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하는 저녁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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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간 사귀어 오던 다케오가 주인공 리카에게 어느날 문득 이사하겠다고 말한다. 이유는 다른 여자에게 반했기 때문이고 그녀와 만난 것은 사흘 전인이라고 한다. 헤어진 후에도 다케오는 리카에게 며칠에 한번씩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다. 어느 날 다케오가 이사간 집에 갔다가 여자의 신발이 있는 것을 본다. 신발 임자의 이름은 하나코, 그녀는 리카의 집을 찾아온다. 무심한 듯 하나코는 리카에게 집세의 반을 낼테니 같이 살자는 제안을 하고, 하나코의 제안에 리카는 어쩔줄을 모른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어서도 하나코는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았고, 둘은 어정쩡한 상태에서 동거를 하기 시작한다.

하나코는 일자리가 없고 낮잠을 자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만화를 보거나 할 뿐이다. 문득 며칠씩 쇼난 등지에 갔다 오기도 하는데, 그럴때면 리카는 하나코를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리카는 자기 남자를 빼앗아간 하나코를 미워할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하나코가 누구에게 소유되지도, 누구를 소유하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어느 날 하나코가 리카에게 꼭 소개시켜주고 싶은 남자가 있다고 하여 나간 자리에서 하나코는 남동생을 소개시켜주고 남동생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얼마 후 리카와 하나코가 다케오와 카츠야, 카츠야의 부인을 피해 쇼난으로 가서 자고 난 다음 날, 하나코는 자살한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다케오의 집으로 간 리카는 강간하듯 다케오와 관계를 맺고 자신도 15개월 전 다케오처럼 "이사할까봐"라고 내뱉는다.

 

모든 사건들은 조용조용 진행된다. 악다구니도 없고, 집착한다면서 하는 행동조차 조용조용하다. 8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함께 한 후 이별을 하면 그런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인지, 아니면 에쿠니 가오리의 세계 속 이별이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점이 맘에 들지 않고,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읽는다. 현실에 없을 법한 인간관계의 '조용조용함'을 느끼고 싶은 때가 가끔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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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달리아 1 ㅣ 밀리언셀러 클럽 53
제임스 엘로이 지음, 이종인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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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드와이트 블라이처트는 라이트 헤비급 권투선수 출신의 경관으로 뻐드렁니 덕분에 버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선수시절 손쉬운 상대를 골라 대전했기 때문에 36전 전승의 기록을 가지고 있고, 군대 징집을 피하기 위해 경찰에 자원한다. 아버지가 나치 혐의를 받게되자 일본인 친구를 밀고하여 퇴학을 면하고 경관이 된다. 

리 블랜처드는 헤비급 권투선수였고 전적은 43승 4무 2패로 1939년 블러바드-시티즌스 은행강도 일당을 검거하는데 혁혁한 전과를 거두어 출세가 보장되었으나 은행털이범 애인과 동거를 하는 통에 발령이 취소되었고 그녀 때문에 권투를 그만두었다는 소문이 있다.

경찰 봉급 인상을 위한 시채 발행의 성공을 위해 버키 블라이처트와 리 블랜처드의 권투 시합이 기획되는데 인파이팅 스타일의 리 블랜처드는 불로, 아웃파이팅 스타일의 버키는 얼음으로 비유되어 초유의 관심을 끈다. 버키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실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이 KO패 되는데 몽땅 돈을 걸고 경기에 임하는데, 막상 시합이 시작되자 자신의 본능에 따라 이기기 위한 경기를 한다.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결과적으로는 8라운드 KO패 당해 많은 돈을 따게 되고, 자신이 가고 싶었던 본부 영장국에 발령을 받게 되어 리 블랜처드와 파트너가 된다.

버키는 리와 동거중인 케이와 만나게 되는데 대화 중 자신과 리는 섹스를 하지 않는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서로 호감을 갖게 된다. 리는 자신의 여동생이 어렸을 적 납치되어 마약중독 상태에서 죽었다는 얘기를 하고 버키는 리가 그 사건으로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리와 버키는 리가 피의자를 협박하고 폭행하면 버키가 어르는 식의 '좋은친구-나쁜친구' 수법을 쓰는 파트너가 되었고 거리에서 존경도 받는다.

