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라스무스 평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 정민영 (옮김) | 원더박스 (펴냄)
에라스무스가 원하는 것은 평화, 평화뿐이다. 어느 편에도 들지 않고 비켜서 있겠다는 것, 평온뿐이다.
"나는 나의 평온을 원한다."
- 에라스무스 평전, 본문 중에서
에라스무스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보다는 얼마전 읽었던 발자크 평전과 같은 저자인 슈테판 츠바이크에게 더 이끌려 읽게 되었다. '동일한 저자가 맞나?'싶게 분위기가 사뭇 달라 다소 당황하기도 했지만 저자의 자전적인 이야기나 허구의 소설이 아닌 실제 인물의 평전이니 오히려 그것이 더 당연하겠다는 생각이 이제사 든다.
'의지의 자유', '생각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에라스무스가 유일하게 증오하던 것이 이성에 반하는 정신인 광신이었다. 지식과 학문에 대한 열정이 인정받지 못하고 카톨릭의 영향이 거의 유일했던 중세시대에 종교인이었음에도 광적인 믿음 대신 대립과 마찰없이 자신의 자유를 획득하는 자세는 당대의 극단적인 종교인들의 눈에 곱게만 보여졌을리 없다. 교황과 루터의 종교개혁 사이에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립적인 그의 태도는 공격받기도 쉬웠다. 자유를 추구하는 에라스무스에게 결정은 어느 쪽이더라도 구속이었을테다.
중립을 지키는 그의 태도가 어찌보면 극단의 우유부단함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후텐의 부탁을 거절하는 방법조차도 빙빙돌려 하는 그의 어법에 가슴이 답답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교황과 카톨릭의 부패를 개혁하고자 했던 루터마저도 광기에 사로잡힌 모습으로 변화되어 간 것을 보면 허약하고 과민한 신체조건까지 가졌던 에라스무스가 취할 수 있었던 자기만의 방어법이었을 수 있겠다란 이해도 된다. 공격적인 비판과 파괴적인 폭력보다는 해학과 조소로 종교개혁에 대한 요구를 <우신예찬>을 통해 세상에 얘기한다. 글을 통해 세상의 인정을 받고 권력자들이 그를 얻기 위해 애쓴다. 아무래도 박쥐처럼, 철새처럼 지조없이 구는 인사들보다는 중립을 지키는 자의 한마디가 더 큰 힘을 가질테니 말이다.
에라스무스의 뜻에 따르면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사람, 인간애를 생각하는 사람은 어떠한 이데올로기와도 결탁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이념은 그만의 주장에 따라 헤게모니 싸움을 벌이기 때문이다.
- 에라스무스 평전, 본문 130페이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이해하고 타협하는 삶. 분리가 아닌 결합을 장려하던 에라스무스였으니 서로 자기 편에 끌어들이려하는 난장판 속에서 그토록 추구했던 자유를 지키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신체적인 조건과 성격 등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었던 루터와의 관계도 계속되서 거론된다.
루터에게 이 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종교였고, 에라스무스에게는 인간이었다.
- 에라스무스 평전, 본문 162페이지
평온을 원했던 에라스무스의 중립을 세상은 가만 놔두지 않았다. 공격하고 비난했다.
나치를 피해 망명을 해야했던 츠바이크가 에라스무스 평전을 통해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에라스무스의 중립 그 자체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광기와 극단, 폭력 등에서 휩쓸리지 않은 에라스무스가 아니었을까. 그 혼돈의 시대에서도 평화와 화합을 바랬던 그를.
에라스무스의 시대에도 있었고, 츠바이크의 시대에도 존재했던 폭력과 혼돈이 과연 지금은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