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도 새소설 18
김엄지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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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 기온이 두 자릿수를 기록한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다.
바람도 강하게 불어 체감온도는 더더욱 낮았다.
패딩에 쌓인 부분은 괜찮았지만 밖으로 드러난 손과 얼굴은 세찬 바람에 베인 듯 쓰라렸다.
얼어붓다 못해 팡, 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올겨울은 비교적 따뜻한 편이어서 그런지
오랜만에 찾아온 강추위가 유독 혹독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할도가 떠올랐다.
오소소 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몸의 안과 밖으로 세찬 바람이 스쳐갔다.

벨 할, 섬 도.
비가 잦고 빗줄기가 거세 뺨에 맞으면 살갗이 베인다는 곳, 할도.

나는 저 두 문장에 미친 듯이 끌렸다.
어떤 이야기가 담길지 읽고 싶어 몸이 아플 정도였다.
왜 그토록 갈망했을까, 이 섬을.

아버지의 발인이 끝나고 나는 겨울의 할도를 찾았다.
그곳을 찾으라는 말이 있었으나 이제 그 이유는 영영 들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오래된 섬.
창이 자꾸 얼어붙고 얄팍한 이불밖에 없는 숙소.
바의 여주인, 바에서 마주친 A와 B, 늙은 의사, 식당의 늙은 직원.
묘한 분위기의 사람들.

21p
할도의 또 다른 이름은 충동섬이라 했다.
나에게는 충동이 없고.
아니 없는 듯 있었기 때문에 너절했다.
나는 그것을 해결하고 싶었다.

섬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좀처럼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다.
극복할 수 없을 것만 같다.

92p
사람은 왜 태어나 슬픈 기억을 하나쯤 만들고.
시간이 지나면 그걸 추억이라고 부르기도 할까요?

페이지를 펼치면 나는 할도에 있었다.
소금기를 가득 머금은 바다 냄새가 풍기고
세찬 바람이 불어와 정신이 혼미했다.
사나운 파도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하고
자꾸 오한이 들며 눈꺼풀이 무거웠다.

몇 글자 되지 않는, 언뜻 보면 가벼워 보이는 문장 속에서
자주 길을 잃고 내리는 비에 얼굴을 긁혔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힘이 강한 이야기다.

언젠가 쥬지오를 찾아 여주인과 A와 B, 노의사를 만나보고 싶다.
그 자리에 이야기 속 나도 있으면 좋겠다.
우린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코끝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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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세계 -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곤충들의 비밀스러운 삶
조지 맥개빈 지음, 이한음 옮김 / 알레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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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건물 외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아지랑이처럼 어떤 움직임이 포착되어 두 눈의 포커스를 맞췄다.
쌀알 2개 정도 크기의 밝은 갈색빛의 거미가 어딘가로 이동 중이었다.
순간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내 시선은 나와 너무 다른 존재에게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한동안 거미의 이동을 지켜보다가 시야에서 사라지려는 거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잘 가렴.

어쩌다 보니 연거푸 곤충에 관련된 책을 읽게 되었다.
그래서 작디작은 친구들에게 전에 없이 마음이 간다.

곤충강은 모든 동물종의 4분의 3을 차지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숫자를 자랑한다.
다양한 종류만큼 이 책에는 곤충들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 있다.

작은 생물들의 존재에 대해 무지했던 나머지
캘리포니아콘도르를 보호하려 했던 기생충 제거 과정이
되려 종을 멸종시켜버리는 결과를 초래한 사례는 아주 마음이 아팠다.

지구에서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히는 곤충 중 하나로 잘 알려진 사막메뚜기는 의외로 식성이 까다로운 미식가이고, 혼자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지만 가까이 밀집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특정 거리 내에 있는 개체들끼리 서로 보조를 맞추어 함께 움직이는 양상을 띠게 된다는 이야기는 너무 흥미로웠다.

뿔매미들은 약 3,500종이 있으며 남아메리카에서 유달리 다양하게 진화했다.
정말 기이한 모습을 한 개체들도 있는데 진화의 결과치들 또한 아주 재미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인식의 문이 활짝 열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디작은 미생물이나 기생충부터 눈에 보이는 동식물들까지.
지구에 이렇게 다양한 존재들이 같이 살아간다는 사실에 괜히 혼자 마음이 훈훈했다가
다른 생명체들에게 인간이 가한 수많은 폭력의 과정과 결과치를 생각하면 납덩이를 삼킨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진다.