리를 영장국으로 불러들인 검사보 엘리스 로가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검찰총장 후보로 출마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강간과 무장강도 및 살인으로 더글러스 '주니어' 내시라는 자의 체포 명령이 떨어진 즈음 리는 정보를 찾았다며 흑인 지역으로 버키를 데리고 가는데 그곳에서 마약 소지범들과 시비 끝에 백인 한 명과 흑인 세 명을 사살한다.

 

1947년 1월 15일, 39번가 노턴 로의 공터에서 한 여성의 시체가 발견된다. 여자의 무릎 뼈는 부러졌고 입은 양 귀까지 찢어져 있었다. 몸은 두 토막으로 분리되어 있고 장기와 자궁이 모두 들어내어져 없었을 뿐 아니라 허벅지는 삼각형 모양으로 깊게 도려내어져 있는 끔찍한 상태였다. 신문기자 한 명이 살해된 여성에게 블랙 다알리아 라는 이름을 붙인다. 리와 버키는 내시 체포조였으나 리가 시체를 본 후 여동생 생각을 떠올리며 개인적인 감정을 개입시켜 블랙 다알리아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하고, 내시가 LA를 떠난 것이 틀림없다는 메모를 제출한다. 며칠 후 시체는 엘리자베스(베티) 앤 쇼트라는 이름의 여성임이 밝혀지고 자신이 범인임을 자백하는 자들이 속출한다. 경찰은 베티의 행적을 조사하여 그녀의 남자 관계가 문란했고, 거짓말장이였으며 어떤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다는 점 등 단편적인 사실들을 알게 된다. 베티와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용의자 레드 멘리는 혐의가 없음이 밝혀지고, 검사보 엘리스 로는 범인이 잡혔을 때 높은 형량을 주어 선거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베티에 관한 더러운 소문과 그에 관련된 증거를 무시하고 가짜 자백범을 만드는 일까지 구상한다.

그러던 어느날 버키는 베티와 관련된 증거를 추적하다가 레즈비언 술집에서 메들렌 스프레이그라는 여성을 알게 되는데 그녀는 베티와 무척 닮은 여자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부동산 재벌인 에멧 스프레이그로 베티와 만난 적이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버키를 집으로 초대하는데 에멧 스프레이그는 부실 자재로 집장사를 하여 재벌이 된 사나이이고 그의 아내 라모나는 약에 중독된 여자였다. 메들렌의 동생 마사는 광고업계에 일하는 상업 아티스트인데 메들렌과 버키가 관계하는 그림을 그려 보여주며 적개심을 나타낸다. 식사 후 버키와 메들렌은 모텔에서 관계를 갖고 버키는 메들렌과 관련된 증거를 상부에 보고하지 않는다.

한편 리가 잡아 넣은 드 위트가 가출옥 한다. 드 위트는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해왔으며 출옥하는 즉시 리를 죽이겠다는 다짐을 거듭해 왔었다. 그리고 얼마 후 베티와 함께 창녀짓을 한 것으로 의심되는 로나라는 여성이 잡히는데 그녀의 가방에서 포르노 필름이 발견된다. 필름을 상영하자 거기에는 베티와 로나의 영상이 찍혀있었고, 영화를 찍은 곳이 멕시코의 티화나라고 자백한다. 리는 흥분하여 영사막을 부수며 난동을 부린다. 그리고 내시가 다른 곳으로 떠났다는 리의 보고와 달리 또다시 살인을 저지르고 사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리는 상영장에서 난동을 부린 것과 내시 건으로 상부에서 추궁당하지만 티화나 지역으로 떠나버리고 버키 역시 영화를 찍은 곳인 티화나로 간다. 버키는 티화나로 온 드 위트를 추궁하지만 그는 자신이 은행강도 사건의 범인이 아니었고 리를 죽이기 위해 티화나로 온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얼마 후 멕시코 경찰인 루랄레스들에게 총격을 받아 사망한다.

사건이 소강상태에 접어들 무렵 범인으로 짐작되는 사람이 보낸 편지가 도착한다. 얼굴이 지워진 남자 사진과 일부가 뜯겨져 나간 베티의 수첩으로 수사는 다시 재개된다.

 

그리고 또 다른 자백범이 나타나는데 그의 이름은 조지프 듈레인지, 군인으로 자신이 베티와 관계를 가졌고 무면허 의사에게 그녀가 임신한 것 같다고 둘러대 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둥 섬망 상태에서 횡설수설하지만 범행 일자에는 알리바이가 있었다.

