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를 입은 비너스 펭귄클래식 61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지음, 김재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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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Leopold Von Sacher-Masoch)는 1836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변방, 현재 우크라이나 지역에 있는 렘베르크에서 경찰국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라츠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딴 후 역사학 교수로 일하다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마조흐는 하나의 틀을 가지고 사랑, 재산, 국가, 전쟁, 죽음을 테마로 여섯 권의 책을 쓰기로 계획하고 이 연작소설들에 '카인의 유산'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첫 번째가 바로 '사랑'을 테마로 한 <모피를 입은 비너스(1870)>이다. 

 

소설은 갈리시아 출신의 귀족이자 지주로 이제 갓 서른 즈음 된 제베린 폰 쿠지엠스키가 <모피를 입은 비너스>라는 그림에 얽힌 자신의 기묘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시작된다. 

제베린의 집 위층 방에는 반다 폰 두나예프라는 이름의 돈 많고 아름다운 미망인이 살고 있었다. 제베린은 돌로 된 비너스상을 남몰래 흠모해오다가 반다에게서 차가운 비너스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청혼한다. 하지만 반다는 자신이 제베린을 한 달이나 두 달을 사랑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원히 제베린을 사랑할 수는 없다면서 거절한다. 제베린은 그녀를 소유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그녀의 노예가 되는 자신의 환상을 실현시켜달라고 부탁한다. 

반다는 제베린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고 당분간은 그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의 기묘한 부탁에 머뭇거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누군가를 지배하고 괴롭히는 것을 좋아하는 면이 있음을 발견하고 쾌감마저 느끼게 되고, 급기야 제베린에게 다른 이름을 사용하길 강요하고 고문과 죽음의 권한도 자신이 소유한다는 계약서를 작성하게 한다.

여행지에서 화가를 압도적인 매력으로 지배하게 된 반다는 모피를 입고 엎드린 제베린을 밟고 있는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 후 그리스 출신 젊은이에게 반한 반다는 제베린을 교묘하게 속여 결박한 후 그리스 남자로 하여금 제베린을 채찍으로 고문하도록 만든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제베린이 고향으로 돌아와 얼마간 가업을 되살리며 삶을 꾸려가고 있을 때 한 통의 편지와 꾸러미가 도착한다. 반다가 보낸 편지에는 제베린의 환상을 충족시켜준 자신 덕분에 이제는 건강해졌길 빈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고, 꾸러미에는 언젠가 독일인 화가가 그린 그림 <모피를 든 비너스>가 들어 있었다.

 

욕망하는 쪽은 남성이고 여성은 그 욕망의 대상이죠. 이것이 여성이 갖는 전적이고도 결정적인 이점이에요. 자연은 남성이 지닌 열정을 통해 남성을 여성의 손아귀에 넘겨주었어요. 그러니 남성을 자신의 종으로, 노예로, 한마디로 노리갯감으로 만들어 결국에는 깔깔대며 차버리지 못하는 여자는 뭔가 잘못된 여자에요...... 여성이 잔인하고 불충하고 게다가 남성을 학대하고 모욕적으로 가지고 놀며 동정 같은 것을 보이지 않으면 않을수록 여성은 남성의 욕망을 자극하여 남성에게 사랑을 받고 또 숭배를 받을 수 있어요.


'너는 망치가 아니면 모루가 되어야 한다' 라는 괴테의 말이 남녀 관계에서처럼 딱 들어맞는 곳도 없을 겁니다...... 남자의 유일한 선택은 폭군이 되든지 아니면 노예가 되는 겁니다.

 

1890년 크라프트에빙이 성적도착의 개념으로 발표한 마조히즘의 유래가 된 <모피가 된 비너스>에서는 사실 성적도착에 관한 보고서라기 보다는, 남성과 여성이 관계를 갖게 될 때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권력의 구도를 파헤친 소설로 평가받아야 한다. 자허마조흐는 그런 권력의 불균형이 계속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여자가 남자의 동료가 되려면 권리 면에서 남자와 동등하고 또 교육과 일을 통해 남자와 동등해져야 해요. 지금으로서는 망치냐 모루냐 하는 양자택일의 선택밖에는 없어요.

