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 에비타 1
토마스 엘로이 마르티네즈 지음, 권미선 옮김 / 자작나무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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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에 라디오에서 Don't Cry For Me Argentina 라는 노래가 종종 흘러 나왔다. 에비타가 누구인지도 몰랐을 정도로 어린 나이였다. 누구에게 물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에비타가 누구냐고 물어봤더니 '육영수 여사' 와 비슷한 사람이라고 답해주었다. 당시엔 육영수도 누구인지 잘 몰랐다. 

대학에 입학해서 남미 혁명사 책을 읽다가 페론의 이름을 접하게 된다. 페론은 민중주의의 비극적 결말을 상징하는 인물로 쓰여 있었다. 페론주의의 비극은 '하층민을 대상화'한 필연적 결과라는 것이다. 에비타가 페론의 배우자라는 사실을 그 때 처음 알았다.

 

후안 페론은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1943년에 보수 성향인 라몬 카스티요 대통령에 반대한 쿠데타(시각에 따라 혁명으로 보기도 한다)를 통해 정치권에 뛰어 든 인물이다. 페론은 에비타(에바 두아르테)를 1944년 산 후안 지진 구호 활동에서 만나게 된다. 당시 에비타는 페론에게 "당신이 존재하는 것에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하여 깊은 인상을 남긴다. 1945년 둘이 결혼한 직후 페론은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경계한 군부 내부 세력에 의해 체포되지만 대중들의 강력한 반발로 풀려난다. 페론은 노동자계급과 하층민의 절대적 지지를 등에 업고 CGT(대규모 노동조합, 후에 노동부가 된다)를 조직하고 정권을 장악한다. 1952년 페론은 연임에 성공하지만, 에비타는 1952년 7월 26일 자궁암으로 사망한다.

페론은1955년 9월 군부쿠데타로 실각한 후 파나마와 스페인 등지로 망명을 떠나 재기를 노리다가 1973년에 또 다시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취임하지만 이듬 해 병사한다.

 

<산타 에비타>는 에비타의 사망과 그녀의 시신을 둘러싼 이야기를 추적하는 르뽀르타주 형식으로 구성된 이야기이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소설적 허구인지는 알 수 없다.

 

에비타는 사생아의 딸로 태어나 15살이 되던 해에 당시 인기 가수 마갈디를 따라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간다. 마갈디의 후광으로 라디오 데뷔를 꿈꿨지만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마갈디에게 버림받은 후 그의 친구 카리뇨의 재정적 후원을 잠시 받았고, 어찌어찌 라디오 연속극 등에 출연한 후 영화에도 출연하지만 연기는 신통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에비타는 지독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야심이 컸고, 그런 이유로 돈이 많은 유부남도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기꺼이 몸을 내맡기는 부류로 보인다. 그녀는 이 시기에 유부남의 아이를 베었고, 낙태수술 후유증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된다.

1944년 산 후안 지진 구호 활동에서 페론을 만난 에비타는 그를 유혹하는데 성공하여 퍼스트 레이디가 된다. 예전의 촌스러움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고 자선단체들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재조직하여 하층민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 성녀의 이미지를 구축한다. 그녀의 정치적 본능은 페론을 능가하였고, 하층민들은 페론이 아니라 에비타를 지지하게 된다. 그녀는 하층민들에게 있어 희망의 아이콘이었다.

페론은 이러한 에비타의 이미지가 부담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에비타는 부통령이 되고 싶어 했으나 페론은 이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사건 직후 에비타는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어 1952년 사망한다.

 

사망한 에비타를 스페인 출신의 아라 박사가 박제화한다. 그런데 CGT 건물에 보관된 에비타의 박제화된 시신이 곤란한 상황을 발생시킨다. 박제가 된 에비타가 신격화 되어 하층 페로니스트들 사이에 성녀가 되버린 것이다. 페론은 실각하기 전까지 자신의 이미지를 갉아 먹는 에비타를 보려하지 않았고, 페론 반대파들은 박제화된 그녀의 시신을 어디론가 치워버리고 싶어했다.

