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은 잊을 수 없는 한 해다.
많은 책을 읽어오며 감동을 받기도 하고 많은 지식을 얻게 되고 지혜와 지성을 쌓으려 노력했지만 이렇다 할 인생책은 없던 내가 <웃는 남자>를 만나며 처음으로 인생책을 갖게 된 것이다. "언젠가는 재독하리라" 거듭 다짐하던 중 생각보다 빨리 그 기회를 맞았다. 처음 <웃는 남자>를 읽고 재독하기까지 딱 일년 반의 시간이 지났다.
책 한권이 이토록 사람을 휘어잡고 흔들 수 있을까? 주위의 사람들에게 <웃는 남자>는 꼭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추천에 추천을 강하게 했었고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감사였다.
빅토르 위고는 글을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기라도 한 듯이 아니 어쩌면 세상의 언어가 빅토르 위고를 위해 존재하기라도 한 듯이 한 문장 한 문장 빛나지 않는 문장이 없었다. 우리의 주인공 그윈플레인과 데아가 성인이 되기까지 그 앞에 펼쳐지는 많은 이야기들은 모르고 읽는다면 전혀 상관없는 장황설처럼 보인다. 실개천이 모여 강이 되고 바다에서 만나는 것처럼 연관없어 보이는 하나하나의 이야기들은 거대한 폭포를 앞둔 물줄기처럼 하나로 모아진다.
단 한 문장도 허투루 흘려 읽을 수 없는 이유. '복선의 대가'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빅토르 위고 만의 스토리 구성이 그 이유다.
베트맨에 나오는 악당 "조커"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웃는 남자>. 그 웃음 속에 가려진 비극이 참으로 반어적이다. 이 버림받은 아이들을 길러낸 우르수스의 화법 또한 그러하다. 인간혐오자인 그가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아이들을 그만의 방식으로 끌어안은 것이다. 이런 언행불일치라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아름답겠지.
인간의 잔인성은 스스로가 그 잔인성을 자각하지 못하는데 있는 것 같다. 자신들의 웃음을 위해 아이들을 괴물로 만들고 필요가 다하면 언제라도 버리는 비정함. 그렇게 버려진 아이 그윈플레인이 눈밭에서 죽은 여인의 품에서 죽음에 전염되던 갖난 아이에게 뻗친 손길은 구원 그 자체였다. 가진 것이라고는 체온과 넝마같은 옷 한벌 뿐이었지만 그 전부를 내어주고 우르수스와 호모에게 가족으로 받아들여지는 장면은 마음에 깊이 남는다.
오로지 죽음만이 해방일 늪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그윈플레인의 웃음으로 현실을 잊었지만 정작 그윈플레인은 웃을 수 없었다. 괴물같은 외모가 그윈플레인에게는 저주이자 축복이었다. 데아가 앞을 볼 수 없음 역시 그러했다. 불구와 기형이 만들어낸 사랑은 세상의 그 어떤 다른 이들의 사랑보다 완벽하고 아름다웠다. 그윈플레인은 추한 용모로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고, 데아는 앞을 볼 수 없으니 영혼을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머문 안식처가 우르수스의 오두막이라는 것이 최상의 기적이 아니었을까?
모르고 읽었던 처음과 달리 결말을 알면서 읽는 <웃는 남자>는 또다른 느낌이다. 처음에는 가슴으로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감동이었다면 이번 재독에는 습자지에 스미는 감동이다. 그 변치않는 감동의 한 가운데 "우르수스" 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