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여름 - 포켓북 한국소설 베스트
고은주 지음 / 일송포켓북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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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름>

 

예술의 꿈을 접고 돈벌이에 매진하는 아버지와 여자는 시집만 잘 가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의 어머니를 둔 주인공 경은은 두 분의 소망을 절충하여 지방 소도시에서 아나운서로 일하고 있다. 대학 시절에는 문학을 하려 했으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과정을 견디지 못하였고, 뭐든지 눈에 보이는 대로 단순하게 살아가는 준에게 끌린 후 지지부진한 연애 관계를 지속해 오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작가 지망생이 옛 연인 연희를 생각나게 한다며 집착하기 시작한다. 그의 양태는 스토커의 그것이었지만, 그가 하는 이야기들을 허투루 듣지 못하는 것은 주인공 스스로가 그의 이야기에 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 기형도의 <짧은 여행의 기록>, 그리고 마루야마 겐지의 대담 등을 인용하며 그녀가 작가가 될 숙명을 지니고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고 한다. 평온한 삶을 지향하면서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들여다보길 거부하던 그녀에게 그의 집착은 한편으로는 부담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권태와 무기력에 빠진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아나운서라는 직업 때문에 경은은 구설에 휘말리게 되고 풍문을 들은 그의 집착은 조울적인 양태를 띠게 된다. 그리고 그의 누나로부터 그가 자신에게 쓴 편지 형식의 수기를 유품이라며 건내받은 경은은 준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작가가 되기 위해 아나운서를 그만 둔다.

 

제2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품으로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이며 작가 자신이 실제로 진주에서 아나운서 생활을 하였고, 그만 둔 뒤에 작가로 데뷔하였다.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중요한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가진 나와, 그 이미지에 도취되어 상대편의 모습을 자기 마음대로 재단하는 청취자 스토커 이야기 이다. 스토커의 모습에서 점점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기를 돌아보게 되며 자신의 삶 역시 스토커의 삶과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경은이 지금까지의 허상을 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는 내용이다.

한편 동료 아나운서인 유화, 미영, 그리고 수림의 양태를 통해 자신의 어정쩡한 모습을 대비시키기도 한다. 유화는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구설과 질시에 시달리다가 어느날 결혼을 하면서 일을 그만두고, 미영은 전문가로서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애를 쓰며 결혼 후에도 일을 하려 하고, 수림은 젊은 나이를 무기로 통통 튀는 역할을 맡고 있다. 주인공 경은은 자신이 그 어느 편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임을 알게 된다.

 

작품 중 마루야마 겐지의 말을 인용한 부분이 인상 깊어 축약하여 적어 둔다.

 

...문학이란 혼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혼의 문제를 다룬다 함은 외로움이 전제 조건입니다. 혼이란 깊은 우물이나 구멍 같은 것으로 성격적으로 파탄이 난 사람들이 그 구멍을 들여다 봅니다. 문제는 그 구멍의 어느 정도 깊이까지 내려갈 수 있는가인데, 중요한 것은 반드시 다시 올라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려간 채 거기에 머물러버리면 자살과 다양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구멍은 매력적이며 내려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올라오는 것은 예술가들의 일 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 재능이 필요합니다. 한 가지는 그 구멍에 매력을 느끼고 내려가 보고자 모험하는 재능, 또 한 가지는 그 구멍에서 무언가를 획득하여 올라와서 세상에 보여주는 재능. 즉 성격적으로 결함이 있으면서도 그 성격을 컨트롤하는 또 다른 나의 자신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유리>

 

세 군데의 대학에 합격했지만 집안이 기울어 대학 등록이 막연한 주인공 유리는 K 프로덕션의 사장에게 몸을 맡기는 한편 학원에서 만난 삼수생과도 별 의미 없는 관계를 갖는다. K 프로덕션 사장은 첨단 기계가 곧 자신의 기술을 돋보이게 해줄 것이란 믿음을 갖고 있으며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에 집착하는 인물이다. 유리가 진정 좋아하는 동현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자퇴하였지만 동현은 유리와 헤어지자는 의사표시를 했고 이제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는지 어쩐지 알지 못한다.

