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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소설은 사라진 사람들과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함께 했던 완벽했던 순간이 스치듯 지나가고, 살아남은 자들은 슬픔을 곱씹으며 서로에게 상처 주리라는 예감 속에 괴로워하다 헤어진다. 명서로부터 팔 년 만에 걸려온 전화는 정윤을 과거로, 과거로 이끌어간다.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신 후 정윤은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휴학한 후 고향으로 돌아간다. 아버지와의 생활은 서로에 대한 침묵의 배려로 점철된다. 다시 돌아온 학교는 시위로 어수선했다. 그곳에서 정윤은 윤교수의 강의를 들었고, 명서와 미루를 알게 된다.
명서와 미루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다. 미루의 손에는 화상 자국이 있었다. 미루의 언니 미래는 원래 발레리나를 꿈꾸었는데, 미루가 함부로 던진 송곳 때문에 무릎에 큰 상처를 입은 후 꿈을 접는다. 대학에 들어간 미래는 운동하는 청년을 만나 사귀게 된다. 그를 집으로 초대한 날, 그가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과 택시를 타는 것을 누군가 보았다고 했는데 그 날 이후로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미래는 그를 찾아 나섰고, 실종되어 죽거나 사라진 많은 사람들에 대해 알게 된다. 그의 실종을 규탄하는 집회 현장 옆 빌딩 옥상에서 미래는 온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채 뛰어내린다. 미래를 구하기 위해 미루가 손을 내밀었지만 미래는 뿌리치고 떨어지고 만다. 미루의 손에 난 상처는 이 사건으로 생긴 것이었다. 미루는 그 날 이후 언니를 대신에 그를 찾아 돌아다닌다.
셋은 잠시나마 함께 하며 완벽에 가까운 시간을 보낸다. 정윤과 명서가 사귀게 되고, 미루는 양심적인 학자 윤교수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리고 그 완벽에 가까운 순간에 정윤의 어릴적 동무 단이가 함께 한다. 군대에 가기 전 며칠을 단이는 이들과 함께 지낸다. 특전사로 차출된 단이는 고참의 구타로 허리에 상처를 입은 후 일반 부대로 재배치 받는다. 외로움과 쓸쓸함에 시달리던 단이가 면회 온 정윤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정윤은 단이를 밀어낸다. 얼마 후 단이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석연치 않은 총기 사고였지만 군은 단이의 죽음을 자살로 처리한다. 미루 역시 언니가 무릎을 다쳤던 외할머니 집에서 혼자 기거하다 거식증으로 죽고 만다.
어릴 적 동무를 잃은 명서와 정윤은 거리 한복판에서 과거 완벽했던 순간을 앗긴 설움을 극복하고자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명서는 술에 취해 자신이 어딘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정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정윤은 그런 명서를 찾아 나선다. 때로는 명서를 찾아냈고, 때로는 만나지 못했다. 정윤은 망가져가는 명서에게 함께 지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한다. 명서는 그러겠노라고 말하지만 그 약속은 번번히 깨어진다. 그리고 둘은 헤어진다.
팔 년 만의 전화를 받은 정윤이 윤교수의 임종을 보기 위해 병원으로 가고, 그곳에서 명서 등과 만난다. 윤교수는 제자들의 손에 글씨를 쓴 후 임종을 맞는다. 윤교수는 모두의 손에 문장을 하나씩 썼는데 이어보니 다음과 같았다.
나의 크리스토프들, 함께해주어 고마웠네. 슬퍼하지 말게. 모든 것엔 끝이 찾아오지. 젊음도 고통도 열정도 공허도 전쟁도 폭력도. 꽃이 피면 지지 않나. 나도 발생했으니 소멸하는 것이네. 하늘을 올려다보게. 거기엔 별이 있어. 별은 우리가 바라볼 때도 잊고 있을 때도 죽은 뒤에도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을걸세. 한 사람 한 사람 이 세상의 단 하나의 별빛들이 되게.
언젠가 윤교수는 크리스토프 이야기를 했었다. 기골이 장대한 크리스토프가 어느 날 밤 어린 아이를 등에 업고 강을 건네주게 되었다. 그런데 어린 아이가 점점 무거워지더니 힘이 세고 담력이 좋은 크리스토프 마저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 된다. 겨우겨우 강 건너편으로 아이를 건네주고 함숨을 쉰 크리스토프는 어린아이에게 마치 이 세상 전체를 어깨에 짊어지는 줄 알았다고 말한다. 그러자 아이가 사라지고 눈부신 빛에 둘러싸인 예수가 나타나 말한다. "크리스토프! 그대가 방금 짊어진 건 어린아이가 아니라 바로 나, 그리스도다. 그러니 그대는 저 강물을 건널 때 사실은 이 세상 전체를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라고.
얼마 후 사촌언니의 딸이 다니는 학교에 초청된 정윤이 윤교수가 언젠가 들려 준 크리스토프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리는 크리스토프이기도 하고, 그의 등에 업힌 아이이기도 하다는 이야기를 덧붙여서.
신경숙 소설을 읽으면 언제나 "자애로운 어머니와 무뚝뚝하지만 침묵으로 애정을 전하는 아버지, 그리고 고향에서 떠난 화자가 지내는 고독한 한 칸짜리 방" 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고향을 떠난 화자의 관계 맺기 양상은 "신발코로 땅을 툭툭 치는" 식이다. 적극적으로 붙잡지 않으면서도 안으로 웅숭그리며 외로움은 응시한다.
<어디선가...>는 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 사실 신경숙은 사회 문제에 적극적인 발언을 해오던 작가는 아니다. 개인의 영역에서 외로움과 치유에 관해 이야기하던 작가가 의문사와 실종사 문제를 다루었다는 것이 약간 뜻밖이었다.
고통과 치유의 문제가 개인적인 영역으로 환원되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등장인물들의 아픔을 가만히 응시하는 모습이 느껴져서 좋았다. 아파하며 쓴 소설이라는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