페론을 실각시킨 군부는 즉시 에비타의 시신을 처리하고싶어했다. 페로니스트들이 에비타의 시신을 손에 넣으면 하층 계급들이 결집할 계기가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아라 박사는 시신을 자신 소유의 예술품으로 착각하여 기이한 행동을 일삼고, 시신 처분을 맡은 정보부 대령 무리 퀘닉 대령은 에비타를 증오하면서도 그녀를 사랑하는 기이한 집착 상태가 되어 인생을 망치게 된다. 무리 퀘닉 대령의 부하 중 한 명은 에비타의 시신 때문에 자신의 아내를 살해하기까지 한다.

 

에비타 이야기는 지금도 끊임 없이 재생산 되고 있다. 그녀는 창녀부터 성녀까지 다양한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기억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에비타가 '육영수와 닮았다'는 이야기를 생각해본다. 남아 있는 육영수의 자료 사진들 대부분은 고아원이나 학교를 방문하고 있는 것들이다. 박정희가 평화시장 노동자의 폐를 쥐어짜내며 고도 경제 성장을 외치는 한편 육영수가 고아원 시설을 돌며 '국모'의 역할 연기를 훌륭하게 해낸다. 에비타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안전판 역할은 해낸 것으로 보인다.

다만 페론과 에비타의 정치적 기반이 결말은 어쨌든간에 노동자계급과 하층민이었다면 박정희 육영수의 정치적 기반은 그렇지 못했다. 그 점이 어쩌면 가장 중요한 차이인지도 모른다.

http://blog.naver.com/rainsky94/220145846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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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의 대가 열린책들 세계문학 78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김수진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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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스페인은 정치적 혼란기를 겪고 있었다. 왕권이 약화되어 여왕을 폐위시키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었고 공화주의자들은 공공연히 혁명을 외쳐대고 있었다.

주인공 하이메 아스타를로아는 이러한 격변의 시대에서 한 걸음 떨어져 검술을 가르치는 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그는 유행이 지난 사람이었다. 검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예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는데, 총이 보급된 후 검은 살상 능력 면에서 효율이 떨어지는 무기 취급을 받았고 명예를 걸고 검으로 대결하는 결투 역시 사라진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하이메의 집으로 아델라 데 오테로라는 아름다운 여성이 찾아와 검술 사사를 부탁한다. 하이메는 검술이 남자들의 세계에 속했다고 여기는 약간 고지식한 사람이었기에 내켜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열성으로 부탁했고 검술 실력 역시 수준 이상이었기에 검술 지도를 수락하고 만다.

하이메는 그녀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과정에서그녀를 향한 자신의 열정을 감지하고 당혹스러워한다. 늦은 나이에 찾아든 그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하이메는 '200 에스쿠도' 라는 필살의 검법까지 그녀에게 전수한다.

그 즈음 아델라가 하이메로부터 검술 지도를 받는 귀족 루이스 데 아얄라와 친분을 맺게 된다. 둘은 곧 거리에 소문을 뿌려대며 함께하기 시작했다. 아델라는 더 이상 하이메에게 검술을 배우러 오지 않는다.

 

얼마 후, 루이스 데 아얄라가 목을 찔린 시체로 발견된다. 200 에스쿠도 수법에 당한 것으로 보였다. 하이메는 루이스 데 아얄라가 아델라에게 당한 것이 틀림 없다고 생각하여 당황하지만, 그녀 역시 얼굴이 으깨어진 처참한 시체로 발견된다. 하이메는 죽기 전 루이스 데 아얄라가 자신에게 맡긴 서류가 사건과 관련이 있다 생각하여 검토해보지만 정치적인 편지들 속에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이메는 급진을 표방하며 혁명적 발언을 일삼던 친구 카르셀레스에게 서류의 의미를 파악해달라고 부탁하는데 그 역시 얼마 후 시체로 발견되고 만다.

 

범인들이 자신을 노릴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한 하이메는 명예롭게 싸우다 죽기로 각오하고 모든 준비를 마친 채 자신의 집에서 침입자들을 기다린다. 마침내 나타난 침입자는 놀랍게도 시체로 발견된 아델라 데 오테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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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져가는 것들은 늘 안타깝고 애처롭다. 그것들은 자기 수양의 이미지와 어울린다. 새로운 것들은 체득해야 하는 것들이지만, 스러져가기 직전의 것들은 역사의 마무리를 위한 내적 성찰을 준비한다.

