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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처 마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9
윌리엄 골딩 지음, 백지민 옮김 / 민음사 / 2022년 10월
평점 :

핀처 마틴
윌리엄 골딩 (지음) | 백지민 (옮김) | 민음사 (펴냄)
죽음을 목전에 두고 기적같은 생환을 했던 사람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지나온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혹은 주마등처럼 머리속을 스쳤다'는 것이다. '찰나'라고 표현되기도 하는 짧은 시간에 그동안 살아오며 겪은 무수히 많은 경험의 기억들이 무의식적으로 떠올려진다는 건 이성적으로 생각해봤을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처럼 보인다.
죽음을 바로 코 앞에 직면했을때 떠올리게 되는 과거의 기억은 저질렀던 잘못들에 대한 후회와 반성도 뒤따르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지 않을까. 그러나 이런 인간적인 고뇌와 후회를 핀처 마틴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난 살아남을거야", "난 오늘 구조될거야", "난 지성적이다", "난 너무 외로워". 망망대해에서 바위로 된 무인도에 표류해 기억과 상상을 오가는 날들에도 크리스토퍼 해들리 마틴, 핀처 마틴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내에게는 오로지 자기 중심적인 생각 뿐이며 지난 과오에도 무엇이 그리 떳떳한지 뻔뻔하기 이를데 없다.
총 14장으로 구성된 핀처 마틴의 이야기는 "살려 줘"로 시작되어 13장에 이르기까지 홀로 살아남은 핀처 마틴의 외로움과 지난날의 기억, 끝까지 살아남기 위한 강한 집착을 보여준다. 핀처 마틴의 시선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의 서술은 마지막 14장에서 시점의 전환과 더불어 소름끼지는 반전으로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개봉 직후 보았던 톰 행크스 주연의 <캐스트 어웨이>와 포스터가 강렬했던 영화 <127시간>이 떠올랐던 <핀처 마틴>. <캐스트 어웨이>에서 톰 행크스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윌슨이 <핀처 마틴>에서는 돌로 만든 난쟁이가 대신하고 있다.
남의 여자를 탐하는 핀처 마틴의 비뚫어진 인간성을 작가 윌리엄 골딩은 시작부터 그의 턱관절을 경첩이라 칭하면서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어쩌면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핀처 마틴이 처한 조난에 독자가 보낼 안타까움과 위로를 차단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엘프리드의 여자인 시빌을 탐하고, 연출가 피트의 아내인 헬렌과 놀아나고, 거부하는 메리를 강제로 욕보이며 너새니얼에 대한 질투는 실수를 가장한 살해 욕구로 불태우는 핀처 마틴에게 과연 동정받을 가치가 있을까. 단 한가지 후회가 있다면 너새니얼을 죽음으로 완벽하게 몰아넣지 못한 10초 늦은 타이밍 뿐이랄까.
살아온 날들에 대한 반성과 참회보다는 다가오는 죽음이 두려워 망상을 시작한 핀처 마틴에게서 현실을 부정하며 현실에는 없는 사이버 공간으로 도피해버리고 마는 사람들을 겹쳐본다. 끝없는 자기합리화가 우겨댄다고 해서 진실이 되고 정의가 될 리 없다.
"마틴은 심지어 방수 장화를 벗어 던질 짬도 없었습니다."(본문 287페이지) 그럴 짬도 없었던 그 급박한 순간에 그가 느꼈던 외로움과 구조에 대한 갈망은 삶에 대한 집착 그 자체다. 그러나 결코 자신의 뜻대로 움켜쥘 수는 없었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