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NOON세트] 벨낀 이야기
알렉산드르 뿌쉬낀 (지음) |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펴냄)
러시아 소설은 처음 발을 들여놓기가 어려웠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다른 외국문학에 비해서도 무척 헷갈렸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와 도스또예프스키로 입문한 러시아 문학은 이제 제법 익숙해지면서 뿌쉬낀의 <벨낀 이야기>까지 읽게 되었다.
<벨낀 이야기>지만 벨낀은 등장하지 않는다. 도입부 발행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벨낀은 이미 고인이 된 상태다. 벨낀이 생전에 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것을 다섯편의 단편으로 묶어 내어놓는 형식인 것이다. 말하자면 액자 구성인 셈인데,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 연결되는 부분이 없는 독립적인 이야기다. 그렇다면 뿌쉬낀은 왜 5편의 단편으로 발표하지 않고 <벨낀 이야기>라는 하나의 틀로 묶었을까? 이야기들은 서로 연결되는 부분이 전혀 없지만 뿌쉬낀이 얘기하고 싶은 그 무엇은 하나의 의미를 공통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지막 한 발"에서의 주요 인물인 실비오는 가난하면서 씀씀이는 헤프다. 초라한 토담집에 어울리지 않는 값비싼 권총을 수집하고 방 벽면을 과녁삼아 사격을 해대는 것이 일과다. 미스테리한 사연을 가진 듯한 실비오는 언제인지 모를 결투를 위해 절치부심이었던 것이다. 후에 벨낀은 그 결투의 상대인 백작을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진실을 알게된다.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된 결투는 상대가 가장 행복한 순간에 복수를 마치기 위해 마지막 한 발을 아껴두었던 것이다. 결투의 본질과 다른 비신사적인 행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실비오는 자신의 목적을 이룬다. 백작이 가장 행복하고 잃은 것이 생겨 두려운 순간에 등장해 치욕과 고통을 주었으니 말이다.
"눈보라" 역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야반도주와 다른 결말이다. 집안의 반대에 부딪힌 사랑하는 젊은 한쌍의 성공적인 야반도주가 아니라 눈보라로 길을 잃은 남자와 엇갈리고 만 신부는 엉뚱한 남자와 결혼을 하고는 정신을 잃는다.
"장의사"에 이르러서야 뿌쉬낀의 의도가 보인다.
64. 교양있는 독자라면 셰익스피어와 윌터 스콧 모두가~ (중략) 진실을 존중하는 우리는 그들의 전례를 따를 수 없으며~(중략)
해피엔딩과 교훈을 주는 다른 문학작품들과는 다르게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황당함과 우연, 때로는 악의 승리 등을 솔직하게 쓰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역참지기"에서도 딸인 두냐는 아버지 몰래 손님이었던 경기병 민스끼와 도망을 한다. 노인은 건달의 꾐에 빠져 결국은 버림받을 딸 걱정을 하다 죽지만 두냐는 아버지의 사망후 귀부인이 되어 돌아온다.
"귀족 아가씨-시골처녀" 역시도 기본 스토리 라인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시키지만 결말은 정반대다. 고전문학에서 보여주는 결말의 뻔한 틀을 뿌쉬낀은 사실에 근접하게 그려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