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오스카 와일드 펭귄클래식 7
오스카 와일드 지음, 김진석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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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바질 홀워드를 방문한 헨리 워튼 경(해리)은 젊은 남자의 전신 초상화를 보고 그의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며 경탄한다. 하지만 바질은 그 작품에 자기 자신을 너무 많이 투영시켰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출품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바질은 그림의 모델인 도리언 그레이로부터 새로운 스타일을 떠올렸고, 사물을 다르게 볼 수 있게 되는 등 예술의 한 이데아를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해리는 도리언 그레이에게 비상한 흥미를 나타내는데, 바질은 해리가 도리언 그레이에게 영향을 주어 그를 변화시키고 결국 자신에게서 앗아갈 것을 염려한다. 도리언 그레이는 해리를 만나 몇 마디 나누자마자 그의 역설적인 견해와 철학에 매료당한다. 해리의 견해에 영향을 받은 도리언 그레이는 젊음이야말로 간직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라며 만약 자신이 늙어 변하는 대신 초상화가 변한다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던 어느날 도리언 그레이가 3류 극장에서 연극을 보던 중 시빌 베인이라는 여배우를 알게 된다. 그녀는 세익스피어의 여러가지 작품에서 주인공 역할을 해냈는데, 각각의 주인공을 연기하는 그녀에게 도리언 그레이는 천재성을 발견하고 반하고 만다. 그녀 역시 도리언 그레이의 외모와 기품에 반해 결혼할 꿈에 부풀게 되는데, 그녀의 동생 제임스 베인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누이가 들떠 있는 것을 보고 불안해 한다. 그리고 그가 그녀를 불행하게 한다면 죽이겠다는 말을 남기고 선원이 되어 호주로 떠난다.

바질과 해리에게 그녀를 보여주기로 한 날, 도리언 그레이와의 입맞춤으로 그녀는 연극 속의 그녀가 아닌 진짜 인생을 알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그녀의 연기는 형편없어지고 만다. 지금까지는 연극에 몰입할 수 있었지만, 현실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에 연극 속 상대편 배우가 형편없는 중년 사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형편없는 연기는 도리언 그레이의 사랑을 싸늘하게 식게 만들었고, 울면서 애원하는 시빌 베인을 무대 뒤에 버려둔 채 집으로 돌아온다.

그날 밤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의 초상화가 미묘하게 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입가에 잔인한 기색의 주름살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는 불안한 감각이 빚어낸 환영일 뿐이라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고 다음 날 시빌 베인에게 사죄하는 편지를 쓴다. 그리고 해리가 방문하여 시빌 베인이 전날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해리는 시빌 베인이 진실로 살았던 적이 없으니 진실로 죽은 것도 아니라면서 오페라에 가자고 말하고 도리언 그레이는 그 말에 응한다.

도리언 그레이는 초상화가 자신의 악행을 반영하여 추악해지고 자기 대신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이 확실해지자 쓰지 않는 공부방으로 초상화를 이동시켜 가림막을 쳐놓는다. 그리고 해리로부터 한 권의 책을 선물 받는다. 그 책은 마치 도리언 그레이 자신이 아직 다 살기도 전에 쓰여진,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만 같았는데 그는 퇴폐적인 책의 영향력으로부터 결코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도리언 그레이는 괴상한 취미에 몰두했고, 창녀굴에 드나드는 등 온갖 악행을 일삼았지만 그의 외모만은 결코 변하지 않았고 대신 초상화만 갈수록 추악해졌다.

도리언 그레이가 서른여덟 번째 생일을 맞기 전날, 바질 홀워드가 그를 찾아 온다. 바질은 파리로 떠날 예정인데 그의 초상화를 전시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최근에 들려 오는 바질 홀워드에 대한 안 좋은 평판에 대해 염려하는 말을 한다. 흥분한 도리언 그레이는 바질에게 자신의 추악한 초상화를 보여준다. 바질은 경악하며 도리언에게 기도하라고 말하지만 도리언은 이미 늦었다며 바질을 칼로 찔러 살해하고 만다. 도리언은 예전 친구 캠벨의 약점을 이용하여 바질의 시체를 처리한다.

그러던 어느날 밤 도리언은 아편굴로 가는데 그곳에서 예전에 영국을 떠난 것으로 알았던 친구 에이드리언을 만난다. 친구가 없는 곳으로 이동하는 와중에 자신을 예전 시빌 베인이 부르던 '매력적인 왕자님'으로 어떤 여자가 부르고 이 말을 들은 한 남자가 도리언 그레이를 살해하려 한다. 그 남자의 이름은 제임스 베인으로 도리언 그레이를 추적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의 변하지 않은 외모를 이용하여 18년 전에 누이를 망쳤던 사람의 얼굴이 이렇게 젊을 수 있겠느냐며 위기를 탈출한다.

