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런 벽지
샬럿 퍼킨스 길먼 지음 / 내로라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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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런 벽지

샬롯 퍼킨스 길먼 (지음) | 차영지 (옮김) | 내로라 (펴냄)

표지를 찬찬히 들여다보니 벽지 앞에 서 있는 여자의 위로 벽지의 무늬가 겹쳐진다. 할 말이 있지만 할 수 없는 표정이다.

사람으로 대접 받지 못하고 남자의 부속물이나 집안의 장식품처럼 대해지던 여성들의 시대. 그런데 벽지라니, 더더구나 누렇게 빛바래고 찢겨져 볼품없고 관심에서 밀려난 벽지라니, 그녀의 처지가 표지 그림 한 장으로도 짐작되고도 남는다.

일기의 형식을 빌어 소설 속 여인의 상태와 심리를 엿볼 수 있다. 우울증과 일시적인 신경 쇠약의 진단을 받은 그녀는 의사인 남편의 처방으로 보호와 휴식이라는 이름으로 외부와 단절된다. 좋아하는 글쓰기도 남편의 눈을 피해 몰래 이뤄진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방안의 벽지를 쳐다보는 일 뿐이다. 처음에는 흉물스럽게 느껴지던 벽지에서 날이 갈수록 다른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한다.

67. 저 벽지 안에는 무언가가 있어. 아무도 모르고 오직 나만이 알아본 무언가가.

그건 마치, 허리를 굽히고 무늬 뒤를 기어 다니는 여인 같아 보여.

벽지 안에 갇힌 여자는 뚫고 나오려 애쓰며 무늬를 흔들어 댄다. 벽지의 무늬가 탈출을 막는 쇠창살이기라도 하듯이.

<93. 하지만 아무도 무늬 사이를 통과할 수가 없어. 무늬가 목을 조르거든. 내 생각엔 저기에 저렇게 많은 머리가 걸려 있는 이유도 바로 그거야.>

이제 그녀는 벽지 속 여자와 한 편이 되어 벽지를 뜯어낸다. 누런 벽지 속 여자를 탈출 시키며 자신이 탈출하고 싶은 욕망을 대리 실현하려했던 것 같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남편은 이런 광경을 목격하곤 기절하고 만다. 기절한 남편의 몸을 기어서 넘어가는 것으로 마지막 열한 번째 일기는 끝이 난다.

벽 아래쪽 걸레받이 근처에 방을 빙 둘러 난 흔적, 누군가가 문지르고 또 문지른 것 같은 얼룩과 침대 프레임을 물어뜯은 자국은 어찌해 볼 수 없는 현실을 탈피하고픈 그녀 이전의 또 다른 그녀들의 몸부림의 흔적이었던걸까?

산후 우을증으로 힘들었던 작가 샬롯 퍼킨스 길먼의 개인적 경험과 삶이 많이 녹아든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리게 하는 주제지만 풀어나가는 방식은 다르다.

지금도 여전히 뜨거운 감자인 페미니즘. 가부장제와 남녀평등 그리고 역차별. 그 미묘한 줄다리기와 차이 사이에서 길을 잃지 말아야 한다.

짧았지만 역시 깊었던 '내로라'의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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