 

http://blog.naver.com/rainsky94/80211468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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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雅歌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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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말, 산업화의 그늘에서 뿌리뽑힌 자가 되어 도회로 끌려나간 '우리'가 어느새 저마다 귀밑머리 희끗한 중년이 되어가고 있을 무렵, 초등학교 동창회 초대장이 날아든다. 다시 모인 그들 중 누군가가 '당편이'에 대해 묻는다. 

당편이는 신체적으로는 곱추에 다리를 저는 불구였고, 정신적으로 온전하다고 할 수 없었다. 어느날 마을에 버려진 당편이를 문중의 녹동어른이 거두었는데, 그날부터 당편이는 그럭저럭 마을에서 더불어 살았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전쟁을 겪고,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당편이가 스며들 수 있는 곳은 점점 사라져 간다. 당편이는 결국 적극적인 걸식에 의하지 않고는 생존마저 어려운 지경에 처하기도 한다. 함께 살던 건어물장수 영감이 죽자 당편이는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자들을 수용한 시설로 떠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우리 곁에서 하나둘 사라졌다. 정신병원과 각종 수용소, 재활원, 보호소 같은 시설들이 그들 중 생산 능력이 없으면서 사회의 미관과 편의만 해치는 이들을 먼저 골라 데려갔다. 그리고 예전의 환유 대신 구호 대상자, 정신병자, 심신미약자, 장애인, 지체부자유자 같은 전문화되고 기능적인 호칭을 그들에게 부여한 뒤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에 감추어버렸다.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 적힌 글이 아니다. 이문열의 <아가>에 쓰여진 글이다. 

<감시와 처벌>을 통해 푸코가 개인이 원자처럼 분리되고, 타자와의 관계가 파괴되며, 공동체의 연대의식이 붕괴된 끝에 합리적인 예속화에 길들여지는 과정을 분석해냈다면, 이문열은 비슷한 경로를 거쳐 과거를 향수한다. 이문열은 끝내 시대와 불화할 것이다. 그가 믿는 이상향은 언제나 두고 떠나온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문열이 진보를 조롱하는 것은 유별난 행동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일관되게 반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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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
김연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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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그린비의 상상>의 화자는 소설가다. 화자는 매우 현실적인 거리를 걷고 있다. 지나가는 거리의 상점 간판을 세밀하게 나열하는 수법 때문에 독자는 90년대 중반의 한 거리를 화자와 함께 걷고 있다는 착각을 할지도 모른다. 끊임 없이 비가 내리는 어두운 거리를 화자와 함께 걸으면서, 우리는 화자가 상상하는 소설 스토리 속으로 들어간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임의 피아노 학원 원장, 이혼하고 소설을 쓰는 남자, 말을 더듬는 단신의 슬지라는 여자. 남자는 아름다운 피아노 학원 원장을 떠난 후 불구의 슬지와 관계를 맺는다. 불임의 아름다운 여성과 소설 쓰는 불구의 여성을 대비시킨 점은 낯간지럽다. 

<심판>은 주인공이 오손 웰스의 영화를 보다가 잠들어 꾼 꿈 이야기이다. 이 소설에서도 화자의 직업은 소설가로 유추될 수 있는데, 가나다 순으로 정렬되지 않은 국어사전이 소지품으로 나온다. 그녀는 세금을 자동이체 해두었기 때문에 고지서를 받을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날 한 통의 고지서를 받는다. 재판에 피고인으로 앉게 된 화자에게 T/F 식 질문을 끊임 없이 던져댄다. 

