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을 찾아서 - 상 - 京城, 쇼우와 62년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3
복거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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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갑자기 정전이 되는 통에 휴게실에 앉아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누다가 나온 역사 얘기가 이 소설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영화 '2009년 로스트 메모리즈' 얘기도 나왔지만, 그거야 설정만 아주 살짝 빌려 쓴 정도에 불과하니 별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복거일 씨가 이 소설의 얼개를 짜 맞춘 솜씨는 참으로 경탄할 만합니다. 이리저리 배치해 둔 설정들이 이 '대체 역사 소설'에 마치 진짜 역사처럼 보일 정도로 생동감을 불러 일으키는 걸 보면 작가의 역량을 확연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 대해 '대체 역사 소설'이라는 독특한 아이디어에만 너무 집중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SF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틀에 불과한 것일 뿐, 거기에 담겨 있는 주제와 사상은 결코 인간과 동떨어진 '가짜'가 아닌데도 그 '틀'에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빛나는 아이디어는 대체 역사 소설이라는 형식보다는 주인공이 '시인'이라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언어를 사랑하고 갈고 다듬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선조가 사용하던 잃어버린 진짜 언어를 마주할 때의 충격은 상상이었을 것입니다. 시인으로서의 존재 가치라 할 '언어'가 부정된다는 것은 주인공에게는 자신의 존재 의미 자체가 없어지는 것과 같았겠지요. (이런 점에서 영화 로스트 메모리즈와는 차원과 품격이 다르죠.) 소설 후반부에 주인공이 다소 파멸적인 행동을 하는 것도 그가 바로 시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로서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겪은 셈이니, 더 이상 잃을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이또 히로부미가 죽지 않았다면'이라는 기발한 설정이 아니라, '남의 언어로 시를 짓던 시인이 자신의 언어를 마주하게 된다면'이라는 비극적인 설정에서 착안했을 이 소설에 '어느 시인의 비극'이라는 부제를 붙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京城, 쇼우와 62년'이라는 상황 설정이야말로 이 시인의 비극을 강조하기 위한 사소한 주변 장치에 불과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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