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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재
오현일 지음 / 도서출판이곳 / 2026년 6월
평점 :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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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을 눈으로 따라가고 있자니
머릿속에는 익숙한 시골 풍경이 떠오른다.
인간은 경험한 세상의 크기만큼 보지 못한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고 했던가?
작가가 풀어내는 1980년대 해남의 작은 정착지 마을의 모습 속에서
나는 조부모가 한 평생을 살아낸 터전을 생각했다.
8p - 1. 1981 봄 中
누군가를 내려놓은 버스는 영감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송암리 쪽으로 달려갔다.
10p - 1. 1981 봄 中
흑두부 같은 초가집들이 저수지 방죽을 따라 기차처럼 일렬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16p - 1. 1981 봄 中
그날 밤, 나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밤 논에 쏟아져 나온 개구리 떼 울음소리가 자갈밭을 달리는 경운기 같았다.
천장 위에서는 쥐들이 운동회를 열었는지 떼를 지어 미친 경주마처럼 뛰어다녔다.
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나 빗자루로 천장을 후려갈겼다.
그러자 놈들은 사람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기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오히려 더 귓가에 사각거려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19 - 2. 우물 中
두레박 줄을 손바닥에 몇 번 감고, 나는 우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우물 속에서 동그란 하늘이 출렁거리는 바람에 현기증이 났다.
소설 속 화자 오수동은 열 두 살 소년으로
전쟁 피난민들이 정착한 해남의 땅끝에서 부모님, 형과 함께 살고 있었다.
매번 큰소리가 나는 집이 지긋지긋해 강호와 가출을 도모했지만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되었다는 친구의 배신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집으로 돌아온 길이다.
그런데 집에 모르는 남자가 있는 게 아닌가?
그 사람이 바로 아재다.
11p - 1. 1981 봄 中
집 앞에 한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짙은 카키색(내 기억으로는 그랬다.) 반코트를 걸친 도회풍의 남자였다.
길과 개울의 경계쯤에 위태롭게 선 그는 마을 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을 독서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하늘에 비친 얼굴이 거울처럼 맑았고, 까만 정수리에 쏟아진 햇살은 산산이 부서져서 은가루가 날리는 듯했다.
34p - 2. 우물 中
갸름한 얼굴에 그려진 방죽길 같은 턱선과 조각배를 닮은 입술,
깊은 자리처럼 움푹 꺼진 두 눈과 초가지붕 같은 검은 눈썹, 봄날의 밀밭 같은 머릿결.
비밀스러운 아재의 등장으로 수동의 세계는 크게 일렁이고
이후 이야기는 어린 소년의 눈으로 바라본 아재의 이야기가 빼곡하게 담겨 있다.
목수이자 작가인 오현일 저자의 이력이 특이한 만큼
새로운 비유가 많아서 신선하고 반가웠다.
9p - 1. 1981 봄 中
혼자라도 도망갈까 궁리를 해보았지만,
강호가 없는 나는 날개 부서진 풍뎅이나 다름없었다.
10p - 1. 1981 봄 中
정착지에는 없는 것이 많았다.
앞집도 뒷집도 없고, 담장이나 대문도 없고, 나무도 없고, 우물도 없고,
미래나 희망 따위도 없는 찢어진 고무신 같은 마을이었다.
11p - 1. 1981 봄 中
나는 창자 속 비밀까지 다 들켜버린 것 같아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12p - 1. 1981 봄 中
아버지는 근면한 무능력자였다.
몇 마지기 되지 않는 논과 밭에 겨울부터 가을까지 자신의 피와 땀으로 거름을 뿌렸지만,
한 해는 가뭄 탓에, 또 한 해는 물난리 탓에 농사는 늘 흉작이었고,
어디선가 그물처럼 끌어온 빚들은 이마의 주름살과 함께 늘어만 갔다.
14p - 1. 1981 봄 中
와지직! 그의 하얀 얼굴에서 종잇장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중략)
몹시 지친 듯한 두 눈은 공벌레처럼 작은 방 안을 헤맸다.
23p - 2. 우물 中
수레가 지나온 길에 뱀 꼬리처럼 긴 물 자국이 남았다.
물을 길어서 집으로 돌아가려면 물통에 담긴 물의 삼 분의 일은 통행세로 내야만 했다.
그것은 신작로의 법이었다.
통에 물을 많이 담든 적게 담든 간에 목마른 길은 언제나 삼 분의 일을 요구했다.
25p - 2. 우물 中
눈알이 바삭바삭 부서질 것 같았고 턱은 빠질 듯이 덜덜거렸다.
33p - 2. 우물 中
생경한 하모니카 소리가 내 등을 톡톡 두드렸다.
이건 뭐지? 하는 식의 호기심이 배불뚝이의 단추처럼 툭, 풀렸다.
55-56p 3. 상어 中
흙탕물은 도랑 표면에 빗물처럼 떨어졌고,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몽당연필처럼 서 있었다.
이 이야기는 글쓴이가 열 두 살에 구상했던 이야기가
소설의 형태로 갖추어졌다고 한다.
오랫동안 품고 있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은 작가의 마음인 어떤 것일지,
그런 배경으로 이야기가 부쩍 뭉근한 온도를 내내 품고 있는가 싶기도 하다.
약 340 페이지의 긴 분량이긴 하지만
앞서 언급한 수려한 문장들을 보는 재미와
읽는 리듬이 좋아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
더운 여름, 잠시 현실을 잊고 과거로 추억 여행 잘 하고 돌아온 기분이다.
차기작도 꼭 읽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