<미성년>은 '현선이라는 소설 쓰는 학생과 자세히 보면 한쪽 다리를 저는 교수 지훈에 관해' 소설을 쓰는 이야기이다. 역시 소설가를 화자로 상정하고, 그 소설가가 쓴 소설에 대한 자기 비평을 가하고 있다. 

<배반>은 '호랑이가 닭에게 잡아먹힌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하얀 공간 속에 호랑이와 닭이 평화롭게 공존하다가, 어느 순간 호랑이가 이계의 공간에서 욕망할 대상들을 새로이 알게 된 후 겪게 되는 기이한 이야기이다.

그 밖에 헤어진 연인을 자취방이라는 공간에서 기다리는 동안 느끼는 병적 정신상태를 불안한 필치로 그린 <기다림>,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추측되는 <은유희>, 있음과 없음의 경계에 대해 '낙태'라는 사건을 통해 이야기한 <아이, 이미지의 장례식>, 대학 졸업식에 참석한 여자를 스토킹하는 남자(혹은 사물, 또는 그 무엇도 아닌)에 대해 묘사하는 <세레모니>가 실려 있다.

 

김연경의 소설집 <미성년>에 수록된 작품들은 소설가의 자기 분열 양상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김연경은 에고이즘의 방패를 둘러치고 있다. 자신의 소설이 비평가들에게 난도질 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소설이 타인에게 비평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두려워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소설의 화자는 소설을 쓴다. 그들이 소설을 쓰는 과정을 묘사하고, 이런 저런 이유를 붙이고, 화자가 스스로 소설을 비평한다. 완벽하다. 그러나 그 완벽성은 소설 속에서 완벽할 뿐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김연경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 겪지 못한 것들에 대해 일체 함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역시 에고이즘의 발로로 보인다. 소설은 지극히 제한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전개된다. 

낙태에 관련한 이야기들이 흥미롭다. 어떤 가치판단이나 죄의식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도 여러차례 다루어진다는 점이 그렇다. <피아노, 그린비의 상상>, <심판>, <아이, 이미지의 장례식>에서 다루어지는데, 먼저 <심판>에서 판사는 피고인에게 낙태한 사실에 대해 죄를 물으며 T/F식 질문을 던져댄다. 피고인은 이를 부당하다고 느낀다. <아이, 이미지의 장례식>에서는 화자가 착상되었다가 칼에 난도질 당해 떨어져 나간 수정체이다. 그런데 수정체는 자신이 이미 죽어버렸다면서, 사실은 죽지 않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낙태라는 사건에 대한 혼란을 소설 쓰기를 통해 정리하려는 시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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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갑자기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17
이시자카 요지로 지음, 현광식 옮김 / 소화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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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에서 양재학원을 다니는 시로야마 유리코는 어느 날 B현 출신의 재경학생 임시총회에 갔다가 의대생인 가네코 다이스케를 알게 된다. 다이스케는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서는 자기 주장을 확실히 펼쳤고 잘못된 점에 대해서는 솔직 담백하게 시인하는 사람이었다. 유리코는 시원시원한 다이스케에게 끌려 전부터 애매한 관계를 지속해오던 야부키와 결별한다.

그러나 유리코의 어머니는 다이스케에 관해 이야기를 듣더니 어쩐지 교제를 반대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 점은 다이스케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리코는 어머니가 간암으로 투병하다가 죽기 직전에 들려주는 이야기에 모든 것이 운명의 장난임을 깨닫는다. 유리코의 어머니는 젊었을 때 다이스케의 아버지 가네코 유사쿠와 깊은 관계를 맺어오다가 지금의 아버지가 청혼해오자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이끌려 유사쿠를 떠난다. 그리고 그때 내린 결정을 때로 후회하며 지내왔던 것이다.

유리코의 아버지는 그런 모든 사정을 알고 있었던지 관 속에 가네코 유사쿠와 아내가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넣어준다. 유리코는 자신이 다이스케와 교제를 지속하면 아버지를 두 번 배신하는 일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다이스케에게 결별의 편지를 보낸다.

