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라우마. 가정 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주디스 루이스 허먼 (지음) | 최현정 (옮김) | 사람의집 (펴냄)
가정 폭력, 아동 학대, 강간을 비롯한 성적 학대와 폭력은 뉴스와 신문 기사의 자극적인 제목을 떠올리기 어렵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이고 강력하며 혐오스런 범죄임에 틀림없다.
뉴스와 신문 기사를 보지 않는 사람들도 이웃의 이야기로 다가서는 티비 프로그램인 꼬꼬무(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나 알쓸범잡(안아두면 쓸데있는 범죄 잡학사전) 등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트라우마>에 수록된 외국의 사례들이 아니더라도 데칼코마니처럼 닮아있는 학대와 폭력의 사건들은 우리들에게도 있어왔고 어디에선가는 아직도 그로인한 고통이 진행중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도가니>와 <한공주>는 사회적 약자이기에 당했던 폭력의 피해와 더불어 약자이기 때문에 그 책임도 지우려 했던 비겁한 강자들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어째서 지탄받고 처벌받아야 할 가해자들 대신 손가락질 받고 숨어야 하는 것은 피해자들 이어야 하는 것일까.
얼마전 다시보기 서비스로 보았던 알쓸범잡 시즌2의 성폭력 사건들 중 인상깊게 남은 사례가 있다. 지금은 70대의 할머니가 되셨지만 19살에 당할뻔한 성폭행의 시도에 강한 저항으로 상대남의 혀를 물어 절단한 사건이다. 상대남은 성폭행 시도가 성공하지 못해 기소조차 되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지키려했던 19세의 소녀가 상해죄로 실형을 살게 된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몇 번의 강산이 변할만큼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자신의 정당방위를 주장하고 싶은 최씨 할머니는 재심을 신청하였으나 기각되었다. 그럼에도 당당했던 할머니의 마지막 인터뷰가 기억에 남는다. "피해여성들이여, 숨지말고 나오라."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흘러 십 수년을 의붓 아버지에게 몹쓸 일을 당해온 딸은 남자친구와 함께 의붓 아버지를 살해하는 범죄를 저질렀지만 지금의 재판부는 최씨 할머니 때의 재판과는 다른 판결을 내렸다.
잊을만하면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강력 범죄들은 낯선 사람들로 인한 것보다 평소 알고 지낸 지인과 가족들로 부터 당한 고통이라는 것이 더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이런 경우 개인이 감당하고 이겨내야 할 트라우마 또한 몇 배 아니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크기일 것이다.
정신적인 트라우마는 육체의 상흔과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꾀병이라 무시되거나 "마음 약한 네 탓"이라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피해자를 향한 비난이 쏟아지기도 한다. 왜 사회적인 관점에서는 가해자를 향하는 지탄과 처벌의 목소리가 개인의 시각에서는 피해자를 향한 뒤돌아선 수근거림과 따돌림이 되는 것일까.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은 피해자들과 그들을 도우려는 치료자 사이의 신뢰는 형성되기 어렵거나 감정이 전이되는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정신과 의사들도 같은 맥락에서 주기적으로 서로를 진료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책에서 본 적이 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경험과 기억은 타인의 눈에는 별거아닌 사소한 일들부터 지상파 뉴스를 오르내리는 심각한 범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트라우마에 갇힌 피해자들이 트라우마가 불러들인 또다른 트라우마에 갇히지 않길 바란다. 침묵과 방관 대신 관심과 도움을, 가십처럼 수근거리는 뒷말보다는 진정한 위로가 필요한 그들에게 더이상의 책임전가와 죄책감을 주지 말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