엘리스 로는 버키를 불러 자신이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겠다면서 프리츠 보겔과 파트너가 되어 조사를 계속하라고 말한다. 프리츠 보겔은 엘리스 로의 지시로 알리바이가 분명치 않은 자백범 4명을 고문하고 버키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경보기를 울려 고문을 중지시킨다. 이 일로 버키는 한직으로 밀려난다. 버키는 리가 그랬듯이 블랙 다알리아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개입시키고, 환영에 시달렸으며 집착하게 된다.

버키는 개인적인 조사를 계속하고 프리츠 보겔과 그의 아들 조니 보겔이 베티와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다. 프리츠 보겔은 조니 보겔의 총각 딱지를 떼어 주려 했고 우연히 베티가 창녀 짓을 하게 된 것이다. 둘은 이 사실을 은폐하였고 수사 중 자신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도록 증거를 인멸한 것이다. 버키는 이 사실을 정식으로 문제 삼고 조니 보겔은 권총 자살하고 만다. 원치 않는 강제 휴가를 2주일 받은 버키는 다시 티화나로 내려가 리의 행적을 쫓는다. 리는 돈을 물 쓰듯이 썼고 루랄레스를 매수해 드 위트를 살해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난 후 리 자신도 도끼로 살해 당해 해변에 묻혀 있었다.

버키는 돌아와서 케이에게 리가 죽은 사실을 말해주고, 케이는 사건 전모를 털어 놓는다. 은행을 턴 것은 리 일당이었는데 두 명은 사살당하고 한 명은 캐나다로 도망간다. 리는 드 위트에게 범행을 뒤집어 씌웠는데 캐나다로 도망갔던 박스터 피치가 다시 나타나서 리를 협박한다. 리는 박스터 피치를 찾아가 살해하는데, 바로 버키와 함께 사살했던 네 명의 마약 소지범 중 한 명이 박스터 피치였던 것이다. 동경했던 파트너가 사실은 은행털이범이자 살인범이었고 모든 일들이 자신의 범행을 은폐하기 위한 일들이었음을 깨달은 버키는 블랙 다알리아 사건을 조사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케이와 결혼한다.

 

학교 교사로 취직한 케이와 평온한 나날을 보내던 버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블랙 다알리아 사건으로 되돌아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부부관계는 점차 엉망이 되고 만다. 홀리듯이 블랙 다알리아를 닮은 매들렌을 다시 찾은 버키는 그녀와 다시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케이는 사람을 시켜 버키의 행적을 조사하고 어느 날 짐을 챙겨 떠나 버린다. 다시 블랙 다알리아 사건 조사에 착수한 버키는 보스턴으로 떠나고 그곳에서 베티가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는 것과 군인을 좋아하게 된 이유를 듣는다. 그리고 횡설수설하던 듈레인지의 말에 어느 정도 사실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당시 무면허 산부인과 의사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추적하지만 그는 알리바이가 있었다. 다른 용의자인 영화제작자 역시 혐의가 없었다. 다만 베티의 행적에서 빈 곳만을 어느 정도 매꾸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헐리우드랜드에서 랜드라는 글자를 떼어내는 공사 중 피가 낭자한 방갈로 하나가 발견되는데 그곳에서 피에 묻은 야구방망이와 고문을 기록한 일지, 해부학 책과 빅토르 위고의 책 <웃는 남자>가 나온다. 에멧 스프레이그의 친구이자 주택 관리인이고 유명한 해부학자의 아들인 조지 틸덴의 소행이었다. 그의 행적을 찾기 위해 메들렌의 집을 찾은 버키는 에멧 스프레이그와 메들렌이 추잡하게 놀아나는 장면을 목격한다. 에멧 스프레이그는 메들렌이 조지 틸덴과 라모나가 부정하여 낳은 자식이라고 말한다. 메들렌은 버키의 수사 방향에 혼선을 주기 위해 접근했던 것이었다. 조지 틸덴과 격투 끝에 그를 살해한 버키는 메들렌의 동생 마사를 만나고, 그녀가 경찰서에 베티의 수첩을 보낸 장본인임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이 끝났지만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에 시달리던 버키는 스프레이그 저택 부근에 사는 제인 챔버스라는 미망인과 재회하는데 거기서 입이 찢어진 광대 그림이 <웃는 남자>에서 모티프를 따온 프레데릭 야난투오노의 그림이고, 이것을 라모나에게서 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영수증의 글씨는 바로 고문일기에 적힌 그 글씨였다. 베티를 죽인 것은 조지 틸덴과 라모나 두 사람이었던 것이다. 메들렌을 뒤쫓아 대화를 엳듣던 버키는 메들렌이 리를 도끼로 죽인 여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체포된 메들렌이 버키와의 성관계를 폭로하여 버키 역시 경찰에서 파면당한다. 메들렌은 3급 고살죄 판결에 처해진다. 얼마 후 케이로 부터 편지를 받은 버키는 그녀에게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탄다.