 

1900년 아오모리현 히로사키 출생한 이시자카 요지로는 게이오 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중학교 교사가 된다. 재직 당시 발표한 <젊은 사람>으로 미타(三田)문학상을 수상하지만 1938년에 이 작품이 불경죄, 군인무고죄 등으로 고소를 당한다. 교원 생활을 청산한 이시자카 요지로는 도쿄로 가서 본격적인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보리 죽지않다(1936)>, <푸른 산맥(1947)>, <이시나카 선생 행장기(1954)> 등을 발표하며 통속 소설 작가로서 인기를 누린다. 1966년 기쿠치간상을 수상한다. 1971년 아내가 사별한 후에는 별다른 작품 활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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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그림 찾기 1 - 1998년 제29회 동인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윤기 외 / 조선일보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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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숨은 그림 찾기1(직선과 곡선) - 이윤기

 

주인공 '나'에게는 은사가 한분 있는데 그분의 별호는 일모(一毛)선생이다. 중학교에서 국사와 세계사를 가르치던 스승인데 퇴직 후에도 사람 공부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제자들에게 덕망을 얻었다. 선생은 덕분에 처지가 곤란한 제자에게 도움을 줄 정도의 인맥을 갖고 있었다. 

미국에서 쓰기 시작한 책을 마무리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와 있던 '나'는 호텔비며 매식비가 부담되던 차에 일모선생의 도움을 받게 된다. 일모선생은 경주에서 호텔을 경영하는 하사장을 소개해주어 숙박비 부담을 조금 덜어주는 한편 선생이 설립한 장학금 운담 프로그램도 지원해준다. 일모선생은 하사장이 외눈박이라며 세상 공부를 해보라고 했는데 그 뜻이 아리송했다.

하사장은 겪어보니 자린고비에 자기 깜냥의 판단만 일삼는 사람이었다. 자기 기준에 비추어 납득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는데 그 도가 지나쳐 '나'는 하사장을 좋지 않게 보게 된다. 그 즈음 5천여 권의 장서를 갑자기 옮겨야 할 처지에 놓여 곤란해하던 '나'에게 하사장이 호텔의 공간을 제공한다. 

마침내 집필 작업을 마무리하고 출판기념회까지 벌인 후 '나'는 미국으로 돌아가는데, 한국에서 장서에 관련한 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하사장이 장서를 호텔 방 하나에 온전히 보관해주기로 한 것 같은데 이제와서 보니 그런 방이 보이질 않는다며 장서가 모처로 처분된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전화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장서들이 하사장 호텔 한켠의 재래식 화장실에 박스채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짐을 옮기는 인부 하나가 하사장을 출판기념회에 부르지 않아 화가 난 것 같다고 귀띔한다.

일모 선생은 '나'에게 하사장에 대한 판단을 묻고, '나'는 주저 없이 그가 천박한 수전노에 병적인 양생주의자, 대롱으로 세상을 보는 대롱눈이라고 폄하한다. 일모 선생은 그런 '나'의 대답을 듣고, '자네는 너무 고상한 일을 하느라고 발 밑 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운담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는 '내'가 비싼 양주와 고기를 선물로 사가고 하사장을 째째하다고 하며 거하게 한 턱 내는 행동이 하사장의 눈에는 어떻게 비춰졌겠는지, 그런 여유가 있었다면 지원을 받지 않는 것이 옳지 않았는지 되묻는다. 직선이라고 여기는 것이 과연 직선이겠는지, 혹시 대롱 시각으로 곡선의 한 부분을 보고 직선이라고 믿는 것은 아닌지 묻는 일모 선생 앞에서 '나'는 '잃어버린 물건이 내가 이미 뒷짐질해 본 곳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은 무서운 일' 이라고 생각한다.

