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독서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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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독서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펴냄)

어느덧 내 생의 날들에 가을이 오고 흰 여백의 인생 노트도 점점 얇아지고 있다. 만년필에 담아 쓰는 잉크는 갈수록 피처럼 진해지기만 해서, 아껴써야만 하는 남은 생의 백지를 묵연히 바라본다.

서문 중에서

열심히 살아온 40여년의 세월은 곧 나이 50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일까? 서문에 적힌 이 몇 줄이 책의 본글에 닿기도 전에 마음을 쥐었다가 놓는다.

800페이지를 훌쩍 넘는 이 책에 글보다 많은 여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마음을 꽉 채운다.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 있으면 인덱스를 붙여가며 읽다가 포기했다. 매 페이지마다 다 붙일 수는 없을 노릇이니.

파란 패브릭의 양장은 처음부터 눈길을 사로잡았다.

800페이지를 훌쩍 넘는 두께지만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고 책의 크기가 보통의 다른 책보다 작아 귀엽기까지 하다.

책을 읽으며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요즘 아이들은 "다꾸"라고 한다던데, 다이어리 꾸미기. 70년대 생인 나의 중학생 시절엔 문집 만들기라고 했었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 있으면 발췌 필사를 하고 감성 울리는 시가 있으면 베껴 적으며 그 옆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하고 풀잎이나 마른 꽃잎을 붙여 놓으며 나만의 책을 만들었었다. 박노해 님의 <걷는 독서>를 읽노라니 오래전 그 시절에 만들었던 문집이 떠오른 것이다.

박노해 님의 <걷는 독서>의 페이지마다 적힌 글귀는 글자 수보다 많은 철학을 담고 있었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글자보다 많은 지면을 차지한 여백이지만 그 여백이 의미없는 빈자리로 보여지기 보다는 내가 채워야 하는 사색의 공간으로 생각되었다.

사진전도 열었던 분이라더니 글귀 옆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사진에서도 향기가 나는 듯하다. 아마도 그 분이 걸어오신 인생이 향기나는 삶이어서 그러기라도 하는 듯이.

글자만을 읽는다면 한시간도 안되어 뚝딱하고 완독할 책이지만, 읽다 쉬다를 반복하게 된다. 한 단어, 한 문장, 한 글귀, 한 행간마다 많은 되새김질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바쁘게 살아가는, 그러나 매일이 별반 다를 것 없는 똑같은 일상 속에서 우리는 얼만큼의 쉼표와 그 쉼표에 의미있는 시간을 보태었을까?

걷는 독서. 제목만 보았을 때는 걸으면서도 읽어야 한다는 독서의 중요성에 대한 가르침의 조언일거라 여겼는데 달리기하듯 살아가는 일상에 걸음만큼 느린 속도와 집중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음미하고 느끼는 과정을 생략하면서 어쩌면 우리는 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생략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숨을 헐떡이며 오른 산의 정상에서 깊은 숨을 들이쉬며 폐 깊숙히 신선한 산소를 불어넣듯이 글귀 하나하나 가슴으로 곱씹으며 영혼에 새 공기를 불어넣어 본다.

책의 뒷 표지에 적힌 글이 오늘따라 유난히 깊이 새겨진다. "마음아 천천히/ 천천히 걸어라/ 내 영혼이/ 길을 잃지 않도록"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박노해 님의 사진전에도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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