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 스티븐 킹 걸작선 1
스티븐 킹 지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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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캐리>를 산 곳은 동인천 배다리에 있는 헌책방 아벨서점이다. 책 얘기를 하기 전에 아벨서점 얘기를 하려고 한다. 아벨서점을 처음 간 것이 대학교 2학년 때 선배를 따라간 때니까, 이러구러 15년 동안 단골 아닌 단골인 셈이다. 대학 시절엔 주로 사회과학 서적이 많다는 이유로 들락거렸고, 요새는 비교적 깨끗한 책들이 많아서 이용하는 편이다. 그러나 나는 아벨서점을 자주 이용하면서도 아벨서점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은 없다. 

인터넷 서점의 신간 할인코너보다 되려 비싸게 파는 책도 있고, 출처가 의심스러운 책(불투명테이프로 도서관 분류테이프를 가린)들도 보이며, 무엇보다도 헌책을 팔러 온 사람들에게 무척 야박한 값으로 후려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야 장사가 되고 유지가 되겠지만, 그렇다면 그냥 장사를 하는 것으로 족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벨서점의 입구에 붙은 인천문화의 지킴이 운운의 문구는 그다지 공감되지 않는다. 

아벨서점은 책을 팔아 이윤을 남기는 곳이다. 다만 그 책이 헌책일 뿐이다. 문학을 사랑해서 돈이 되지도 않는데 인천지역 문화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곳이 아니다. 반대 명제로 나 역시 인천의 문화를 사랑해서 아벨서점을 가는 것이 아니다. 단지 깨끗한 헌책을 사러갈 뿐이다. 현상 이면의 본질은 때론 단순한 법이다. 단순한 본질을 이리저리 꼬아서 해석하면 때론 엉뚱한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 스티븐킹의 <캐리>와 관련한 비평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누군가가 스티븐킹의 전집을 통째로 아벨서점에다가 팔아놨기에 전집을 사기는 부담스럽고, 뭘 살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김성곤 교수의 해설이 수록된 <캐리>를 집어들었다. 포스트모던 비평의 대명사인 김성곤 교수의 영화비평 모음집을 대학교 때 읽고 '아 이렇게 해석하면 아귀가 들어맞을 수도 있겠구나' 하며 신기해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김성곤 교수의 해설을 보자. 캐리의 어머니는 원리주의 신자로서 교조주의적 종교를 캐리에게 강요한다. 이는 미국의 비인간적이고 왜곡된 청교도적 전통을 상징한다. 반면 캐리를 놀려대는 학교급우들은 천박하고 타락한 물질주의를 상징한다. 스티븐킹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도 있었을 사람을 사회가 어떻게 비정상적이고 파괴적으로 만드는가 극명하게 보여 주는 강력한 사회비판 소설을 썼다고 김성곤 교수는 말한다.

김성곤 교수의 영화비평과 캐리의 비평을 읽으면서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문제를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성곤 교수의 주장에 일면 동감하면서도, 전적으로 마음이 기울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해묵은 명제라 생각될지 모르지만 토대와 상부구조 얘기를 다시 해보자. 문화적 영역이 토대를 반영하지 않고 독립적일 수가 있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소설, 어떤 영화, 어떤 문화이든지 간에 토대를 반영할 수 밖에 없으며 온전한 의미의 상징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상징은 현재의 토대를 반영하며 현재의 의식수준을 넘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상징은 단순하건, 복잡하건 해석 과정을 거쳐 토대의 어떤 부분을 반영하는지 말할 수가 있다. 올해 초 읽은 노엘 칼레프의 B급 스릴러소설 <파리의 밤은 깊어> 조차 이런식으로 비평하면 "자본주의의 왜곡된 사회 질서 속에서 범죄가 테러리즘의 양상을 띠게 되며 그 영향이 미성년에게조차 미칠 수 있음을 예리하게 파해친 사회고발 소설" 이라고 한다해서 틀릴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대중문화와 고급문화라는 식의 이분법적 구분도 문제이겠으나, 과도하게 상징에 집착하여 해석하려 하는 것도 문제가 아닐까? <캐리>를 읽고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는 아이를 비정상으로 만드는 사회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의식을 느낀 독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혹은 그것을 느낄 수 있어야만 <캐리>를 온전히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좀 더 생각해 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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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칭기즈칸 - 몽골의 푸른 늑대
이노우에 야스시 지음, 구혜영 옮김 / 노블마인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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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전쟁은 그 참혹함 만큼이나 역사적 진보를 가져온다. 그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진보라는 개념 자체를 '선(善)'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 물론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조선의 자본주의적 맹아를 싹틔우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흥분에 몸을 떨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선(善)'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세계화만 보더라도 정복전쟁과 무관하지 않다.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도 그런 것이었으나, 칭기즈칸의 정복전쟁이 과연 세계 역사에서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가 하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알아내기 힘들었다. 칭기즈칸은 정복전쟁을 통해 몽골의 문화와 종교를 강요하고 전파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정복한 곳의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친다. 물론, 내가 알지 못하는 영향이 물론 있었겠지만 이 책을 통해 본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결국 피에 굶주린 푸른 늑대가 주변 나라를 온통 짓밟고 유린하는 핏빛 내용으로 가득찬 책이었다.