제발 우리 같이 좀 삽시다.
잘못을 바로잡읍시다.
우리는 지구의 주인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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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방은 빛을 쫓지 않는다 - 대낮의 인간은 잘 모르는 한밤의 생태학
팀 블랙번 지음, 한시아 옮김 / 김영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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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좋아하세요?
저는 좋아하는 편입니다.
좋아하진 않더라도 크게 싫어하진 않으시죠?
대부분이 그럴 거예요.
그럼 나방은요?
지금 나방이란 글자를 보자마자 미간에 주름이 파바박, 하고 생겼나요?
제가 딱 맞췄죠?
무안해하지 마세요.
저도 딱 그랬거든요.
왜 과거형이냐고요?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거든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요?
재미있는 세계를 엿보게 된 덕분에요.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그럼 제 얘기 한 번 들어보실래요?

여기 나방을 너무도 사랑하는 생태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나방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처음엔 참 별난 사람일세, 하며 페이지를 넘기던 저는
어느새 나방 사진을 보고 이렇게 말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너무 귀엽잖아!

앞서 나비와 나방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요.
우린 일반적으로 나비와 나방을 구분하지만
나비는 사실 낮에 활동하는 나방의 하위군에 속한다(33p)고 합니다.
새롭고 흥미로운 지식을 시작으로
다양한 나방의 모습과 너무도 찰떡같이 붙은 이름들에 홀딱 빠져듭니다.
영국의 매미나방이 미국으로 건너가
어마 무시한 파괴자의 모습으로 대재앙을 불러일으킨 사건도 인상 깊었습니다.

지구상에는 참 많은 생물이 존재한다.
지금은 모두 다양하고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우리의 조상의 조상의 조상을 거슬러가면 동물도 식물도 모두 같은 뿌리를 갖는 가족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유한한 자원을 공유하며 같이 살고 있다.
그런데 왜 인간은 지구가 인간의 소유물인 양 만물의 영장이라는 착각 속에서
그 어느 종보다 함부로 난폭하게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
우리의 잘못으로 많은 동식물들은 생존을 위협받는다.

우리는 100만 개가 넘는 다양한 동물종의 이름을 부여했지만
이는 전체 동물 종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33p)
이 행성에는 놀랍도록 풍부하고 다양한 생명체가 살고 있습니다(43p).

각각의 종은 모두 공통된 조상으로부터 이어지는 계통을 따라
변화하는 지구 환경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걸어왔다.
이 특별한 길은 그 역사와 결과 모두에서 모든 종이 특별하다는 것을 뜻한다.(45-46p)

이러한 변화 중 어느 것도 독립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개체는 생존하고 번식하기 위해
에너지와 물, 영양소 같은 자원을 필요로 한다.
일부는 환경에서 직접적으로 충족하지만
대다수는 다른 개체를 소비하거나 약탈 또는 기생을 통해
필요한 요소를 공급받는다.
이것이 바로 생태학을 정의하는 특징이라 여겨지기도 하는 상호 작용이며,
어떤 유기체도 다른 유기체로부터 독립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44p).

우리는 자원이 유한한 행성을 살고 있다(77p).
작은 개체군은 약간의 환경적 불운으로 쉽게 멸종될 수 있다(85p).

최근 이 작년에 새로운 배우가 등장해
모든 줄거리에 스며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배우는 개체군의 동태부터 공동체의 구조와 모든 지역의 다양성까지
생태계 작동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점점 더 중요한 동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줄거리를 새롭고도 달갑지 않은 방향으로 몰고 가며
따라서 그 영향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배우는 다름 아닌 우리 인간이다.(51p)

부디 더 이상의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고
지구를 위해, 인간을 위해, 다양한 형태의 동식물 가족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환경을 아끼는 우리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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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불행한 아이 문지 푸른 문학
유니게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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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두 아이가 있다.
성찬과 달아.

성찬은 교회의 베이비박스에서 발견되어 한 가정에 입양되었다.
아이에게 사랑은 그 사람이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기에
한순간도 자신의 위치를 잊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눌러 죽여서라도 가족에게 모든 걸 맞추려고 노력하며 살았다.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자꾸만 일그러지고 있는 중이다.

