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 톨스토이 사상 선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홍창배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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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 
레프 톨스토이 (지음) | 홍창배 (옮김) | 바다출판사 (펴냄)​





사람은 틀림없이 죽음에 이르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죽음이 자신은 피해가기라도 하듯이 잊고 살거나 혹은 애써 무시하며 불멸할 듯이 살아가고 있다.
책을 관통하듯 반복되는 악은 계속해서 거론되며 악을 악으로 갚지 말 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며 거듭한다.
믿음을 목놓아 부르는 이들 중에는 그 믿음을 위해 기도를 해왔고, 하고 있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도 있다. 열가지 앎과 다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더 중요하다. 나아간다고 백번을 생각한들 한 걸음 내딛는 행함이 없다면 결국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악은 선으로 갚으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개인의 삶과 공공의 일원으로서의 삶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할 때  무저항의 계율을 거부해야 하는 순간이 적지 않다. 신의 법칙과 인간의 법칙 사이에서 고민하는 양심적 병역 기피도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한 난제이다.
타인의 죄에 대해 비판하지도 정죄하지도 말라고 하지만 각종 범죄가 난무하는 현대에 사회 지도층에서 이런 마음가짐이라면 악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국민들은 어디에 기대고 호소해야 할까?
톨스토이가 말하는 율법과 신앙에 대해 그와 같은 믿음을 나는 보일 수가 없다. 톨스토이 자신도 신앙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지금 내가 가진 생각의 대부분을 했다고 고백하고 있으니, 아직 나의 덕이 부족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재판을 통한 사형도 살인일 뿐이고 남을 판단하는 재판도 판단 자체가 죄가 된다면 신앙 안에 정의는 없는 걸까?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이론적인 가르침 앞에 변화하지 않는 악에  끝없이 감정의 쓰레기통이나 노예로 이용되어지는 정신적 피폐함은 어찌할 것인가?
폭력을 악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믿고 있는 '신앙'에 대한 교리를 제멋대로 해석하며 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거짓들도 또한 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소한 단어 하나의 번역 오류와 누락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해석의 다름을 유도했다. 같은 신앙서를 읽으면서 각기 다른 해석과 받아들이는 이유를 톨스토이는 이것을 이유로 보고 있다. 그래서 사소한 단어 하나, 문구 하나에 집중을 했나 보다.

​《123. 너희는 악으로 악을 없애려고 한다. 이는 영리하지 못한 것이다.악이 없으려면, 악을 행치 않으면 된다.》

구약에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한다. 이것은 악을 악으로 갚는 복수가 아닌 악을 참을 것은  주의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헙박인건가? 애초에 갚을 악이 존재하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 어떤 불의도 없고 죄도 없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율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무저항의 계명과 반대되는 율법이다.
모세나 그리스도의 율법,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대신에, 둘  다 신성한 진리라고 인정하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실생활에서는 그리스도의 율법을 거부하고 모세의 율법만을 인정하는 오류를  가진다.


신을 믿으며 신앙안에서 톨스토이가 진정 행복하였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나는 그가 믿는 종교를 그리고 신을 믿지 않지만 나 역시도 행복하니 그것으로 되었다. 
믿음안에서의 사랑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내려가 낮추어 함께 보는 것이라고 한다. 귀족지주 출신으로 청년 장교까지 거친 톨스토이가 비슷한 신분의 사람들보다 농노폐지를 외치며 농민들과 더 잘 어울렸다는 사실은 그가 그의 말대로 행함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지만 간음과 육체의 유혹에 금욕을 강조했던 것과는 달리 성욕과 도박으로 말년까지 쾌락주의자의 삶을 살며 아내와의 불화를 가졌던 걸 보면 부족함없는 그의 출신이 오히려 한계가 아니었을까 싶다.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바다출판사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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