한편 친구 진아는 장래가 유망한 법대생과 허우대가 멀쩡하고 돈이 많은 브래드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그리고 K 프로덕션 사장이 성행위 비디오를 찍자는 말에 응한 유리는 스너프 필름을 찍으려던 사장에 의해 살해 당한다.

 

세기말 암울한 분위기와 경제 위기 등에 맞물려 쾌락 이외의 다른 관계를 찾지 못한 젊은이의 위기감을 표현한 것 같지만 작위적인 느낌이 강하고 정련된 느낌이 떨어진다. 습작품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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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고에 저택 살인사건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한희선 옮김 / 시공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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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에 조난당한 여덟 명의 연극단원과 마을의 의사 닌도가 키리고에 저택으로 피신한다. 갖가지 고서와 골동품이 수집되어 있는 그 저택은 마치 아홉 명의 조난자를 맞이하려고 했던 것처럼 열개였던 의자 중 하나가 부서져 있었고, 마찬가지로 열개였던 방 중 하나의 난방장치가 고장나 있었다.

극단 암색텐트의 연출가인 야리나카는 골동품에 조예가 깊은데 그 저택의 곳곳에서 방문자들의 이름이 암시되어 있는 소품들을 발견하고, 소품들의 변화에 맞추어 단원들이 한 명씩 살해당한다. 그리고 죽음은 키타하라 하쿠슈의 <비>라는 동요에 맞추어 비유살인의 형태를 띠고 있는 듯 하다.

 

비 - 키타하라 하쿠슈

 

비가 내립니다. 비가 내린다.

놀러 가고 싶어, 우산은 없어,

붉은 끈 나막신도 끈이 끊어졌다.

 

비가 내립니다. 비가 내린다.

싫어도 집에서 놀아요,

치요가미 접읍시다, 접읍시다.

 

비가 내립니다. 비가 내린다.

켕켕 새끼 꿩이 지금 울었다,

새끼 꿩도 춥겠지, 쓸쓸하겠지.

 

비가 내립니다. 비가 내린다.

인형 재워도 아직 그치지 않네.

센코하나비도 다 탔다.

 

리노이에 그룹 일가의 손자인 사카키 유타카가 죽고 그의 여자친구 키미사키 란이 순차적으로 사망하고, 일견 살해당할 이유가 없어보이는 아시노 미즈키까지 살해당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이 유키히코가 사망하자 야리나카는 추리를 통해서 리노이에 저택에 강도 짓을 하러 들어간 사카키, 란, 카이 일당 중 카이가 공범 둘을 죽이고 비밀을 알고 있는 미즈키마저 살해한 후 자신은 자살한 것으로 결론을 짓는다. 하지만, 또 다른 노래 하나가 있었으니 그 노래는 <카나리야>라는 노래, 그리고 이 노래에 살인범을 밝혀내는 비밀이 숨어있다.

 

카나리야 - 사이조 야소

 

노래를 잊어버린 카나리야는 뒷산에 버릴까요.

아니, 아니, 안 됩니다.

노래를 잊어버린 카나리야는 뒤쪽 늪에 묻을까요.

아니, 아니, 안 됩니다.

노래를 잊어버린 카나리야는 버드나무 채찍으로 때릴까요.

아니, 아니, 불쌍합니다.

 

노래를 잊어버린 카나리야는,

상아 배에 은 노,

달밤의 바다에 띄우면,

잊었던 노래를 생각해 낸다.

 

외딴 곳에서 은둔하여 살아가는 키리고에 저택과 수수께끼의 거주인, 그리고 그곳에 수집되어 있는 골동품이 만들어내는 신비한 분위기에 비유살인, 편승살인이 일어난다. 눈으로 고립된 저택에서 일어나는 연쇄살인이라는 고전적인 배경으로 <십각관 살인사건>으로 유명한 아야츠지 유키토가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오구리 무시타로의 <흑사관 살인사건>의 음울한 분위기도 일견 느껴진다. 속도감이 부족하고, 편승살인의 동기가 빈약하다는 것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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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 2 - 나선
스즈키 코지 지음, 윤덕주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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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물놀이를 하다 부주의로 아들을 잃은 검시의 안도는 그 사건 이후 아내와 헤어져 혼자 살아가고 있다. 전편에서 사망한 류지와 대학 동창인 안도는 류지의 사체를 부검하게 되는데, 들어낸 장기 대신 채워 넣은 신문지가 삐져나와 178 136 이라는 숫자가 나타난다. 안도는 숫자를 환자식 암호법으로 풀어보고 RING이라는 글자가 되는 것을 발견한다.

