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
김연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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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그린비의 상상>의 화자는 소설가다. 화자는 매우 현실적인 거리를 걷고 있다. 지나가는 거리의 상점 간판을 세밀하게 나열하는 수법 때문에 독자는 90년대 중반의 한 거리를 화자와 함께 걷고 있다는 착각을 할지도 모른다. 끊임 없이 비가 내리는 어두운 거리를 화자와 함께 걸으면서, 우리는 화자가 상상하는 소설 스토리 속으로 들어간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임의 피아노 학원 원장, 이혼하고 소설을 쓰는 남자, 말을 더듬는 단신의 슬지라는 여자. 남자는 아름다운 피아노 학원 원장을 떠난 후 불구의 슬지와 관계를 맺는다. 불임의 아름다운 여성과 소설 쓰는 불구의 여성을 대비시킨 점은 낯간지럽다. 

<심판>은 주인공이 오손 웰스의 영화를 보다가 잠들어 꾼 꿈 이야기이다. 이 소설에서도 화자의 직업은 소설가로 유추될 수 있는데, 가나다 순으로 정렬되지 않은 국어사전이 소지품으로 나온다. 그녀는 세금을 자동이체 해두었기 때문에 고지서를 받을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날 한 통의 고지서를 받는다. 재판에 피고인으로 앉게 된 화자에게 T/F 식 질문을 끊임 없이 던져댄다. 

<미성년>은 '현선이라는 소설 쓰는 학생과 자세히 보면 한쪽 다리를 저는 교수 지훈에 관해' 소설을 쓰는 이야기이다. 역시 소설가를 화자로 상정하고, 그 소설가가 쓴 소설에 대한 자기 비평을 가하고 있다. 

<배반>은 '호랑이가 닭에게 잡아먹힌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하얀 공간 속에 호랑이와 닭이 평화롭게 공존하다가, 어느 순간 호랑이가 이계의 공간에서 욕망할 대상들을 새로이 알게 된 후 겪게 되는 기이한 이야기이다.

그 밖에 헤어진 연인을 자취방이라는 공간에서 기다리는 동안 느끼는 병적 정신상태를 불안한 필치로 그린 <기다림>,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추측되는 <은유희>, 있음과 없음의 경계에 대해 '낙태'라는 사건을 통해 이야기한 <아이, 이미지의 장례식>, 대학 졸업식에 참석한 여자를 스토킹하는 남자(혹은 사물, 또는 그 무엇도 아닌)에 대해 묘사하는 <세레모니>가 실려 있다.

 

김연경의 소설집 <미성년>에 수록된 작품들은 소설가의 자기 분열 양상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김연경은 에고이즘의 방패를 둘러치고 있다. 자신의 소설이 비평가들에게 난도질 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소설이 타인에게 비평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두려워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소설의 화자는 소설을 쓴다. 그들이 소설을 쓰는 과정을 묘사하고, 이런 저런 이유를 붙이고, 화자가 스스로 소설을 비평한다. 완벽하다. 그러나 그 완벽성은 소설 속에서 완벽할 뿐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김연경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 겪지 못한 것들에 대해 일체 함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역시 에고이즘의 발로로 보인다. 소설은 지극히 제한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전개된다. 

낙태에 관련한 이야기들이 흥미롭다. 어떤 가치판단이나 죄의식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도 여러차례 다루어진다는 점이 그렇다. <피아노, 그린비의 상상>, <심판>, <아이, 이미지의 장례식>에서 다루어지는데, 먼저 <심판>에서 판사는 피고인에게 낙태한 사실에 대해 죄를 물으며 T/F식 질문을 던져댄다. 피고인은 이를 부당하다고 느낀다. <아이, 이미지의 장례식>에서는 화자가 착상되었다가 칼에 난도질 당해 떨어져 나간 수정체이다. 그런데 수정체는 자신이 이미 죽어버렸다면서, 사실은 죽지 않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낙태라는 사건에 대한 혼란을 소설 쓰기를 통해 정리하려는 시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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