그래서 일본 사무라이 이야기들은 용도 폐기된 '신선조'들의 이야기를 거듭 소재로 사용한다. 총 앞에서 달려드는 신선조들의 이야기를 정치적 관점에서 다룬 소설은 거의 없다.

<검의 대가>의 하이메 아스타를로아 역시 이미 한 물 간 검술을 부여잡고 있다. 권총으로 원거리에서 '빵' 하면 지푸라기 처럼 쓰러져버리는 시대에 검술의 요체를 제자들에게 설명하며 명예와 긍지를 이야기하는 하이메 아스타를로아를 통해 작가는 내면의 성찰과 평화, 명예와 긍지야 말로 혼동의 시대를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이라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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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빌라 공주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7
E.T.A. 호프만 지음, 곽정연 옮김 / 책세상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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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는 <야콥 칼로를 따른 카프리치오>이다. 야콥 칼로(자크 칼로, Jacques Callot)는 17세기 초반에 활동하던 판화가이고, 카프리치오는 이탈리아 말로 '변덕스러움'을 뜻하는데 음악에서는 기상곡이나 광상곡이라는 우리말로 번역된다.

호프만이 생일 선물로 칼로의 <광인들의 춤 Balli di Sfessania>이라는 제목이 붙은 스물네 장의 동판화를 보고 떠오른 영감을 기술한 이 책을 호프만은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동화'로 보아달라고 독자에게 요청한다. 그러나 낭만주의의 주요 주제인 환상과 현실의 긴장 관계, 존재의 이원성, 반어, 알레고리, 해학에 대한 환상적이고 기묘한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호프만의 작품 중에서도 난해한 편에 속한다.

 

소설은 배경은 이탈리아이고 배경은 사육제 기간이다. 

그저 그런 배우 지글리오는 재단 보조사 지아친타의 연인인데 사육제 기간 동안 성대한 행렬이 피스토야 궁전으로 들어가는 광경을 보게 된다. 지글리오는 이 화려한 행렬의 중심에 있는 이집트 공주 브람빌라에게 한 눈에 반하게 된다. 자칭 '현명하고 경험 많은 철학자이자 연금술사'인 첼리오나티가 지글리오의 환상을 부추기자 그는 자신이 브람빌라 공주가 사랑하는 키아페리 왕자라고 믿게 되는 분열 상태가 되고 만다. 

환상에 눈이 먼 지글리오는 극단에서 쫓겨나 빈털털이가 되고 뒤늦게 지아친타에게 돌아가려 하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지아친타 역시 지글리오와 같은 환상에 사로잡힌 것이다. 

지글리오는 지아친타와 브람빌라 공주 사이에서 끊임 없이 진동한다. 하지만 브람빌라 공주를 만날 수 없고 지아친타라는 현실로 되돌아와야 하는 운명이다. 브람빌라 공주는 마치 카프카의 '성'과 같이 다다를 수 없는 곳을 상징하는 것 같다.

지글리오는 환상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키아페리 왕자와 결투하여 승리한다. 키아페리 왕자는 지글리오의 또 다른 자아로 지글리오는 이제 키아페리 왕자가 된 듯 하다. 하지만 정작 키아페리 왕자는 지글리오를 부정하기 때문에 분열 상태는 계속된다. 키아페리 왕자가 우르다르 샘물을 들여보고 존재의 이원성을 인정하고 웃는 것으로 왕자와 지글리오는 비로소 분열을 해소하게 된다.

 

호프만은 판타지와 해학적 인식이라는 두 가지 틀을 가지고 작품을 완성시켜 나가는데 판타지가 인간의 무한한 정신 세계를 열어주어 예술의 바탕을 마련하는 축이라면, 해학적 인식은 판타지가 목표를 잃고 떠돌면서 현실과의 연관성을 잃는 것을 막아주는 장치이다.

 

사법고시에서 합격하여 정부 관리로 인생을 출발한 호프만은 정부와 끊임 없이 불화했고, 음악 감독과 평론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1822년 46세에 경찰청장을 풍자한 <벼룩 대왕> 때문에 징계 처분 심사를 받던 중 척수 결핵으로 몸이 마비되어 사망한다.