류지의 사인은 심장 관동맥에 일종의 종양이 자라나 죽은 것이었는데 동료 미야시타와 조사를 진행하던 중 그것이 천연두 바이러스와 인간 유전자의 혼합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같은 원인으로 사망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것이 일종의 바이러스는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한편 전편의 아사카와는 링 바이러스의 저주를 푸는 것이 테이프를 복사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아내와 딸 대신에 장모와 장인에게 비디오를 복사하여 보여준다. 하지만 복사하는 것이 저주를 푸는 방법이 아니었던지 아내와 딸이 링 바이러스에 의해 사망하고 아사카와는 의식불명이 되어 병원에 입원한다. 또 류지의 여자친구였던 다카노 마이가 류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비디오를 발견하고 호기심에 이를 보고 마는데, 그 후로 마이가 실종된다.

안도는 다카노 마이가 연락이 끊기자 마이의 방에 갔다가 내용이 대체된 비디오 테이프를 발견한다. 그리고 전편의 요시노에게 대략의 사정을 전해 들은 후 링 바이러스에 관한 내용을 아사카와가 문서로 정리하였음을 알게 된다. 아사카와의 유품을 조사하여 링 바이러스에 관한 문건을 모두 읽은 안도는 그간의 사정을 알게 된다.

링 바이러스로 사망한 사람들의 DNA를 조사한 결과 류지의 DNA에만 같은 문자가 반복되는 것을 보고 다시 환자식 암호법으로 풀어낸 결과 MUTANT, 즉 변종이라는 단어를 발견한다. 그리고 사라졌던 다카노 마이가 변사체로 발견되고 부검을 한 의사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준다. 그녀가 아이를 낳고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안도는 의문을 품는다. 왜 아사카와와 다카노 마이는 링 바이러스로 사망하지 않았는가? 사망한 사람들의 조직을 전자현미경으로 분석한 결과 반지 모양의 바이러스가 정충 모양의 바이러스로 변형이 되어 배란기였던 마이의 난자와 결합하여 무언가를 낳았다. 마이가 낳은 것은 무엇인가?

안도는 관계를 가졌던 마이의 언니가 사실은 되살아난 사다코라는 사실에 경악한다. 링 바이러스가 아사카와의 경우에는 뇌로 침입하여 그의 의지를 조정하여 문건을 써내게 하였고, 마이의 경우에는 난자를 이용하여 수태를 한 것이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아사카와의 형은 문건을 이용하여 소설을 출간하려 하고 있다.

사다코는 안도에게 자신이 하려는 일을 방해하지 말아달라면서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자웅동체의 몸을 가진 그녀가 안도의 잃어버린 아들을 다시 살아나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안도는 사다코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한다. 그리고 대담하게 세상의 종말을 보고자 했던 류지 역시 사다코는 되살려낸다.

 

전편의 비디오는 이제 책이라는 형태로 변모하려 하고 있고 곧 음악, 게임 소프트, PC 네트워크 어느 곳으로든 침입하여 미디어와 사다코가 교배하여 수많은 배란기의 여자들이 사다코를 낳을 것이다. 다종다양한 DNA가 야마무라 사다코라는 하나의 DNA로 수렴해 단일화 되는 것을 진화로 볼 수 있을 것인가?