 

어머니, 스물아홉 해가 지난 지금에야 이 피 묻은 고별사를 바칩니다. 

 

이제 나는 당신을 가슴에 껴안습니다.

나의 술주정꾼, 나의 항해사,

나의 잃어버린 첫번째 보호자.

당신을 사랑하기 위하여,

나중에 다시 바라보기 위하여.

 

앤 섹스턴, <저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들> 중에서

 

소설의 헌사와 인용된 시이다. 제임스 엘로이의 어머니 제네바 엘로이는 그가 열 살인 1958년 살해된 후 반나의 상태로 로스엔젤레스 고등학교 근처 숲 속에서 발견되었고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인용된 시는 1930년대와 40년대를 살았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외고한 내용이라고 하는데 애증이 결합된 이미지의 아버지를 용서한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영화를 수년 전에 보았는데 영화에 몰입할 수가 없었고 나중에는 도대체 어떤 내용인지도 정리가 되지 않았었다. 화려한 출연진과 유명 감독이 만든 최악의 영화라는 기억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책을 우연히 구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최근 읽은 책 중 가장 몰입했던 것 같다.

블랙 다알리아 사건은 1947년 실제 일어난 사건으로 아버지가 유력한 용의자로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비상한 머리의 소유자이자 외과의사였던 용의자는 그러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다. 사건 조사 중 경찰관 4명이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으나 모두 미해결로 남았다고 한다.

이 사건을 제임스 엘로이가 재구성하여 40년대 미국의 음울한 분위기를 복원해 냈다. 당시 영화계에서는 1차 세계대전 후 심리적 사회적 문제를 다룬 사색적이고 기괴한 스토리의 영화가 많이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주로 인종 문제, 알코올 중독, 정신병, 범죄 등을 많이 다루었으며 '필름 느아르'로 불리었다. 여기서 파생한 추리 소설을 '로망 누아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블랙 다알리아>는 전형적인 로망 느와르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

참혹하게 살해당한 한 여성의 사건을 조사하는 주인공 버키는 조사 과정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기반이 어떠한 것인지 직시하게 되고,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목도한다.

동경하던 파트너는 은행강도에 살인범이었고, 상관들은 보신에 연연하며 사건을 덮거나 조작한다. 연인 케이는 마약과 몸을 파는 창녀 출신이였고, 메들렌은 누구에게나 몸을 주고 심지어 의붓 아버지와도 관계를 맺는다. 용의자의 다수가 군인으로 그들은 나라를 지키는 이미지가 아니라 창녀를 사거나 알코올 중독에 걸린 정신병자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어둠에 점점 발을 들이게되는 버키는 역시 밀고자의 과거를 갖고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개인적으로 사건에 집착하던 리와 마찬가지로 블랙 다알리아의 환영에 사로잡혀 케이와의 결혼생활은 파국에 이르고 만다. 하지만 그들 개개인의 의지로 어두운 삶과 범죄를 저지른다는 느낌보다는 운명주의적인 색채가 짙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을 케이와 메들렌이라는 대비되는 여성으로 상정하고 있기는 해도, 그들은 서로 과거와 미래를 바꾸어 놓았을 뿐인지도 모른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어두운 버전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제임스 엘로이의 소설에 푹 빠져서 보낸 일주일이었다. 좋은 작가를 알게 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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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오렌지의 비밀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68
엘러리 퀸 지음, 김우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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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과 우표수집을 취미로 하는 출판업자 도널드 커크의 사무실에 작달막한 사나이가 방문한다. 방문 목적을 말하지 않는 그를 비서 오스본은 대기실로 안내한다. 앨러리 퀸과 함께 돌아온 도널드 커크는 대기실 방문이 잠긴 것을 발견하고 반대쪽 문을 연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살해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놀라운 것은 그 방의 가구부터 시작해서 피해자의 옷 까지 모든 것이 거꾸로 뒤집혀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신원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누가 어떤 이유로 사내를 살해한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게다가 대기실에서 통하는 문은 잠겨 있었기 때문에 목격자도 전혀 없다. 
 