 

o 타관 사람 - 공선옥


갑철은 공사판에서 함께 일했던 진갑으로부터 그가 살던 거처에서 겨울을 나도 된다는 말을 듣고 윗한배미로 간다. 가겟집 여자는 윗한배미를 묻는 갑철에게 싹싹하게 대해주었다. 거처에 도착하니 든든한 마음마저 들어 조카 홍기를 데려온다. 형은 객사했고 형수는 집을 나갔기 때문에 홍기는 고아원에 있었다. 

홍기를 입학시키고 돌아온 날, 집 담장이 무너져 집은 더 이상 구실을 할 수 없었다. 망연해하는 갑철에게 마을 사람들이 도움을 자청하고 나선다. 그들은 썩 일을 잘했고 붙임성 있게 굴었다. 따지고 보면 그들에게 제공한 곁두리 값이 인부를 산 돈 만큼이나 들었지만 갑철은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감기에 걸린 홍기와 갑철을 위해 가겟집 여자 순임은 뜨뜻한 방을 내어주고 자신은 부엌에서 한뎃잠을 잔다. 갑철은 자신이 마을에 섞여 들어가는 느낌, 그들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서 안온함을 느낀다.  

홍기가 교감에게 귀밑머리를 쥐여잡혀 울고 온 날 가겟집에서 술을 마신 갑철은 옆 방에서 술김에 떠들어대는 교감을 혼을 내줄까 어쩔까 한다. 하지만 취한 몸은 자꾸만 까라지고 가겟집 여자 순임이 그런 갑철의 머리를 가슴에 싸안고 추슬러준다. 

 

o 바람이 분다 - 김영하

 

프로그램과 게임을 시디에 불법으로 복제해서 판매하는 '나'는 컴퓨터 통신망의 구직란을 통해 그녀를 채용한다. 그녀의 이름은 송진영이었고, 일자리를 구한다고 했지만 자신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잘하는 것이 없고, 잘 웃고 가끔은 우울하며, 야간을 할 수는 있지만 토요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영화를 좋아하고 소설을 싫어하며, 바흐와 너바나를 좋아한다는 그녀를 나는 채용했다.

여자와 나는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 가까와진다. 그렇다고 거창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불법 시디를 구워 파는 중간중간 함께 게임을 하거나 언젠가 여행을 가자고 약속을 하는 정도였다. 여자가 집에 돌아가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어느 날 한 사내가 나타난다. 손가락 마디 하나가 없는 그 사내는 자신이 송진영의 남편이라고 했고, 애엄마를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말했다. 여자는 남자가 스토커라고 했다.

여자와 멀리 떠나기 위해 판매량을 늘린다. 조심성이 떨어지고, 어느 날 경찰의 함정수사에 걸려 체포된다. 돌아온 사무실에 여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여자와 남자의 말을 반씩 믿기로 한다. 사방이 꽉 막힌 지하실에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고, '나'는 한 여자를 기다리고 있다. 바람이 분다.

 

o 빈 수레 끄는 언덕 - 김한수


'나'는 시장통에서 조그만 식당을 아내와 꾸려간다. 앞집의 보신탕집 보배네의 남편은 반 날건달에 가부장적인 인물로 보배네를 쥐잡듯 잡아대고, 시어머니와 시댁 식구들은 보배네가 탄 곗돈까지 울궈먹으려는 뻔뻔스런 인물들이다. 그런 보배네가 동네에서 열리는 노래자랑에 나가기로 한다. '봄비'를 꾸밈없이 애절하게 부르는 보배네를 시장 사람들은 응원한다. 하지만 일년동안 밀린 가게세를 내기 위해 탄 곗돈을 시댁식구들이 빼앗아 가고 보배네는 노래자랑 무대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다가, 무대가 아닌 건물 옥상에서 위태롭게 '봄비'를 부른다.