DNA가 다양하다는 것이 곧 인류의 진화의 원동력이다. 근친간의 결혼이 열성 유전자의 계승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이를 부정하고 진화에 일종의 의지를 개입시키게 되는 순간부터 진화에 가치판단을 하게 한다. 나치의 유대인 말살, 그리고 이와 전혀 다를 것 없는 유대인의 선민사상을 바탕으로 한 팔레스타인 학살 등이 모두 이런 배경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링 바이러스가 아니더라도 매스 미디어를 통해 획일화된 인간들이 이미 양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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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꾼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재필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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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레텐부르크로 여행을 온 자고랸스끼 장군 일행은 호화로운 객실을 빌려 생활하고 있으나 실상은 빚에 쫓기고 있다. 장군은 블랑슈라는 프랑스 여인에게 반해 결혼을 하고자 하나, 그녀는 장군이 곧 받을지도 모를 유산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인인 드 그리외 역시 장군에게 빚을 받기 위해 머물고 있다.

주인공 알렉세이 이바노비치는 장군 일가의 과외선생으로 장군의 양녀인 뽈리나에게 빠져있다. 하지만 그녀는 드 그리외에게 반한 듯 보이기도 하고 영국인 미스터 에이슬리에게도 호감을 보인다. 알렉세이 이바노비치는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죽음도 불사할 것을 거듭 다짐하며 뽈리나의 진심을 알고 싶어 하나 그녀의 태도는 냉담하기만 하다. 하인이 된 것과 같은 모욕감을 느끼면서도 알렉세이는 그런 상황 자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느 날 죽음을 맹세하는 알렉세이에게 뽈리나는 길거리에서 남작을 모욕하라는 요구를 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 결과 해고 당한다.

장군 일행은 모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으니 자신들에게 유산을 물려줄 할머니의 죽음이다. 그들은 할머니의 죽음을 문의하는 전보를 줄기차게 보내는데, 부음(訃音) 대신 할머니가 직접 룰레텐부르크로 여행을 온다. 실망하는 장군 일행에게 독설을 퍼붓던 할머니는 룰렛 도박에 빠져들어 거액을 잃은 후 장군에게는 한 푼도 남겨주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모스끄바로 돌아가고 만다.

할머니의 확실한 의사표시로 블랑슈는 파산한 장군을 떠날 결심을 하고 드 그리외 역시 뽈리나를 버린다. 드 그리외에게 5만 프랑의 빚을 지게 된 뽈리나는 알렉세이의 방을 찾아오고, 알렉세이는 그날 밤 룰렛 도박에서 엄청난 돈을 딴 후 뽈리나에게 5만 프랑을 건낸다. 절망적으로 몸을 맡겼던 뽈리나는 다음 날 표변하여 알렉세이에게 돈을 집어던진 후 광증이 일어 미스터 에이슬리에게로 가고 만다.

전날 도박판에 자신의 운을 맡겼던 알렉세이는 이번엔 엉뚱하게 블랑슈를 따라 프랑스로 가 두달 만에 모든 돈을 써버리고, 프랑스로 뒤따라온 장군과 블랑슈가 결혼하자 또 다시 도박판을 전전한다. 빚을 지고 감옥에 갖히는가 하면 남의 하인 비슷한 일을 하는 등 재능을 낭비하던 알렉세이는 우연히 미스터 에이슬리를 다시 만난다. 그리고 뽈리나가 사랑했던 것은 자신이었다는 것을 전해듣는다.

 

출판사에게 자신의 저작권을 9년간 저당잡히고 27일만에 썼다는 작품으로 작가 자신의 체험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첫번째 아내 마리야와 별거 중 여대생 아뽈리나리야 수슬로바를 만나 여행을 떠나는데, 먼저 파리로 출발한 수슬로바는 그곳에서 알게된 스페인 의대생에게 몸을 맡기고 얼마 후 버림을 받는다. 도스또예프스끼는 그녀에게 다시 사랑을 구하지만 그녀의 태도는 이중적이었으며 작가는 심한 애증을 느낀다. 또 여행 중 도박에 빠져 헤어나오질 못했으며 전 부인, 형, 뚜르게네프 등 여기저기 돈을 빌려 도박에 탕진한다. 