달아는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태어나 보니 아빠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미혼모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몸이 부서져라 일하다가 달아가 여덟 살 때 새아빠를 만나 꿈처럼 행복한 잠깐의 시간을 누린다.
이후에 동생 유지가 태어나면서 엄마는 극심한 불안과 우울에 시달렸다.
엄청난 속도로 무너져가는 엄마는 새아빠와 자주 다투었고
어느 날 더 이상 견디기가 힘들다며 새아빠가 떠났다.
엄마는 엄마의 동굴 안에 갇혔고
달아는 종종 옆집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으며 본인도 아이면서 어린 유지를 돌봤다.
와중에도 달아는 금요일 저녁이면 언제나 운동화를 빨았다.
마치 엄마가 챙겨준 것처럼 새하얗게 될 때까지 공들여서.
운동화만 하얗다면 누구도 자신을 비웃을 수 없다는 듯이,
운동화만 하얗다면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는 듯이.

각각의 평행선으로 존재하던 두 아이가 교차한다.
불행한 아이와 불행한 아이가 어느새 친구가 되어 있다.
한 사건으로 둘 사이는 다시 어긋나기도 다시 만나기도 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작가의 말을 보면 저자가 힘들지 않게 써 내려갔다는 말이 나온다.
그래서 그런지 가시 돋친 문장 없이 술술 잘 읽힌다.
나도 한 불행했다고 자처하는 아이였기에
찬과 달아의 마음에 크게 공감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달아 할머니의 태도와 말들도 가슴에 깊이 남았다.

언제 어느 세상에나 불행은 발에 차일 정도로 여기저기 산재해 있지만
부디 그 수렁에 너무 깊이, 오래 빠져 있지 않기를.
너무 열심히 애써서 몸도 마음도 빨리 소진되지 않기를.
긴장으로 가득한 몸에 힘을 빼고 마음에도 자주 환기를 시켜주며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다음 챕터로 넘어갈 수 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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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킷사텐 여행 - 존 레넌에서 하루키까지 예술가들의 문화 살롱
최민지 지음 / 남해의봄날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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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일까?
내가 그 시대의 공기를 누렸던 것도 아닌데
시간이 차곡차곡 쌓인 장소를 보면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그리움이 차오른다.
Y2K를 살아보지도 않은 MZ 세대들 사이에서
Y2K 스타일이 유행하는 것도 비슷한 느낌이지 싶다.

책을 펼친다.
이야기는 대학로의 학림다방에서 시작한다.
늘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 여태 한 번도 문턱을 넘지 못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봤던 터라
가본 적도 없는 실내 풍경이 실제 경험한 광경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귀하디 귀한, 오래된 다방.

그리고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도쿄에 있는 다양한 킷사텐을 한가득 풀어놓는다.
도쿄에서 유학했던 때라면 더 쉽게 갈 수 있었을 곳들이
한국에서 생활하는 지금은 멀게만 느껴지고
당장 욕구가 해소되지 않으니
드릉드릉 더 가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괴롭다.

짧은 토막으로 소개되긴 했지만
올해 1월 꾸역꾸역 다녀온 사보우루가 나와서
너무 반가웠다.
어마 무시했던 맥주와 나폴리탄의 사이즈.
많은 사람들의 시간이 응축된 듯 짙은 밤색의 테이블.
업무 중간 끼니를 해결하러 온 샐러리맨.
오랜 단골 분위기를 풀풀 풍기며 책을 읽던 중년의 여성.
장성한 아들과 마주 앉아 행복한 미소를 띠며 나폴리탄을 먹던 어머니.

아, 조금만 더 빨리 만났다면
지난 도쿄 여행을 훨씬 알차게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싶어 아쉽고 또 아쉽다.
하지만 다음 여행에서 가고 싶은 곳을 지도에 저장하며
내가 잘 모르는 새로운 도쿄,
킷사텐의 도시 도쿄를 기대하며
언젠가의 미래를 그리며
당장은 위안을 삼아야겠다.

한국도 무조건 다 때려 부수고
획일화된 건축이나 사업 방향으로만 내달리지 않고
오래되고 좋은 것, 오래돼서 좋은 것을
앞으로 잘 지켜고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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