도스토예프스키, 고골, 발자크, 보들레르, 포, 디킨스 같은 작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음악계에서도 바그너의 <뉘른베르크 명가수>가 <세라피온 형제들>에서 영감을 받았고, 자크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파울 힌데미트의 <카르딜락크> 등이 호프만의 작품에서 차용하거나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음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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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의 잭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한성례 옮김 / 씨엘북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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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게쓰 고원 스키장에 날아온 한 통의 협박 협박 메일. 스키장을 지구 온난화의 주범으로 몰아 붙인 협박범은 스키장 어딘가에 폭탄을 설치했다며 돈을 요구한다.

로프웨이 사업본부의 실무 책임자 쿠라타는 당장 경찰에 알리고 고객의 안전을 확보하자고 주장하지만 경영진의 생각은 달랐다. 경찰에 알리는 순간 스키장의 이미지가 실추되고, 이로 인한 손실은 협박범이 요구한 돈과 비교할 수 없는 규모가 될 것이라는 논리였다.

결국 스키장측은 협박범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으로 결론이 나고, 3천만엔을 범인들에게 인도한다. 하지만 경영진의 생각대로 문제는 간단하지가 않았다. 범인의 요구가 2차, 3차로 계속된 것이다.

 

규칙을 지키지 않은 스노보더들 때문에 아내를 잃은 이리에 부자, 그 사건 때문에 구역이 폐쇄되자 경제적 타격을 입은 마을 주민들, 스위트룸에 머무는 노부부, 그리고 대회 출전을 위해 신게쓰 고원 스키장 주변에 아르바이트를 잡고 틀어박힌 치아키 등이 사건에 점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사실 이렇다할 긴장이 느껴지지 않는다. 스키장을 폭파시키는 것이 범인에게 유리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은 작가도 밝히고 있는 바이기 때문이다.

소설 중반쯤 이르면 범인이 누구일 것인지도 대충 짐작이 간다. 이리에 부자가 용의선상에 오른 것은 너무 뻔한 트릭이고, 겨우 수지를 맞춰가는 회사가 이미지 실추를 우려하며 1억 1천만엔을 내놓는 것이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http://blog.naver.com/rainsky94/220137531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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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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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사라진 사람들과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함께 했던 완벽했던 순간이 스치듯 지나가고, 살아남은 자들은 슬픔을 곱씹으며 서로에게 상처 주리라는 예감 속에 괴로워하다 헤어진다. 명서로부터 팔 년 만에 걸려온 전화는 정윤을 과거로, 과거로 이끌어간다.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신 후 정윤은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휴학한 후 고향으로 돌아간다. 아버지와의 생활은 서로에 대한 침묵의 배려로 점철된다. 다시 돌아온 학교는 시위로 어수선했다. 그곳에서 정윤은 윤교수의 강의를 들었고, 명서와 미루를 알게 된다.

명서와 미루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다. 미루의 손에는 화상 자국이 있었다. 미루의 언니 미래는 원래 발레리나를 꿈꾸었는데, 미루가 함부로 던진 송곳 때문에 무릎에 큰 상처를 입은 후 꿈을 접는다. 대학에 들어간 미래는 운동하는 청년을 만나 사귀게 된다. 그를 집으로 초대한 날, 그가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과 택시를 타는 것을 누군가 보았다고 했는데 그 날 이후로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미래는 그를 찾아 나섰고, 실종되어 죽거나 사라진 많은 사람들에 대해 알게 된다. 그의 실종을 규탄하는 집회 현장 옆 빌딩 옥상에서 미래는 온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채 뛰어내린다. 미래를 구하기 위해 미루가 손을 내밀었지만 미래는 뿌리치고 떨어지고 만다. 미루의 손에 난 상처는 이 사건으로 생긴 것이었다. 미루는 그 날 이후 언니를 대신에 그를 찾아 돌아다닌다.