도널드 커크에게 그의 친구 맥그완이 보낸 경고 편지, 영어와는 거꾸로 된 헤브라이어로 된 책들만 도둑 맞는 사건, 영국에서 보석 사기꾼으로 악명높있단 아일린 류즈라는 여인과 그가 도널드 커크의 보석을 갖게 된 경위, 그리고 거꾸로 인쇄된 푸저우 지방 우표를 도널드 커크가 친구인 맥그완에게 익명으로 팔아야 했던 사연 등 갖가지 사건은 꼬리를 물고 특히 각 사건들은 거꾸로 된 것과 관련이 있지만 정작 대기실에서 살해된 사내와의 연관성은 전혀 밝혀지지 않는다. 게다가 앨러리 퀸이 피해자가 죽기 직전 먹었던 차이나 오렌지에 주목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결국 이 모든 사건들이 실제 살인사건과는 별다른 연관이 없었음이 밝혀지고, 앨러리 퀸은 대기실 문이 잠겨 있었기 때문에 절대 범인일 수 없었던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사건을 해결한다.
 
앨러리 퀸은 사촌 지간인 프레드릭 대니와 맨프리드 리의 공동 필명이자 작품 속 탐정 이름이기도 하다. 대실 해미트의 하드보일드 스타일 작품이 인기를 얻는 것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여기 저기서 드러내는 이 작품은 그래서 더욱 본격미스터리에 충실한 작품이다. 밀실살인사건의 해결에 있어 최초의 잘못된 전제를 바로 잡아 단순 명쾌하게 범인을 지목한다는 설정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사건으로 독자의 눈을 현혹하고 나서 <독자에의 도전> 장을 잊지 않고 수록해 두었다.
국명 시리즈로 통칭 되는 시리즈 중 하나로 국명 시리즈는 다음과 같다고 하는데 <쌍둥이의 비밀>은 특정 국가가 언급되어 있지 않는데도 시리즈 중 하나로 분류되어 있어 어느 나라인지 궁금하다.
 
로마 모자의 비밀(The Roman Hat Mystery, 1929)
프랑스 파우더의 비밀(The French Powder Mystery, 1930)
네델란드 구두의 비밀(The Dutch Shoe Mystery, 1931)
그리스 관의 비밀(The Greek Coffin Mystery, 1932)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The Egyptian Cross Mystery, 1932)
아메리카 권총의 비밀(The American Gun Mystery, 1933)
샴쌍둥이의 비밀(The Siamese Twin Mystery, 1933)
차이나 오렌지의 비밀(The Chinese Orange Mystery, 1934)
스페인 곶의 비밀(The Spanish Cape Mystery,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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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숲 ㅣ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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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야나기 발레단에 한 남성이 침입했다가 하루코라는 이름의 발레단원에게 구리 재질의 화병으로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남성이 바깥쪽 창문을 통해 침입한 점과 발레단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점은 인정되지만, 그가 무엇가를 훔치기 위해 잠입했다고 보기에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돈을 훔치기 위한 장소로 발레단은 어울리지 않는 장소이고 남자의 차림새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절도를 목적으로 침입한 자를 공포나 놀람, 흥분으로 인해 살상하더라도 그 죄를 묻지 않는다'는 정당방위의 특별규칙을 적용하는 것 역시 애매한 상황이다.

경시청 수사1과의 가가 교이치로는 사건 해결을 위해 현장에 파견되고, 3일 후 피해자의 신원을 파악한다. 피해자 이름은 가자마 도시유키, 그림을 공부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나기 이틀 전에 사망하였고 미국에는 전에도 한 차례 갔다온 적이 있다고 한다.

피해자의 신원은 밝혀졌으나 여전히 발레단과의 관계가 오리무중인 가운데, 이번에는 발레단의 마스터 안무가이자 연출가인 가지타가 살해당한다. 범인은 주사바늘을 이용한 조그만 장치를 가지타의 상의에 부착하여 그가 자리에 앉을때 니코틴 농축액이 주사되게 하여 살해한다.