 

o 소설 쓰는 인간 - 성석제

 

'나'는 세상에 잘못 알려진 우리 세계를 바로 알리고자 한다. 우리 세계는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졌는데 춤, 춤방, 남자, 여자가 바로 그것이다. 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동창을 통해서였는데, 동창은 고급 승용차에 기사까지 갖추고서 나를 만나러 왔다. 나중에 알고보니 동창은 '제비'였고, 돈도 벌었지만 쇠고랑도 찬다. 하지만 '나'는 춤 자체에 매료되었기에 호주머니에 호두알을 넣은 채 사모님들 허벅지나 슬슬 문질러주는 따위 일에 섣불리 뛰어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결국 '나'도 '왕제비' 쯤이 되어 돈을 갈취하지 않았다 뿐이지 사모님들 호주머니를 우려내긴 마찬가지였고, 그 바닥에 진력이 나서 변두리 춤방만 골라 다니며 춤을 즐기려할 때 즈음 해서는 초보 꽃뱀에게 도리어 당하기도 한다.

이제 일선에서 물러난 '나'는 소설을 쓰려 한다. 지금껏 여자들을 최선을 다해 상대해 왔듯 소설을 상대하는 데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o 강 어귀에 섬 하나(처용 환상) - 이인성


화자인 '나'는 언젠가부터 해질녘이면 '그' 집으로 간다. 강 어귀에 있는 그 집으로 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어떤 감각의 방향으로부터 기인하는 이유 때문이다. 그 집은 해마다 층수가 올라가는데 층 중간이 비어있기도 하다. 그집에는 한 여성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 가서 '나'가 '나'로 구분되지 않는 것을 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애당초 '나'는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느 날 '나'를 처용이라 칭하고, 자신은 만희(滿喜)라 칭한다. 그러면서 이는 천백 년 전의 일이므로 언젠가는 기억날 것이라 하며 '내'가 바다로부터 왔다고 했다. 그녀의 몸에는 뱀 무늬가 얽어두르고 있었는데 그 뱀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오기도 했다.

그녀가 종이로 만든 탈을 내 얼굴에 붙이고 이 과정을 반복한다. 현관에 벗어놓은 신발이 없어지고, '나'는 신열에 들뜨게 된다. 이를 여자는 무병이라면서 열병 고쳐줄 무당을 찾아보라고 한다. 각종 탈을 쓴 자들과 춤판을 벌이는데, 춤판은 곧 짝짓기의 욕정적인 사위로 변해가고 그녀 역시 탈들과 엉겨 짝짓기를 해댄다. 그 집의 방은 아메바가 세포분열 하듯 계속 늘어만 간다.

그녀는 '내'가 나타났기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고, '나' 때문에 자신이 써오던 탈을 벗어던진 후 없어져버린 얼굴이 살아나길 기다린다고 했다. 그리고 이때까지 써오던 탈들을 위한 마지막 난장을 펼쳐 주는 것이라 했다.

이름이 없고 싶어 만났으나 거꾸로 이름을 붙여 놓고 그 이름의 탈을 만드는 행위, 어쩌면 그것이 이름을 지우는 길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이름이 붙어 있지만 나중엔 그것이 이름이 붙여진 탈에 불과할 것이므로 탈을 벗으면 이름도 내던져지는 것이다.

이제 아무것도 없었고, 그 집에 다시 갈 수 없을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발 밑에 왠 새알 하나가 떨어져 있음을 '나'는 본다. 


o 가을빛 - 이혜경

 

