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 문학과지성 시인선 230
진동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동규는 1945년 전북 고창 출생으로 국어 교사와 미술 교사를 했으며 시인이자 화가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은 그가 살고 있는 전주 지방 풍경과 견훤, 이성계, 정몽주 등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 동학 혁명과 광주민주화항쟁, 정여립의 난 등 역사적 사건에 대한 감상, 그리고 꽃과 별, 눈과 산 등 자연에 관한 완상을 노래한 시집이다.

1부에서 백제 장수 견훤에 대해 노래하는데 <눈썹 끝에 연꽃 피는 - 덕진채련> 에서

젊은 장수 견훤은 반월성 짓고 눈 눈 지그시 앉아 눈썹 끝자리쯤 해서 연못을 팠습니다.... 아마도 무왕 대에 현신하지 않은 미륵을 당신은 꼭 보리라 믿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하는 것을 보면 사뭇 흠모의 정이 느껴진다. 실패했지만 그의 의지는 미륵세상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까지 평가하는 것을 보면...

한편, 이성계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깎아 내리는데 <좁은목 약수를 마십니다 - 한벽청연>에서

도조인지 익조인이 환조인지, 아무튼 이태조 웃할아버지는 소싯적 전주천 한벽당 돌아 병풍바위 밑에 소낙비를 피하다가 그 바위 무너지는 순간에 빠져나와 목숨을 구했답니다. 저고리도 벗어던지고 빠져나왔습니다만, 피하지 못한 동네 아이들은 그 자리에 다 죽고 말았답니다

라며 동네 사람들이 약숫물이라며 줄을 서서 떠다 마시는 좁은목에 대해 연관된 고사를 들먹이며 빈정댄다. 기막힌 운을 타고 나서 너는 살아남았을지 몰라도 그때 아이들은 죄다 깔려 죽었는데 거기 솟아나는 약수가 한을 품지 않았겠느냐 하는 으스스함마저 느껴진다.

시인은 그림도 그리는데 그러한 시각적 정서와 청각적 요소가 시에 담겨 즐거움을 준다.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

솔 꽃가루 쌓인

토방 마루

소쩍새 울음 몇

몸 부리고 앉아

피먹진 소절을 널어

말립니다

산 발치에서는 한바탕

보춘화 꽃대궁 어지럽더니

진달래 철쭉 몸 사르더니

골짝 골짝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

쌓인 송홧가루

밭은기침을 합니다.

<가을 도드리 2>

하늘과 땅 사이를

기차 하나가 지납니다

누런 들과

푸른 하늘을 가릅니다

세상은 미완성의 수채화

첫사랑의 뒷모습 같은

머플러 한 장 나부끼며

기차 하나

그림 속을 갑니다.

겨울산에서 하산하면서 완상에 잠기는 시인의 모습을 그린 <겨울산 어둠은>도 반복해서 읽게 된다.

<겨울산 어둠은>

산을 내리는 우리 걸음보다

몇 발 앞서 명명한 어둠이 갔다

뒤돌아보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못 들은 척하는 것인가?

멈칫거리는가 다시 보면

저만큼 가고 있었다

내리막을 거침없이 훑다가도

농부들이 흘리고 간 것들까지

무엇하나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골짜기의 마른 고춧대, 무명대

꺾인 억새 잎에도

북 장단 두어 번 잊지 않고

매김하고 갔다

마른 싸릿가지 꺾인 채로

어둠 속을 버티어 있는 것을 보고는

봉우리에 첫눈 내리던 날

자작나무 늘어서서

휘파람 불던 이야기도 전해주었다

산비탈에 누운 고사목 고자빠기

'라'음으로 마른기침을 했다

아득히 산 너머

눈 소식이 오고 있었다.

팬지꽃은 80년 5월 광주 시가지에 피었던 꽃이다. 시인이 전주가 아닌 광주를 노래한 시 세 편이 있다. 그중 한 편을 옮겨 적어본다.

<팬지꽃 1>

광주에 가면

서성거리는 사람을 만난다

충장로에나 금남로에나

특별한 일이 없어도

거리에 나서는

얼굴이 팥죽 같은 사람을 만난다

밤늦은 시간에도

옷 깨끗이 다려 입고

짖어대는 자동차

끄떡도 않고

골목골목을 둘러보며

길을 걷는 사람을 만난다

바람 부는 날도

말 한마디 없이

무등산 아래 지산동까지

팬지꽃 한 송이까지 챙기며

서성이는 사람을 만나다.

제6부는 그 빈자리 연작인데 마음을 끄는 시 한 편을 옮겨 적어본다.

<낙숫물 -그 빈자리 6>

깊은 밤 나를

깨우는 것은

아득한 빛

유년의 사금파리처럼

낭자한 빗줄기의

끝, 먼 강을

건너며

가슴으로

낙숫물.

<문학과 지성사> 창간 맴버인 평론가 김치수는 해설 <고향에서 부르는 행복의 노래>에서 이렇게 쓴다. 소설가와 시인을 구분하는 독특한 시각이라 기록해둔다.

소설가는 삶의 고통이나 불행을 그 뿌리부터 결말까지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면 시인은 그러한 지속적인 삶 속에서 부딪치거나 발견하는 기쁨과 행복의 순간을 포착하고 이를 노래하는 사람이다... 소설가는 자신이 살았던 고향이 사라졌고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자신의 불행의 근원을 찾고자 한다. 반면에 시인은 모든 사물에서, 그리고 어디에서나 자신의 고향의 모습을 재발견하고 그때마다 행복을 노래한다... 소설가는 불행을 이야기하기 위해 태어난 비극적 운명의 소유자라면, 시인은 매순간의 삶에서 행복을 발견하고 노래하는 초원적 세계관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진동규는... 전주... 고향에 사는 행복을 누리고 있고 그것을 노래하는 드문 시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