얼마 후 하루코의 남자친구 야기유가 니코틴 농축액이 든 음료를 마시고 살해당할 뻔한 사건이 일어난다. 경찰과 주변에서는 야기유가 자신의 여자친구 하루코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가자마와 가지타가 2년 전 미국에서 접촉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조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조사를 계속한다면 범인에게 불리한 사실이 나올 것이라고 추측했다.

경찰이 연식 테니스공에 쓰는 공기주입기가 가지타의 범행에 사용된 도구일 것이란 추측 하에 조사를 해나가던 중, 또 다른 발레리나 모리이 야스코가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녀는 다카야나기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인 아키코와 견줄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갖추고 있었고 함께 미국 유학도 갔다온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서 체형이 바뀌어 기량이 떨어지자 다이어트를 시작했고, 자신이 존경하는 가지타가 깡마른 몸매의 댄서를 선호하는 것을 알고 거의 식사를 하지 않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야스코는 가지타를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해버린 것이다.

미국에 파견한 경찰관으로부터 몇 가지 소식이 날아들고, 가가는 야기유의 독살 사건이 2년전 사건을 파해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2년전 사건으로 경찰 수사를 집중하는 효과를 가져온 것은 아닌지 역발상을 해본다. 그리고 4년전 일어난 한 사건으로 부터 시작된 비극을 알게 된다.

 

4년전 미국에 유학중이던 아키코는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던 한 남성과 사랑에 빠진다. 가지타는 아키코에게 남자와 헤어질 것을 종용하고 아키코 역시 발레를 위해 남자를 떠난다. 남자가 한 여성에게 나이프에 찔리는 사건이 벌어지고 미국 경찰이 여자친구에 주목하자 가지타는 남자가 사귀던 여자 이름을 아키코가 아닌 야스코로 댄다. 가지타는 발레단의 미래를 아키코에게 걸었고 야스코는 희생되도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남자는 2년 후 일본에서 온 또다른 유학생 가자마와 친해지고 그에게 자신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주면서 발레리나 그림을 보여준다. 가자마는 그림에 감동을 받고 자신도 그와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일본에 돌아온 가자마는 남자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삶의 이욕도, 살아갈 이유도 잃어버려 죽고 싶다는 남자의 전화를 받은 가자마는 아키코에게 함께 미국으로 가자고 권하려 한다. 발레단에서 옥신각신하는 장면을 본 미오가 남자를 내리쳐 사망하자 미오의 친구 하루코가 대신 경찰에 자수한다. 그녀는 부상으로 춤을 쉬는 중이었고 자신이 낸 교통사고로 미오의 귀가 들리지 않게 된 데 대해 자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가 교이치로 시리즈이다. 얼핏 화려하게만 보이는 발레리나들의 삶의 이면을 자세히 보여주고, 아울러 가가와 발리리나 미오의 로맨틱한 스토리도 애틋하다. 실력이 아니면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에 프리마발레리나를 살해하고 자신이 대신 그 자리를 꿰어찬다는 식은 있을 수가 없다는 도도한 자신감은 그들이 삶에 대해 가지는 자긍심이기도 할 것이다.

갈릴레오 보다는 가가에 좀 더 끌리는 편인데, 갈릴레오의 과학적인 추리보다 가가 교이치로의 인간적인 추리와 수사가 더 매력적이다. 아직 읽지 않은 가가 교이치로 시리즈가 있다는 것은 은근한 기쁨이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51619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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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오스카 와일드 ㅣ 펭귄클래식 7
오스카 와일드 지음, 김진석 옮김 / 펭귄클래식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화가 바질 홀워드를 방문한 헨리 워튼 경(해리)은 젊은 남자의 전신 초상화를 보고 그의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며 경탄한다. 하지만 바질은 그 작품에 자기 자신을 너무 많이 투영시켰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출품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바질은 그림의 모델인 도리언 그레이로부터 새로운 스타일을 떠올렸고, 사물을 다르게 볼 수 있게 되는 등 예술의 한 이데아를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해리는 도리언 그레이에게 비상한 흥미를 나타내는데, 바질은 해리가 도리언 그레이에게 영향을 주어 그를 변화시키고 결국 자신에게서 앗아갈 것을 염려한다. 도리언 그레이는 해리를 만나 몇 마디 나누자마자 그의 역설적인 견해와 철학에 매료당한다. 해리의 견해에 영향을 받은 도리언 그레이는 젊음이야말로 간직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라며 만약 자신이 늙어 변하는 대신 초상화가 변한다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던 어느날 도리언 그레이가 3류 극장에서 연극을 보던 중 시빌 베인이라는 여배우를 알게 된다. 그녀는 세익스피어의 여러가지 작품에서 주인공 역할을 해냈는데, 각각의 주인공을 연기하는 그녀에게 도리언 그레이는 천재성을 발견하고 반하고 만다. 그녀 역시 도리언 그레이의 외모와 기품에 반해 결혼할 꿈에 부풀게 되는데, 그녀의 동생 제임스 베인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누이가 들떠 있는 것을 보고 불안해 한다. 그리고 그가 그녀를 불행하게 한다면 죽이겠다는 말을 남기고 선원이 되어 호주로 떠난다.

