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와 달빛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8
세르브 언털 지음, 김보국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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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와 달빛

세르브 언털 (지음) | 김보국 (옮김) | 휴머니스트 (펴냄)

살아남아야 한다. 폐허 속의 들쥐처럼 그 또한 살아남을 것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것. 인간은 살아 있어야 항상 뭔가가, 여전히 뭔가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 여행자와 달빛, 본문382페이지

여러 장르의 문학에서 인생을 소풍이나 여행에 비유하곤 한다. 소풍이나 여행을 떠나기 위해 준비하면서 불운을 기대하고 험상궂은 날씨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뜻한 햇볕과 기분좋을 만큼의 바람, 예상하지 못했던 반가운 이들과의 우연한 만남 등 행복으로 연결되는 것들을 바라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긴 여행에서 좋고 이쁜 것들만 보고 경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하이의 인생이 온통 검은 밤 뿐이라면 그 밤을 밝혀주는 달빛은 누구이고 무엇이었을까.

소용돌이를 느끼는 증세로 힘들어하던 그에게 빛처럼 나타났던 터마시와 그의 여동생 에버와 함께 보낸 어린시절의 일탈은 미하이에게 다른 친구를 만들 기회를 주지 못한채 그들 남매에게 우정 이상의 우정, 사랑 이상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죽음을 연기하던 이들의 놀이 같은 연극은 삶도 죽음을 동경하게 되는 어둠으로 미하이를 물들인다. 미하이는 자세한 정황을 알 수 없는 터마시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 종적이 묘연해진 에버와도 소식이 끊기며 (에버를 찾으려 했다면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과거의 기억은 묻어둔 채 살아왔다. 에르지와의 신혼여행지에서 세페트네키와 만난 이후 과거의 기억은 그를 다시 어두운 심연으로 끌어당긴다.

미하이는 다른 도시로 이동하던 중 실수로 에르지와 다른 기차에 오르며 우연처럼 찾아온 운명에 옛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내게 자신감과 힘을 주지만 내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 그것은 나 스스로를 경멸하게 했고, 나를 파괴시켰지.

- 여행자와 달빛, 본문 77페이지

사랑할수록 피폐해지는 사랑이 있다. 에버를 향한 미하이의 감정이 그런 것이지 않았을까. 사랑이라 믿었지만 사랑이 아니었으며, 사랑이 아니라 부정하지만 사랑이었던.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로 강요당하며 살았던 미하이에게 가장 영웅적인 '자기 혹사'는 결혼이었다. 탈진으로 쓰러진 그에게 의사가 이유를 묻자 미하이는 대답했다. "아무것도 한 것은 없어요. 그냥 살고 있었던 것뿐이에요." 스스로의 의지를 상실한채 살아가는 것이 탈진의 이유라는 것이 참으로 서글프다. 터마시의 죽음을 동경하며 죽음에 이르고자 하던 미하이는 바니니의 조카 영세식에 초대되어 현실과 구분짓기 힘든 환상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난 뒤 삶에 대한 의지를 확인한다.

에르지는 야노시에게 속아 페르시아인에게 팔린 후 도망쳐 나와 자신이 가야할 길을 깨닫는다.

환한 낮의 달빛은 밝지 않다. 칠흙 같은 어둠에서는 흐린 달빚도 밝게 느껴진다. 미하이가 거닐었던 어둠, 에르지가 졸탄에게서 벗어나 향했던 어둠. 그 어둠에서 더 깊은 어둠을 직면하고서야 그들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함께가 아닌 각자로, 떠나올 때와는 다른 자신이 되어서. 이제는 누군가의 삶, 누군가의 죽음을 동경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내가 지나고있는 이 어둠도 달빛에 의지하다보면 동이 터오리니, 어둠속에서 어둠과 나를 분리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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