 

도스또예프스끼는 각 나라의 인물을 통해 러시아가 처한 상황을 묘사하는데 질서가 잡힌 독일과 고상한 형식을 갖춘 프랑스에 비해 러시아는 꼴사납고 품위가 없으며 격렬하고 성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때문에 러시아인들은 부의 축적을 단순간에 이루기 위해 도박에 빠져들고, 그런 러시아인들의 성격에 들어맞는 것이 룰렛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러시아인들의 그러한 행태의 이면을 알렉세이의 다음과 같은 대사로 파악한다. "러시아인들은 그 재능이 너무 많고 다양해서 자신에게 알맞은 형식을 발견하지 못하는 거에요. 여기서 문제는 바로 형식에 있습니다. 우리 러시아인들은 대부분 풍부한 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절한 형식을 갖추기 위해서는 천재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도박과 애증, 그 두가지가 동시에 주인공 알렉세이에게 작용하여 그의 행동 방향은 예측하기가 어렵고 극단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도스또예프스끼는 그런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도스또예프스끼에 관해 토마스 만은 "도스또예프스끼는 육체와 영혼의 고귀함보다는 불행과 악덕, 욕정과 범죄에 기독교적인 공감을 보인 작가였다"고 하였다. 인간의 마음 속에 신과 악마가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는 도스또예프스끼 소설의 주인공들을 움직이는 것은 다름 아닌 욕망이고, 이 욕망에 관해 꼰스딴찐 모출스키는 "욕망은 결코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도, 한 인간에 대한 존경도 아니다. 그것은 불합리하고 악마적이고 파괴적이다. 또한 그것은 치명적인 자기 살인 행위이다"라고 말한다.

 

사랑이 그 형태를 지배에의 욕망으로 변화시키는 시작은 부정, 혹은 부정에의 의혹이다. 그 순간 사랑이 끝났음을 인정하지 못할 때에 사랑은 지배에의 욕구로 변화한다. 타인에 대한 욕망이 지배에의 욕구로 충족되기 위해서 나 자신의 죽음이나 상대편의 죽음, 그것이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하건 기억의 왜곡을 통한 정신적인 압살을 의미하건, 죽음 외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있는가 생각해 본다.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성당에 갔다. 신부님의 말씀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용서라는 것은 있었던 일을 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았던 마음의 상처와 아픔까지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뽈리나의 진심을 알지 못하고 애증에 빠져 죽음을 수시로 입에 담게된 알렉세이 이바노비치는 도박을 통해 그런 애증 상태를 해소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도박은 도박 자체로 알렉세이를 놓아주지 않았고, 돈을 따고 잃는 것보다 도박장으로 향하면서 느끼는 흥분 자체에 탐닉하게 된 알렉세이 이바노비치에게 들려온 소식은 뽈리나가 사랑한 것은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지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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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을 뛰어넘는 사람 대산세계문학총서 97
페터 슈나이더 지음, 김연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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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가인 주인공 '나'는 서독에 살고, 때때로 동독으로 여행을 떠난다. 여자친구 레나는 동독 출신으로 '나'와 처음엔 '지각한 내용의 판단을 두고서만 다투었으나, 나중에는 지각작용 자체를 두고 싸우'는 상태이다. 서독으로 이주한 동독출신 작가 로베르트, 동베를린에 거주하는 작가 포머러와 교류하는데 그들과 '나' 사이엔 보이는 장벽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장벽도 존재하고 있다.

'나'와 친구들의 대화 속에는 장벽을 뛰어넘는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 집주인 샬터는 아프리카에서 오기로 한 연인(하지만 오지 않을 것임에 분명한)을 기다리며 동베를린의 공짜 전화를 쓰다가 마침내 동베를린으로 넘어가버린 사람이고, 카베라는 사람은 삶이 권태로워서 열다섯번이나 장벽을 넘은 인물이다. 서독에서 개봉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세명의 젊은이가 열두 번이나 서쪽으로 장벽을 넘는가 하면, 동독에 복수를 하려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양쪽 비밀경찰의 끄나풀이 되고 결국 자기가 어느쪽 간첩인지 헤깔리게 된 발터 볼레의 이야기도 나온다.