칭기즈칸의 일생을 그저 시간순으로 담담히 전개하고 있으며, 전투의 자세한 묘사 등은 나와있지 않아서 연보를 읽는 기분이었다.

 

참고: 삶과꿈 출판사판은 푸른늑대가 아니라 푸른이리로 번역되어 있음. 어떤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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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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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은 정련된 형식의 외설소설이다.

남편 효경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 미흔은 그날로부터 자기 생의 기반이 없어진 여자처럼 두통과 무력감에 시달리다가 이사간 곳에서 사설우체국(우체국에 다니는 나로선 이 단어가 자꾸 거슬렸다. 별정우체국이라고 해두자!) 국장인 규와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규는 인생의 이면을 속속들이 간파해버린 사람처럼 의도적으로 삶을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다.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 과정은 물론 나로선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그 사랑의 행태는 파괴적이고 충독적이며 외설적이다. 둘은 모텔에서 한낮에 정사를 치루며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는 날 조차 고향집의 모텔을 찾아든다. 그러던 그들의 행보는 효경에게 들통이 나고, 효경은 미흔과의 관계의 무게를 확인하는 것이 의무인양 미흔을 폭행한다. 규는 이 사건 이후 소설에 등장하지 않고, 효경은 애증에 시달리는 삶을 한동안 지속하고, 미흔은 별정우체국에 취직하여 단순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작가 후기에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 아주 현실적이고 위험한 전형들... 사랑의 허구와 실재를 건드리고 싶었다...그러나 결과적으로, 쾌락과 감상과 욕망의 비루함과 가벼움과 무상한 환멸을 기록하게 되었으니...', '더이상 감정적 모험은 하지 않을 것이다...'

작가의 다짐처럼 최근 전경린의 작품을 보면 예전보다 덜 독하고, 예전보다 더 많이 생각하는 것 같으며, 예전보다 사랑을 조금 믿는 것 같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작가가 적어도 이 소설을 쓰기 전까지 사랑이란 것을 진지하게 해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사랑과 욕망은 혼재되어 진정한 사랑과 진정한 쾌락이 때로 동일시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혼동을 바로잡을 건강한 삶의 전형 역시 비뚤어진 형태로 제시된다. 그리하여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 구분하에 '사랑으로부터 상처 받음'과 '남성적 폭력성'으로부터 상처입음은 동일시 되고, 결국 휴게실 여자가 '가랭이 보시'하는 삶이 비뚤어지고 왜곡된 어떤 것이 아니라 이해될 수 있고 자연스러운 그것이 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현실감을 느낀 장면은 효경이 미흔을 폭행하는 장면이었다. 내가 남성이고, 나도 모를 그러한 성향을 가져서는 아닐까. 그런 고민도 진지하게 해봤지만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그런 것이 바로 인생의 진실한 모습이며 인생은 생각보다 훨씬 비루하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폭행 이후 효경과 미흔이 각자 살아가는 이야기는 전반부의 주된 이야기보다 훨씬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전경린은 지금은 이 소설을 쓸 때보다 훨씬 더 깊어졌다. 나는 전경린의 소설을 또 살 것이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056459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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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 전12권 황석영 대하소설 1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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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다닐때 동아리 사람들 사이에 대하역사소설로 제일 인기가 있었던 것은 단연 <태백산맥>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슬며시 고개를 드는데, 나는 남들이 모두 읽는다는 이유로 <태백산맥>을 읽지 않고 송기숙의 <녹두장군>을 읽었다. 그리고 인기가 있었던 것이 바로 황석영의 <장길산>이었는데, 마찬가지 이유로 홍명희의 <임꺽정>을 읽었다. 그리고 15년이 흐른 후 <장길산>을 헌책방에서 사다가 읽게 된다. 밀린 숙제를 하는 기분이 드는 것은, 바로 어릴 적 치기어린 자의식에 대한 씁쓸한 회환이 아닐까 한다.

