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르타반
헨리 반 다이크 (지음) | 차영지 (옮김) | 내로라 (펴냄)
걸림돌이라고만 생각했던 순간까지도 목적의 본질에 다가서기 위해 꼭 필요한 순간이었던 것을 어렴풋 깨닫게 된 것이다.
-<아르타반> 본문 119페이지
목적의 본질과 수단 중 더 중요한 것들을 잊고 살아갈 때가 많다. 한치 앞을 보느라 바빠 보다 멀리를 내다보지 못하고 처음의 목적을 잊은채 엉뚱한 곳에서 헤매인다.
한 집안의 가장은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일터로 향한다. 가족의 부양이라는 것이 결코 먹고 자고 입는 의식주에만 해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들이 주는 따뜻함과 가족들간의 연대, 화목, 사랑이라는 본질을 위해 수단과 방법이 되어질 뿐이다. 그러나 더 많이 벌기 위해 가족과의 시간을 줄이고 나아가 마음의 거리까지 멀어진다면 수단 앞에 본질은 퇴색하고 만다.
꿈을 위해 공부하는 청소년들도 꿈을 위해 수단이 되어야 하는 학업이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본질은 사라지고 수단만이 남는 현실은 어른이 되어서도 길을 잃고 헤매는 미아를 만든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동방박사 일행과 동행하고 싶었던 아르타반이 길을 떠난 후 만나게 된 사람들의 어려움을 모른척 지나쳤더라면 그의 여행이 33년이나 걸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여정을 함께하자고 권유했던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들은 바빠서, 여행을 하기엔 나이가 많아서, 종교의 본질과 달라서 등의 여러가지 이유로 아르타반과 함께하기를 거절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떠났던 아르타반의 길은 예수의 죽음에 이르기까지도 그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르타반은 헛된 노력과 의미없는 고행의 길을 걸었던 것일까.
사파이어, 루비, 진주를 품고 떠났던 길. 예수가 아닌 병들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쓰인 보석들이
처음 마음 먹었던 여행의 본질에서 멀어졌다 말할 수 있을까. 선택의 순간에서 아르타반이 내린 결정이 종교인이 보여야할 종교와 신앙의 진짜 본질임을 생각한다면 보석들의 가치는 본연의 가치보다 더 귀하게 쓰였음이 틀림없다.
신앙적 기대와 실천적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던 아르타반의 선택은 신을 위해 준비한 선물을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었다. 예수의 처형일에 마지막 남은 보물 마저도 사람을 구하기 위해 쓴 아르타반에게 과연 신은 서운함이나 분노를 보였을까.
본질보다 수단과 방법, 보여주기 위한 겉치레에 더 치중하다보면 본질에 닿기는 커녕 애초에 닿으려하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잊을 수 있다. 아르타반이 찾아 헤맨 것은 나사렛 가족의 아이가 아니라 별로 상징되는 구원자였듯이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고 길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종교의 관점에서 교훈을 주는 아르타반의 이야기는 종교를 벗어난 삶의 모든 부분에서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각자의 삶 속에서 추구하는 갈망은 다르지만 선한 삶, 행복이라는 본질은 같지 않을까? 본질을 추구하기 위해 행하는 방법 자체에 스스로를 옳아매는 어리석은 집착을 하고있지는 않은지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