이 와중에 열두번이나 서독으로 영화를 보러 갔지만 매번 동독으로 돌아온 점으로 보아 조국에 대한 확고한 충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는 동독 변호사의 말이나, 존재하지 않는 국경을 넘은 것을 처벌할 법률이 없어 정신감정을 실시하는 것 외에는 처벌을 못하는 서독측의 입장 등 희극적인 요소들이 생겨난다.

장벽을 넘는 사람들은 동쪽에서 서쪽으로만 넘는 것이 아니라 서쪽에서 동쪽으로도 넘는다.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권태와 부조리를 참지 못하는 것은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이다.

 

남북분단의 상황에 처해 있는 남한 독자인 나로서는 동-서독을 가로지르는 장벽을 DMZ와 비슷한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소설을 읽으면서 한동안 어리둥절 했었다. 이러한 혼란은 역자 해설을 읽어보고 나서야 해소되었는데, 분단도시 베를린은 1961년 까지는 상호 이동이 비교적 자유로워 매일 5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아무 문제없이 서로 넘나들었다고 한다. 동베를린 사람이 서베를린의 극장이나 디스코텍을 방문하였고, 서베를린에서 일하고 장을 보는 것이 일상해 속했는데 1961년 8월 12일 당시 동독의 국가원수 발터 울브리히트가 동-서 베를린 간의 국경을 닫으라고 명령함으로서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이 분단 상황은 1989년 11월 9일까지 계속된다. 이러한 사정으로 동독에서는 장벽을 국경으로 간주하여 엄중히 감시한 반면에 서독은 장벽을 국경으로 인정하지 않아 기껏해야 불법적으로 세워진 장애물로 치부하였다고 한다. 이는 장벽을 넘는 행위에 대한 처벌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동독에서는 범법행위로 처벌한 반면 서독에서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거나 치기로 인한 행동으로 치부하였던 것이다.

 

주인공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머리속의 장벽을 허무는 일은 눈에 보이는 장벽을 허무는 데 드는 시간보다 훨씬 오래 걸릴 것이고 바람에 있어서는 동독 작가인 포머러와 자신 모두 국가로부터 거리를 취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들을 교육시킨 체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없을 것이라고. 그리고 내가 시민으로 살고 있는 국가(서독)가 과연 내 조국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진다. 만일 국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독일인이라 대답할 것인데, 그것은 동독도 서독도 아닌 한 나라의 역사와 모국어를 지칭하는 차원일 뿐이라고. 

결국 장벽의 동쪽과 서쪽 어느곳도 자신의 조국이 아니라 한다면, 장벽을 뛰어 넘거나 장벽 위에 서 있는 것이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도가 될지도 모른다.

 

대표적인 68세대 작가인 페터 슈나이더는 예술의 선동적 기능을 강조하던 입장을 포기한 대신 문학적 공간에 현실의 정치적 사건과 이데올로기를 투사하며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새로운 문학관을 표명하였다고 하며, 베를린 삼부작으로 불리는 <렌츠>, <에두아르트의 귀향>, <장벽을 뛰어넘는 사람들>을 써내며 68학생운동에 관한 나름의 정리작업을 해왔다.

 

책을 다 읽은 후 <1968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의 독일 함부르크 편을 다시 들춰보게 되었다. 서독의 급진적인 학생들은 토론할 권리, 질문할 권리, 의견 차이를 드러낼 권리를 위해 투쟁하며 '자유 세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는 경찰폭력과 검거로 이어졌고 1967년 6월 벤노 오네조르크(Benno Ohnesorg)라는 학생이 사망하기에 이른다. 학생세력은 거세게 반발하였고 체제에 대한 거부감이 확산되었다. 당시 학생들이 나누어준 변형된 주기도문이 인상 깊어 적어둔다.

 

우리의 자본이시여,

서방 세계에서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투자가 임하옵시며,

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월 스트리트에서도

이익을 내고 이윤을 증가시켜 주옵소서.

우리에게 일용할 자본의 회전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의 채권자들에게 신용을 베푸는 것처럼

우리의 신용을 늘리게 하옵소서.

우리를 파산하지 않도록 하옵시고,

노동조합의 위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

지난 200년 동안 이 세계의 절반은 권세 있는 자들과

부유한 자들의 것이었사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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