바질과 해리에게 그녀를 보여주기로 한 날, 도리언 그레이와의 입맞춤으로 그녀는 연극 속의 그녀가 아닌 진짜 인생을 알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그녀의 연기는 형편없어지고 만다. 지금까지는 연극에 몰입할 수 있었지만, 현실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에 연극 속 상대편 배우가 형편없는 중년 사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형편없는 연기는 도리언 그레이의 사랑을 싸늘하게 식게 만들었고, 울면서 애원하는 시빌 베인을 무대 뒤에 버려둔 채 집으로 돌아온다.

그날 밤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의 초상화가 미묘하게 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입가에 잔인한 기색의 주름살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는 불안한 감각이 빚어낸 환영일 뿐이라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고 다음 날 시빌 베인에게 사죄하는 편지를 쓴다. 그리고 해리가 방문하여 시빌 베인이 전날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해리는 시빌 베인이 진실로 살았던 적이 없으니 진실로 죽은 것도 아니라면서 오페라에 가자고 말하고 도리언 그레이는 그 말에 응한다.

도리언 그레이는 초상화가 자신의 악행을 반영하여 추악해지고 자기 대신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이 확실해지자 쓰지 않는 공부방으로 초상화를 이동시켜 가림막을 쳐놓는다. 그리고 해리로부터 한 권의 책을 선물 받는다. 그 책은 마치 도리언 그레이 자신이 아직 다 살기도 전에 쓰여진,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만 같았는데 그는 퇴폐적인 책의 영향력으로부터 결코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도리언 그레이는 괴상한 취미에 몰두했고, 창녀굴에 드나드는 등 온갖 악행을 일삼았지만 그의 외모만은 결코 변하지 않았고 대신 초상화만 갈수록 추악해졌다.

도리언 그레이가 서른여덟 번째 생일을 맞기 전날, 바질 홀워드가 그를 찾아 온다. 바질은 파리로 떠날 예정인데 그의 초상화를 전시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최근에 들려 오는 바질 홀워드에 대한 안 좋은 평판에 대해 염려하는 말을 한다. 흥분한 도리언 그레이는 바질에게 자신의 추악한 초상화를 보여준다. 바질은 경악하며 도리언에게 기도하라고 말하지만 도리언은 이미 늦었다며 바질을 칼로 찔러 살해하고 만다. 도리언은 예전 친구 캠벨의 약점을 이용하여 바질의 시체를 처리한다.

그러던 어느날 밤 도리언은 아편굴로 가는데 그곳에서 예전에 영국을 떠난 것으로 알았던 친구 에이드리언을 만난다. 친구가 없는 곳으로 이동하는 와중에 자신을 예전 시빌 베인이 부르던 '매력적인 왕자님'으로 어떤 여자가 부르고 이 말을 들은 한 남자가 도리언 그레이를 살해하려 한다. 그 남자의 이름은 제임스 베인으로 도리언 그레이를 추적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의 변하지 않은 외모를 이용하여 18년 전에 누이를 망쳤던 사람의 얼굴이 이렇게 젊을 수 있겠느냐며 위기를 탈출한다.

죽음이 한발짝씩 다가오는 공포에 사로잡힌 도리언 그레이는 바깥 출입을 거의 하지 않다가 어느 날 사냥을 나가는데 사냥터에서 몰이꾼 한 명이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몰이꾼이 제임스 베인으로 밝혀진다.