매년 나름의 '앓이'를 하며 가을을 건너는 남편과 결혼한 선희는 아이를 낳은지 얼마 되지 않아 젖몸살 중이다. 북에서 내려와 믿을 건 몸뚱이밖에 없다고 생각해 몸에 좋은 음식은 가리지 않고 먹으며 가족을 건사하던 아버지는 폐암에 걸려 임종을 남겨두고 있다. 선희는 나날이 쪼그라드는 얼굴로 잠에 빠져든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아버지가 죽음을 수락할 만큼만 시간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티벳 사자의 서>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저승으로 향한 길에는 밝은 빌과 그 밝은 빛으로 가는 길을 헤뜨리기 위한 불순한 빛이 있다는 그 구절. 그리고 아버지가 밝은 빛을 따라가기를 바란다. 불어오는 바람은 아버지의 숨결을 몰아 이르는 곳은 어둡지만 따뜻한 자궁이며, 어쩌면 막 비워 버린 내 몸에 깃들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o 밤의 나선형 계단 - 전경린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아파트, 아이를 살뜰히 돌볼 여력이 없는 이웃, 한때 참치캔을 먹였지만 이제는 다시 내다버려야 할 고양이 메메, IMF와 아빠의 실직, 그리고 늘어나는 빚.

남루한 삶에서 탈출할 것을 꿈꾸는 엄마는 어디엔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자신의 생년과 월을 비밀번호로 하는 트렁크를 이미 싸 두었다. 여자애는 어느 날 트랑크를 끌고 나가 죄다 강에다 버린 후 빈 트렁크 안에 고양이 메메를 넣고 자물쇠를 채운 후 강에 버린다. 그날 엄마가 집을 나갔고, 학교에 지각한 여자애는 선생님에게 늦은 이유에 대해 그럴싸한 이유를 댄다. 그리고 엄마가 없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마음 속으로 천천히 세어 보고, 무심한 척할 수 있는 자신을 상상해 본다. 먼 훗날 여자애는 자라서 마술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연히 엄마의 집에 찾아가 마술을 보여주고 트렁크에서 메메를 꺼내 살려낼 것이다. 

 

o 태풍이 오는 계절 - 전성태

 

'나'의 어미는 당골이다. 그런데 주변에서 놀려대는 말은 '반정부 족쇡들' 이니, 박정희가 새마을운동 한다고 초가를 뒤엎을 때 당골인 어머니가 업구렁이 사는 지붕을 절대로 엎지 않겠다고 하자 공무원이 나와서 차마 당골 건드렸다가 해 입을까 저어되어 어쩌지는 못하고 '순 반정부 인사가 처박혔다'고 욕하고 간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나'는 고등학교 때야 남들보다 먼저 가출해서 서울 구경도 했지만 현재는 일정한 직업 없이 고향마을을 '지키면서' 허송세월을 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해도 돌아온 싱글 봉자와 로맨스를 키웠으나, 봉자 아버지가 '당골 아들한테 시집 가서 팔자 펴는 것'에 극구 반대하는 사이 봉자가 본 남편을 따라가버린 직후에 간통으로 걸려들어간 통에 현재는 한 가지 일에만 골몰해 있다. 그것은 바로 다가올 태풍에 집을 넘어뜨리는 일이다. 태풍에 집이 완파되면 정부에서 일금 천이백만원을 준다니 써금써금한 집 넘어갔다고 크게 의심받을 일도 없으리라 짐작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태풍이 몰아친 날, 어째 비바람이 시원찮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날 함마로 집을 작살내 넘어뜨린다. 다음 날, 태풍이 일본으로 비껴가 그 위력이 애초 예상의 몇분지 일에 불과해 길바닥에 널린 개똥마저 그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전국에 넘어간 집은 우리 집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사뭇 낭패감에 사로잡힌다.

 

o 양파 - 하성란

 

유치원 교사인 여자는 병원 벤치에서 자신이 신생아를 깔고 앉아 사망에 이르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망친다. 도망치다 지쳐 문 닫기 직전의 횟집에 들어간다. 주방장이 회를 뜨고 난 생선 입에 혀가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여자는 손을 내젓다가 칼을 쳐 주방장의 얼굴과 발등에 상처를 입힌다. 주방장은 얼굴을 꿰메고 발에 석고 붕대를 한다. 손님이 들지 않은지 오래였기에 주방장은 가게를 관둔다. 사장은 말리지 않는다. 여자와 사내가 함께 동해 쪽으로 이동한다. 여자는 자신이 죽게 한 신생아가 어떻게 되었는지 병원에 전화를 건다. 병원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고 대답한다. 밤중에 입간판에 그려진 도로를 사내가 진짜 도로로 착각해 돌진한다. 둘이 사망한다. 

