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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용의자
찬호께이 지음, 허유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4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41세의 무직 남성이 사망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구조대원은 숯이 피워진 그릇, 외부 침입 흔적이 없는 점 등을 근거로 남성의 사인을 자살로 결론 짓는다.
하지만 철수 직전, 옷장에서 크기가 제각각인 원통형 유리병 스무개 남짓이 발견되면서 사건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유리병 안에 인간의 팔다리와 장기가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피해자는 최소 2명. 남성과 여성으로 추측되는 두 시신은 보존된 시기가 달라 보였다. 문제는 셰바이천이라는 이 남성이 20년간 화장실 딸린 방 안에서만 생활한 극단적 은둔형 외톨이라는 데 있었다. 어머니는 물론이고 옆집 사는 30년지기 친구이자 추리소설가인 칸즈위안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과연 시신은 누구인가? 셰바이천은 이들을 죽인 범인일까? 만약 그렇다면 동기가 무엇일까? 경찰의 집요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실마리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게다가 유력한 용의자로 점찍었던 칸즈위안의 알리바이가 확실해지자 사건은 오리무중에 빠지고 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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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린궈원(람궈완)이라는 택시운전기사가 경찰에 체포된다. 죄명은 연쇄살인. 택시운전사였던 그는 4명의 여성을 납치하여 강간 살해하였고, 이 과정을 비디오로 촬영하거나 사진 찍어 현상하였으며, 성기 일부를 플라스틱 용기에 담고 술에 절여 보관하는 등 엽기적인 행각을 벌인 인물이다.
그가 체포된 것은 어이 없게도 사진 현상을 맡겼다 들통 났기 때문이다. 친구가 운영하는 현상소에 필름을 맡겼는데 공교롭게 기계가 고장나는 바람에 친구가 다른 현상소에 필름을 건냈고, 현상과정에서 기괴한 범죄 현장을 본 직원이 경찰에 신고하여 검거된 것이다. '유리병 살인 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이 <고독한 용의자>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이다.
20년 전 쉐바이천은 불치병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절친 칸즈위안에게 자신이 죽은 뒤 그 사실을 숨겨 달라고 부탁한다. 외할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맨션을 호시탐탐 노리는 외삼촌이 자신이 죽게되면 어머니를 꼬드겨 소유권을 빼앗아갈 것이 틀림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리병에 든 첫 번째 시신은 쉐바이천이다. 칸즈위안은 쉐바이천이 죽기 직전 일상 생활에서 주고 받을 만한 대화들을 녹음기에 녹음한 뒤 쉐바이천이 퇴사 스트레스로 은둔형 외톨이가 된 것처럼 설정하고 쉐바이천이 죽은 뒤에도 그의 어머니를 속이기 시작한다.
한편, 칸즈위안은 과거 불 난 건물에서 '더듬이'라는 별명의 친구 아위안이 도와준 덕에 목숨을 건진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사고로 '더듬이'는 아버지를 잃었고, 갈 곳 없게 된 '더듬이'는 칸즈위안의 집에서 얹혀 살게 되었다.
그러다 쉐바이천이 죽자 '더듬이'가 쉐바이천 역할을 하면서 그 방에 살게 된다. 진짜 은둔형 외톨이는 '더듬이'였다. 그러다 '더듬이'가 궈쯔닝이라는 여성과 웹상에서 친구가 된 뒤 서로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는데, 궈쯔닝이 쉐바이천의 집에 왔다가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궈쯔닝은 쉐바이천의 외삼촌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다 이를 비관한 것이었다. 궈쯔닝이 바로 두번째 유리병의 시신이었다.
찬호께이는 만약 쉐바이천이 20년간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면 범죄도 저지를 수 없다는 대전제를 독자에게 제시한 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내면서 전제를 깨나가는 방식으로 소설을 진행시킨다. 이 수법은 때로 절묘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무리한 방식으로 여겨진다.
쉐바이천 역할을 하던 '더듬이'가 자살하고 시신이 담긴 유리병이 발견되면서 자살사건은 살인사건으로 방향 전환된 뒤 모든 증거들이 쉐바이천의 외삼촌을 향한다. 이 과정에서 서술 트릭, 바꿔치기, 시점전환 등 미스터리 소설의 각종 기법이 현란하게 구사되는데 기술적 측면에서는 훌륭하다. 하지만 20년을 못 봤다 해도 '아들을 구별 못하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과연 독자에게 얼마나 어필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13.67>이 그의 전성기이고 이후 죽 내리막이 아닌가 싶은 불안감이 이번 작품에서도 확인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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