셋은 잠시나마 함께 하며 완벽에 가까운 시간을 보낸다. 정윤과 명서가 사귀게 되고, 미루는 양심적인 학자 윤교수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리고 그 완벽에 가까운 순간에 정윤의 어릴적 동무 단이가 함께 한다. 군대에 가기 전 며칠을 단이는 이들과 함께 지낸다. 특전사로 차출된 단이는 고참의 구타로 허리에 상처를 입은 후 일반 부대로 재배치 받는다. 외로움과 쓸쓸함에 시달리던 단이가 면회 온 정윤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정윤은 단이를 밀어낸다. 얼마 후 단이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석연치 않은 총기 사고였지만 군은 단이의 죽음을 자살로 처리한다. 미루 역시 언니가 무릎을 다쳤던 외할머니 집에서 혼자 기거하다 거식증으로 죽고 만다.

 

어릴 적 동무를 잃은 명서와 정윤은 거리 한복판에서 과거 완벽했던 순간을 앗긴 설움을 극복하고자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명서는 술에 취해 자신이 어딘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정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정윤은 그런 명서를 찾아 나선다. 때로는 명서를 찾아냈고, 때로는 만나지 못했다. 정윤은 망가져가는 명서에게 함께 지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한다. 명서는 그러겠노라고 말하지만 그 약속은 번번히 깨어진다. 그리고 둘은 헤어진다.

 

팔 년 만의 전화를 받은 정윤이 윤교수의 임종을 보기 위해 병원으로 가고, 그곳에서 명서 등과 만난다. 윤교수는 제자들의 손에 글씨를 쓴 후 임종을 맞는다. 윤교수는 모두의 손에 문장을 하나씩 썼는데 이어보니 다음과 같았다.

 

나의 크리스토프들, 함께해주어 고마웠네. 슬퍼하지 말게. 모든 것엔 끝이 찾아오지. 젊음도 고통도 열정도 공허도 전쟁도 폭력도. 꽃이 피면 지지 않나. 나도 발생했으니 소멸하는 것이네. 하늘을 올려다보게. 거기엔 별이 있어. 별은 우리가 바라볼 때도 잊고 있을 때도 죽은 뒤에도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을걸세. 한 사람 한 사람 이 세상의 단 하나의 별빛들이 되게.

 

언젠가 윤교수는 크리스토프 이야기를 했었다. 기골이 장대한 크리스토프가 어느 날 밤 어린 아이를 등에 업고 강을 건네주게 되었다. 그런데 어린 아이가 점점 무거워지더니 힘이 세고 담력이 좋은 크리스토프 마저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 된다. 겨우겨우 강 건너편으로 아이를 건네주고 함숨을 쉰 크리스토프는 어린아이에게 마치 이 세상 전체를 어깨에 짊어지는 줄 알았다고 말한다. 그러자 아이가 사라지고 눈부신 빛에 둘러싸인 예수가 나타나 말한다. "크리스토프! 그대가 방금 짊어진 건 어린아이가 아니라 바로 나, 그리스도다. 그러니 그대는 저 강물을 건널 때 사실은 이 세상 전체를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라고.

 

얼마 후 사촌언니의 딸이 다니는 학교에 초청된 정윤이 윤교수가 언젠가 들려 준 크리스토프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리는 크리스토프이기도 하고, 그의 등에 업힌 아이이기도 하다는 이야기를 덧붙여서.

 

신경숙 소설을 읽으면 언제나 "자애로운 어머니와 무뚝뚝하지만 침묵으로 애정을 전하는 아버지, 그리고 고향에서 떠난 화자가 지내는 고독한 한 칸짜리 방" 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고향을 떠난 화자의 관계 맺기 양상은 "신발코로 땅을 툭툭 치는" 식이다. 적극적으로 붙잡지 않으면서도 안으로 웅숭그리며 외로움은 응시한다.

<어디선가...>는 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 사실 신경숙은 사회 문제에 적극적인 발언을 해오던 작가는 아니다. 개인의 영역에서 외로움과 치유에 관해 이야기하던 작가가 의문사와 실종사 문제를 다루었다는 것이 약간 뜻밖이었다. 

고통과 치유의 문제가 개인적인 영역으로 환원되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등장인물들의 아픔을 가만히 응시하는 모습이 느껴져서 좋았다. 아파하며 쓴 소설이라는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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