경찰은 트럭에서 나온 회칼, 여자가 자신을 쫓아오는 것으로 생각해 적어둔 차량 넘버, 깁스를 한 발에 맞는 유일한 신발인 욕실 실내화 등 기이한 물건들을 보고 사건의 냄새를 맡는다.

 

o 내 마음의 석양 - 함정임


남편이 죽고 나서 남편의 친구, 시어머니, 친언니, 그리고 오빠가 나를 각자의 방식으로 위로한다. 

 

o 손님 - 이윤기 


누나가 만들어준 대님을 차고 학교에 다녀온 아이는 대님 한짝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나머지 한짝을 바다에 내버린다. 하지만 누나는 대님 한짝을 어디선가 찾아온다. 아이는 바다에 버린 대님 한짝을 다시 찾아오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날은 아이들의 엄마 제삿날이었다.

그날 비단장수가 갓난 아이를 안고 아이들의 집에 묵어가길 청한다. 여자아이는 비단장수에게서 대님 만들 천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여 반긴다. 아버지는 비단장수 여자를 재우겠다고 했을 때 잘했다는 말뿐, 나와보지 않는다.

어두운 방 안에서 아버지는 옛 시절을 생각한다. 젊고 튼튼했을 때, 사내는 처녀의 집에 때로 찾아가 소주와 생선을 건내주었다. 처녀의 아버지가 어느 날인가, 바다에 갔다 오면 딸을 주겠다고 했다. 사내는 그 말을 믿고 바다에 갔다 온다. 선주와 선주 아들이 바다에서 돌아온 어부들을 맞아주었다. 사내는 그날따라 선주 아들의 악력이 심술궂게 느껴진다. 사내가 바다에 나간 사이 처녀의 아비가 약속을 깨고 처녀를 선주 아들의 첩으로 보냈음을 안 사내는 고향을 떠나 타관에 자리 잡고 장가도 간다. 아이 둘을 낳아준 아내는 곧 죽는다. 

그리고 아내의 제삿날, 선주의 첩이 된 처녀가 비단장수가 되어 자신의 집에 든다. 

그 날 그 집에 한 손님이 두 얼굴을 하고, 혹은 두 손님이 한 얼굴을 하고 찾아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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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공선옥의 <타관 사람>과 전성태의 <태풍이 오는 계절>이다. 수상작인 <숨은 그림 찾기1 - 직선과 곡선>이 나쁘진 않지만 마음을 끌지는 않는다. 대신에 <타관 사람>의 순임은 마음에 남는다. 사내와 아이에게 밥을 해주고, 더운 방을 내주고, 커다란 젖가슴으로 머리를 안아주는 순임과 같은 여자들이 있다. 사내들은 그런 순임에게서 취할 것만 취하고 도망간다. 그녀는 점점 더 커지고, 사내들은 점점 더 옹졸해질 것이다. <태풍이 오는 계절>은 김유정과 이문구를 생각나게 한다. 태풍이 불면 집을 무너뜨려 눈먼 정부돈을 먹어보려 했는데 태풍이 형편없이 약해진 것을 모르고 집만 무너뜨렸다가 곤경에 처하게 된 이야기이다. 바둑에 진 분풀이로 풋배를 따내 주인공을 용의자로 만드는 대목도 재밌다. 

이혜경의 <가을빛>은 다분히 작위적이고, 하성란의 <양파>는 개연성이 부족한 에피소드에 그치고 있다. 함정임의 <내 마음의 석양> 역시 지극히 개인적인 소품을 대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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