전과 다르게 살아보기 위해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을 숨기고 순결한 처녀에게 선행을 베풀지만 해리는 그마저도 그녀에게는 불행한 결과를 낼 수 밖에 없다는 말을 한다. 도리언 그레이는 살인의 죄책감에 짓눌리다가 초상화 외에는 그 어떤 증거도 없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친다. 그는 바질 홀워드를 찔렀던 칼로 초상화를 찌른다. 비명과 함께 쿵하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하인들이 방 안에 들어서자 그곳에는 훌륭한 젊은이의 초상화와 추악하고 역겨운 용모의 사내가 가슴에 칼이 찔린 채 숨져 있었다.

 

1854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난 오스카 와일드는 1891년 장편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통해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작품 때문에 외설죄로 1895년 2년 징역형을 선고 받는다. 팽귄 클래식에 수록된 판본은 1891년 워드 록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펴낸 판본인데, 이 판본과 1890년 판본은 몇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1891년 판본은 외설 시비를 의식하여 '사랑'을 '예술에 대한 사랑' 으로 바꾸었고 13장이던 원작을 20장으로 추가하여 조상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심리적 붕괴 과정, 아편 소굴로 향하는 여정 등을 구체화 하였다고 한다. 또 제임스 베인의 사망과 헨리 경의 현란한 말솜씨를 더한 것도 다른 점이다.

 

로버트 미갤의 서문에 따르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출판되었을 때 비평가들에 대한 와일드의 응답이나 이후 출간된 많은 비평들, 그리고 그의 재판에서 주된 논란거리가 된 것은 예술의 역할, 예술과 도덕의 관계, 그리고 실제 작가의 생활과의 연관성이었다고 한다. 겉보기에는 체면을 유지하면서, 혹은 적어도 자신의 평판에 신경을 쓰면서, 다른 한편으로 은밀하게 사회의 도덕규범을 위배하는 이중적인 삶이야 말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중심된 주제이다. 도리언은 초상화의 역할 덕분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쾌락적인 삶에 탐닉한다.

와일드는 비밀과 불가사의에 열광했다고 하는데 이런 관점에서 '도리언'이라는 이름 자체에서 '그리스인의 사랑', 즉 동성애적 관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하여, 책에서는 역사적 인물 중에 유명한 동성애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 "자네와의 우정은 젊은이들에게 그토록 치명적인 것인가?" 라는 질문에서도 동성애를 암시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 오스카 와일드는 1886년 친구인 로버트 로스에 이끌려 동성애 행위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와일드는 가족의 초상화에 대한 장에서 도리언의 행동이 유전적인 요소임을 드러낸다. 한편 부도덕한 행위는 그 사람의 얼굴에 나타난다는 관상학적 믿음이 소설에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

 

작가 서문은 본문과 와일드의 예술관을 이해하고 난 연후에 좀더 명확히 다가온다. 작가 서문은 어찌 보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전체를 통해 오스카 와일드가 나타내고자 하는 예술관의 요약이다. 특히 예술을 위한 예술을 드러낸 대목은 현재도 여전히 논쟁거리가 될 만한다.

 

아름다운 사물에서 추한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은 아무런 매력 없이 타락한 인물이다.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아름다운 사물에서 아름다운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은 교양이 있다. 이들에게는 희망이 있다.

아름다운 사물을 오직 '아름다움'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선택된 사람들이다.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책은 잘 썼든지, 잘못 썼든지 둘 중 하나다. 단지 그 뿐이다.

 

바로 이 구절이야 말로 오스카 와일드 예술관의 요체가 아닐까 한다. 즉 예술작품 자체에 어떠한 가치판단도 있을 수 없고 작품 자체만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조지훈의 <완화삼(玩花衫)>에 대한 답시인 박목월의 <나그네> 中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이라는 구절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시 자체로 온전히 평가받아야 한다는 견해와, 일제 강점기 하에 끼니가 바쁜 마당에 술까지 담궈 먹을 마을이 어디 있었겠느냐는 논리로 시를 그 시대와 분리하여 평가할 수 없다는 견해가 대립된 논쟁이 기억난다. 또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에서 낙엽 타는 냄새가 '갓 볶아 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는 구절을 들어 일제 강점기에 갓 볶아 낸 커피 냄새를 맡으며 완상에 잠기는 것이 과연 문학에서 다루어야 할 주제인가 하는 논쟁도 떠오른다.

나로 말하자면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허구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예술에 삶의 추저분한 면모가 담기지 않는다 해서 그 예술이 고고한 예술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시대를 담아냈다고 해서 예술적 완성도는 전혀 없는, 조잡하기 짝이 없는 작품 역시 거부감이 들기는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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