죽음이 한발짝씩 다가오는 공포에 사로잡힌 도리언 그레이는 바깥 출입을 거의 하지 않다가 어느 날 사냥을 나가는데 사냥터에서 몰이꾼 한 명이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몰이꾼이 제임스 베인으로 밝혀진다.

전과 다르게 살아보기 위해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을 숨기고 순결한 처녀에게 선행을 베풀지만 해리는 그마저도 그녀에게는 불행한 결과를 낼 수 밖에 없다는 말을 한다. 도리언 그레이는 살인의 죄책감에 짓눌리다가 초상화 외에는 그 어떤 증거도 없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친다. 그는 바질 홀워드를 찔렀던 칼로 초상화를 찌른다. 비명과 함께 쿵하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하인들이 방 안에 들어서자 그곳에는 훌륭한 젊은이의 초상화와 추악하고 역겨운 용모의 사내가 가슴에 칼이 찔린 채 숨져 있었다.

 

1854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난 오스카 와일드는 1891년 장편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통해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작품 때문에 외설죄로 1895년 2년 징역형을 선고 받는다. 팽귄 클래식에 수록된 판본은 1891년 워드 록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펴낸 판본인데, 이 판본과 1890년 판본은 몇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1891년 판본은 외설 시비를 의식하여 '사랑'을 '예술에 대한 사랑' 으로 바꾸었고 13장이던 원작을 20장으로 추가하여 조상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심리적 붕괴 과정, 아편 소굴로 향하는 여정 등을 구체화 하였다고 한다. 또 제임스 베인의 사망과 헨리 경의 현란한 말솜씨를 더한 것도 다른 점이다.

 

로버트 미갤의 서문에 따르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출판되었을 때 비평가들에 대한 와일드의 응답이나 이후 출간된 많은 비평들, 그리고 그의 재판에서 주된 논란거리가 된 것은 예술의 역할, 예술과 도덕의 관계, 그리고 실제 작가의 생활과의 연관성이었다고 한다. 겉보기에는 체면을 유지하면서, 혹은 적어도 자신의 평판에 신경을 쓰면서, 다른 한편으로 은밀하게 사회의 도덕규범을 위배하는 이중적인 삶이야 말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중심된 주제이다. 도리언은 초상화의 역할 덕분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쾌락적인 삶에 탐닉한다.

와일드는 비밀과 불가사의에 열광했다고 하는데 이런 관점에서 '도리언'이라는 이름 자체에서 '그리스인의 사랑', 즉 동성애적 관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하여, 책에서는 역사적 인물 중에 유명한 동성애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 "자네와의 우정은 젊은이들에게 그토록 치명적인 것인가?" 라는 질문에서도 동성애를 암시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 오스카 와일드는 1886년 친구인 로버트 로스에 이끌려 동성애 행위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와일드는 가족의 초상화에 대한 장에서 도리언의 행동이 유전적인 요소임을 드러낸다. 한편 부도덕한 행위는 그 사람의 얼굴에 나타난다는 관상학적 믿음이 소설에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

 

작가 서문은 본문과 와일드의 예술관을 이해하고 난 연후에 좀더 명확히 다가온다. 작가 서문은 어찌 보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전체를 통해 오스카 와일드가 나타내고자 하는 예술관의 요약이다. 특히 예술을 위한 예술을 드러낸 대목은 현재도 여전히 논쟁거리가 될 만한다.

 

아름다운 사물에서 추한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은 아무런 매력 없이 타락한 인물이다.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아름다운 사물에서 아름다운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은 교양이 있다. 이들에게는 희망이 있다.

아름다운 사물을 오직 '아름다움'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선택된 사람들이다.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책은 잘 썼든지, 잘못 썼든지 둘 중 하나다. 단지 그 뿐이다.

 

바로 이 구절이야 말로 오스카 와일드 예술관의 요체가 아닐까 한다. 즉 예술작품 자체에 어떠한 가치판단도 있을 수 없고 작품 자체만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조지훈의 <완화삼(玩花衫)>에 대한 답시인 박목월의 <나그네> 中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이라는 구절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시 자체로 온전히 평가받아야 한다는 견해와, 일제 강점기 하에 끼니가 바쁜 마당에 술까지 담궈 먹을 마을이 어디 있었겠느냐는 논리로 시를 그 시대와 분리하여 평가할 수 없다는 견해가 대립된 논쟁이 기억난다. 또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에서 낙엽 타는 냄새가 '갓 볶아 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는 구절을 들어 일제 강점기에 갓 볶아 낸 커피 냄새를 맡으며 완상에 잠기는 것이 과연 문학에서 다루어야 할 주제인가 하는 논쟁도 떠오른다.

나로 말하자면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허구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예술에 삶의 추저분한 면모가 담기지 않는다 해서 그 예술이 고고한 예술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시대를 담아냈다고 해서 예술적 완성도는 전혀 없는, 조잡하기 짝이 없는 작품 역시 거부감이 들기는 마찬가지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51287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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