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1
페터 한트케 지음, 윤시향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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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페터 한트케 (지음) | 윤시항 (옮김) | 문학동네 (펴냄)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의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얇아서 금방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과 달리 초집중을 하며 읽어도 주인공인 약사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나의 의식이 흩어지는 묘한 일이 반복되었다. 약사의 의식과 그가 겪은 모험 등이 현실과 비현실, 생각을 오가는 흐름에 적응하는 것이 익숙하진 않았다.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가 처음 출간되었을 때 독일 매체들이 상반된 평가를 내렸다고 한 이유를 알겠다. 쉬운 소설은 아니지만 매력있는 소설임에는 틀림없다.

페터 한트케를 검색해보니 낯익은 제목의 소설들이 눈에 띄었다. <패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그리고 <관객모독>. 20년전 대학로에서 봤었던 <관객모독>은 형식이 파괴된 개성이 강한 연극이어서 쉽지 않았으나 연극이 끝나고 난 뒤의 벅찼던 감동과 환희를 또렷이 기억한다. 아~!! 그 <관객모독>이 페터 한트케의 작품이었구나! 쏟아지는 듯한 말과 넘쳐나는 생각들, 이 독특한 소설의 흐름이 작가의 스타일임을 알고나니 어렵다는 생각도 잠시,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고요함과 외로움, 고립감이다.

주인공인 약사가 운영하는 독수리 약국이 위치한 탁스함은 온갖 운송 노선에서 소외된 자투리땅으로 지형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이웃한 도시의 사람들에게도 잊힌 곳이다.

약사는 아내와 한 집에서 별거 중이며 아들은 내쫒았고 딸은 남자친구와 휴가를 떠나는 등 가족과는 심리적으로 단절된 상태다. 다정함이나 친근함은 탁스함에서도 약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다.

공항근처의 숲에서 누군가에게 머리에 타격을 받은 후 실어증에 걸리지만 그는 말을 되찾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를 느낀다.

더는 말을 할 수 없다니 잘된 일이야.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아도 돼. 이건 자유야! 아니 그 이상이지, 아주 이상적인 상태야!

-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본문 121페이지

그러나 그토록 그가 찾아 헤매이던 승리자 여인은 말을 되찿기를 권한다. 실어의 상태가 의식의 전환을 가져오긴 했으나 적극성을 잃은 포기와 적응으로 도태될 것을 경고하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계속되는 고립과 단절도.

당신의 침묵은 결코 침묵이 아니에요. (중략)실어상태가 계속되면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 그토록 의미 있어 보이는 현재가 실현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전의 모든 체험까지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파괴될 거에요

-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본문 169페이지

탁스함과는 상반된 곳, 산타페에서 약사는 헤어졌던 아들을 만나고 이곳에서 시인도 자신의 사생아 딸을 만난다. 만남과 화해를 통해 약사는 죄책감을 내려놓고 스텝 지역으로 떠난다.

승리자 여인을 만나 그녀의 도움으로 말을 할 수 있게 된 약사는 집으로 돌아와 떠나기 전 읽다 만 서사시 "아이바인"을 다시 읽기 시작한다.

떠나기 전과 돌아온 후의 그는 달라졌을까? 이웃을 향한 그의 관심과 가족을 위해 일하는 그의 모습에서 변화를 본다.

실어의 상태와 후각을 통한 자아찾기. "되돌아가느니 차라리 죽을 테다!"던 약사는 깨달음을, 또다른 자아를 찾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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