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피아빛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6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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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피아빛 초상

이사벨 아옌데 (지음) | 조영실 (옮김) | 민음사 (펴냄)

기억은 허구다. 우리는 부끄러운 부분은 잊어버리고 가장 밝은 부분과 가장 어두운 부분만 선택하여 인생이라는 융단에 수를 놓는다.

-세피아빛 초상 본문 430페이지

출생의 비밀을 안은 이야기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제다.

뻔히 보이는 비밀을 당사자만 몰라 지켜보는 이들의 가슴에 꽉 막힌 고구마를 안기기도 하지만 사이다같은 결말을 보여주리라는 희망을 비치기에 일희일비하는 그들의 사연에 공감하고 안타까워하며 결말까지 함께하게 된다. 막장 스토리라며 입방아를 찧어대지만 막장의 기본인 사랑과 배신, 삼각관계, 출생의 비밀은 드라마에서 보다 고전문학에서 더 자주 등장하는 오래된 소재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세피아빛 초상>은 큰 기대없이 읽기 시작한 소설이다. 큰 기대를 가지고 읽었다가 빛 좋은 게살구마냥 실속없었던 베스트셀러들과는 달리 별기대없이 시작한 <세피아빛 초상>은 작가 이사벨 아옌데에 대해 검색하고 싶어질 만큼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운명의 딸>과 <영혼의 집>과 더불어 아옌데 3부작이라 불리우는 <세피아빛 초상>. 검색해보니 아옌데 3부작에 대한 극찬이 쏟아진다. 출간 순서로는 맨 마지막이지만 줄거리의 시간상 흐름으로 본다면 두번째라고 한다. 작년에 코맥 매카시의 <국경을 넘어>를 읽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국경 4부작처럼 이사벨 아옌데의 <세피아빛 초상>을 읽고 난 뒤엔 나머지 두권 <운명의 딸>과 <영혼의 집>에 대한 흥미와 궁금증이 더해졌다.

<세피아빛 초상>에는 여러 여성들이 등장한다.

여자와 가난한 사람은 아는 게 없어야 고분고분하다 생각되어지던 시대에 태어나고 자라 글을 배우지 못했던 파울리나는 사업적인 면은 타고났다고 할 정도로 앞을 내다보는 시야가 탁월했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무모하리만치의 용기와 강단을 보인 엘리사도 당대의 여성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타오 치엔과 엘리사의 딸 린 소머즈도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지만 어머니 엘리사 만큼의 현명함은 없었다.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하며 신여성의 목소리를 내는 니베아는 앞선 세 여성보다는 한 발 나아간 모습이지만 반복되는 임신과 출산은 가정이라는 한계를 가졌다.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이 사라진 아우로라 델 바예는 피네다 선생님에게 교육을 받으면서 이전의 여성들과는 다른 진취적인 지식인 여성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아우로라 주변에서 그녀의 인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거나 선택의 전환점을 맞게 되는 순간에는 남성들이 있었다. 부모없이 자라게 된 아우로라에게 자신의 성을 준 세베로,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이 모조리 사라지고 성인이 되어서도 원인 모를 악몽이 계속되었던 이유의 중심 외할아버지 타오 치엔, 결혼이 아니어도 사랑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진정한 사랑 이반 라도빅과 사진을 통해 새로운 세상과 또 다른 나를 알게 해 준 스승 리베로 그리고 새할아버지 윌리엄스는 타오 치엔이 살아있었다면 그러하지 않았을까 싶을 현명한 판단과 심정적 지원을 해주었다.

잃어버린 기억과 헤어져야 했던 사람들을 다시 찾고 만난 아우로라는 변화하는 시대만큼 달라진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왠지 아우로라는 그럴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사진과 글을 통해 정체성을 찾고 감춰지고 왜곡된 진실을 물리친채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말이다. <세피아빛 초상> 한 권으로도 좋았지만 아옌데 3부작을 모두 읽으면 더 완전한 감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출생의 비밀이 이토록 진부하지 않을 수 있다니, 박경리 <토지>의 칠레판을 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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