린을 드러낸 뒤 적당한 감상을 곁들이는 식이다. 라디오 사연으로 소개될 법한.

한말숙은 1931년생으로 출생지는 경남 사천으로 알려져 있다. 책 날개에는 서울로 표기되어 있으나, 아버지 한석명이 일제시대 경찰 간부를 지내다 사천군수를 지낸 이력이 있으니 아마 사천이 맞을 것이다. 오빠 한복 역시 일제시대에 판사를 지낸 인물인데 부자가 나란히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언니는 소설가 한무숙이고, 남편은 국악인 황병기다.

아버지와 오빠의 화려한 친일 이력 덕택에 대단히 윤택한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이며, 전쟁통에 서울대 언어학과에 입학했다가 1955년에 졸업을 했다. 소설가 박완서와 대학 동기로 친한게 지냈다 한다.

1957년 단편 <신화의 단애>로 <현대문학>에 추천 완료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는데, 당시 김동리와 이어령이 작품의 실존주의 여부를 두고 신문지상에서 일주일간 논쟁했다 한다.

50년 이상을 소설을 썼으며 1993년 <아름다운 영가>로 노벨문학상 추천을 받은 바 있다. 다만 이러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평단의 평가는 인색한 편이다.

<덜레스 공항을 떠나며>에는 1957년부터 2005년 사이 발표된 소설 중 작가가 선별한 작품을 모아놓은 선집으로, <여수>를 제외하고 모두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영문단편선으로 출판되었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69859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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