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삶의 음악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 삶의 음악

안드레이 마킨 (지음) | 이창실 (옮김) | 1984books (펴냄)

시인 피천득 님은 우리의 인생을 '아름다운 소풍'이라고 표현하셨다.

인생을 여행이나 마라톤에 비유하는 것은 비교적 익숙하지만 음악과 인생을 나란히 두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어울리지 않는 듯 하지만 악보 위의 음표와 부호들이 잘 어우러져야 하모니가 되듯이 하나하나의 인생도 다른 인생들과 시대적 상황에 맞물려 돌아가는 화음이 중요한 길고 긴 음악임에 틀림없다.

호모 소비에티쿠스. 체제가 만들어낸 인간의 종.

꿈을 가진 한 청년의 미래가 정치와 전쟁의 소용돌이에 원치않는 휩쓸림을 당해 그 꿈과 젊음이 사라지는 피를 토하는 심경의 아픔은 과연 그들만의 이야기일까.

살기 위해 밀고하고 출세를 위해 거짓도 만들어 내는 인간의 본능과 야욕. 정치가 무언지도 모르고, 체제와 이념이 무언지도 모른채 한줌의 쌀을 배급받기 위해 나갔던 부역이 이유가 되어 빨갱이로 몰리고 한맺힌 죽음을 당해야 했던 나이 어린 가장들과 여성들, 전쟁 고아들의 억울함이 우리에게도 그리 멀지 않은 역사의 한 켠에 있다. 죽은 자의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베르그의 사연을 이해하고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는 이유이다.

여우를 피하러 들어간 굴에서 호랑이를 만난다고 했던가. 어디인지 모를 수용소로 끌려갈 위기를 피해 타인의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베르그가 맞닥뜨리게 된 현장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죽음이 넘쳐나는 전쟁터였다.

살아남기 위해 했던 선택에 나를 숨기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꿈에서조차 철저하게 나를 부정하며 살아야 하는 불안과 거짓된 삶은 과연 살아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억눌러온 피아니스트의 꿈을 살짝 건드려 볼 기회에도 아무것도 모르는척 연기를 해야 했고, 사랑하는 여인이 생겼음에도 자신을 보호해왔던 가짜 신분이 오히려 벽이 되고 말았다. 피아노를 연주하며 산산이 조각난 과거를 헤치고 그간의 불행과 공포를 잊은 베르그는 자신으로 돌아갔다.

이쪽도 저쪽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베르그의 삶은 죽은 군인의 옷을 입던 그 순간에 정지해 있었다.

'전쟁 전에는-'. 세르게이 말체프로 살아가던 알렉세이 베르그는 전쟁 전을 생각하며 베르그로의 귀환을 결심했는지 모른다. 지나온 과거를 돌이겨보며 '그때'를 돌아보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각자의 그때가 모두 다를 뿐.

지금도 이유와 이름을 달리한채 여러 곳에서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과 각자의 삶이라는 치열한 전쟁이. 수용소에서 십년을 보냈지만 베르그로 살 수 있었기에 어쩌면 노년의 베르그는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젊음과 함께 꿈도 멀리 가버렸지만 불안과 거짓의 삶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니.

130페이지의 얇은 소설이 1300페이지 만큼의 여운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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