장길산은 17세기 말 숙종 때 해서지방의 구월산을 거점으로 하여 활빈도를 표방, 전국적인 활약을 하던 인물이다. <장길산>에 묘사된 당시 사회상황을 보면 신분사회는 붕괴되고 상업자본이 새로운 세력으로 대두되는 시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총포의 유통으로 인해 기존의 단병접전에 의지하던 전투 양상이 원거리 전투로 바뀌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을 우리나라에 있어 자본주의적 맹아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에 민중의 의식 역시 신분제사회의 낡은 틀에서 벗어나 '법률로 부터'의 자유를 인지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장길산>은 이러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광대 장길산 자신의 개인적 한과 울분을 민중의 시대적 염원으로 인식하는 단계까지 나아가 전국적 녹림당을 규합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이 책의 초판년도가 1976년이니 꼭 내 나이만큼 오래된 소설이다. <장길산>의 문제의식과 시대를 70년대 남한사회에 투영하게 된다면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정권에서 몰랐을리 없다. 그래서인지 <장길산>을 읽다보면 뭔가 억눌려 있음을 느낄 수가 있다. 저 이문구의 <오자룡>과 같이 직접적 탄압으로 필화 사건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을지라도, <장길산> 역시 수많은 외압 속에서 씌여졌을 것이다.

또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초반에 등장하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각기 연계를 갖고 매끄럽게 이어져 나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묘옥의 경우 초반에 비중있게 등장하여 줄거리의 근맥을 이루는가 하더니, 후반부에 겨우 끼워넣기 식으로 등장하고 우대용 등 수적패들은 나중에 있었는지도 모를 인물들이 되버리고 만다. 또 검계와 살주계, 그리고 산지니 얘기는 작은 에피소드로 처리해도 되었을 것 같은데 무척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신문 연재의 땜빵용 얘기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결국 초반부에는 <수호지>처럼 각 인물들의 출신과 사연을 들어가며 흥미를 돋우더니 후반부에서는 이러한 인물들이 제각각 놀다가, 종장에 가서는 관군과의 변변한 전투도 없이 길산과 최형기의 개인적 대결로 마무리된다.

장길산은 임꺽정과 달리 역사적으로 죽음이 기록된 바는 없다고 한다. 결국 장길산은 잡혀 죽지 않았거나, 특정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활빈당의 다수가 장길산을 표방하였을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이렇듯 역사적 상상력이 허용하는 범위가 꽤나 넓은데도 후반부로 갈 수록 흥미가 떨어짐을 느꼈던 것은 작가의 역량 문제인지, 당시 권력의 외압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15년을 기다려 읽은 <장길산>은 썩 흡족한 느낌은 아니었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056394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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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본 백석 시집
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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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 원 ( 八 院 ) 
서행시초(西行詩抄) 3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妙香山行) 승합자동차(乘合自動車)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慈城)은 예서 삼백오십리(三百五十里) 묘향산(妙香山) 백오십리(百五十里)

묘향산(妙香山 어디메서 삼춘이 산다고 한다

쌔하얗게 얼은 자동차(自動車) 유리창밖에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車)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대학에 다닐때에, 시를 읽고 눈물을 흘릴 수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산문, 그 중에서도 사실주의에 경도되었던 이유도 있고, 브레히트나 박노해와 같이 알기 쉬운 시 이외에는 잘 이해를 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교양수업시간에 제일 뒤에 앉아, 우연히 백석의 시 八院을 읽고 눈물을 흘렸었다. 나도 모르게 흘린 눈물이라 허둥지둥 당황하며 자는 척 책속에 머리를 묻었던 기억이 난다.

'텅 비인 차(車)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라는 구절을 수업시간이 끝나도록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문학이란 무엇일까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고, 특히나 시에 대한 내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었다.

八院의 소재가 만일 시가 아닌 소설로 표현되었더라면 공분을 일으키거나 비감에 젖게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의 나처럼 울게 만들 수 있었을까...

 

관서지방을 지나던 작가는 우연히 손발이 차가운 물에 붇고 갈라진 계집아이 하나가 차에 타는 것을 보게 된다. '자성'에 있다는 삼촌을 찾아간다고 한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인 것은 계집아이가 난생 처음 얻어입는 옷이었기 때문에 생뚱맞게 보이는 것이다. 새로 찾아가는 곳이 집이 아닌 삼촌이라는 건 계집아이에게 부모가 없다는 것이고, 거기에서 어떤 생활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계집아이는 운다. 흐느끼며 운다. 지금까지의 생활이 서럽고, 의지가지할 데 없는 자신의 처지가 서럽고, 어려서 무섭고, 새로운 곳을 가는 것이 두렵고, 그래서 운다. 그 우는 것을 보고 백석도 운다. 그러나 더불어 우는 것을 백석은 '텅 비인 차(車) 안 한구석에서 다른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라고 쓴 것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그 어떤 시보다도 이 시가 혁명적이라고 느꼈다. 문학이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은 아련한 느낌. 그 후 기형도의 시에서 또다시 그 느낌을 느꼈었던 것 같다.

 

여전히 나는 시는 잘 모른다. 내가 아둔하여 모르는 것인지, 시가 원래부터 어렵고 난해한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잘 모른다. 하지만 백석의 시만은 내가 진정 가슴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마음 깊숙한 곳의 정수를 고스란히 전달하는 시인 백석을 떠올리며, 근자의 내 어리석음을 반추해본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055623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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