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왕국
김경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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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시인 마리 로랑생은 자신의 시 '잊혀진 여인'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을 잊혀진 여인이라 규정했다. 잊혀지는 아픔이 얼마나 큰지 그녀는 죽음보다 더하다고 표현했다. 존재의 사멸 만큼 세상에서 아픈 것이 있을까 싶은데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천년의 왕국'은 네덜란드인으로 태어나 한국인으로 생을 마감한 한 이방인의 처연한 삶을 그린 소설이다. 역사에 단 몇 줄로만 기억되었던 남자, 박연. 네덜란드 이름으로는 벨테브레. 선장이란 직함을 얻자마자 그의 배는 난파되었고, 36명의 선원들 가운데 요리사 에보켄과 어린 선원 데니슨만 살아남았다. 17세기 초엽, 설명할 길 없는 운명의 힘에 이끌려 그는 지금 제주도에 고립무원의 처지로 있다. 차라리 무인도였다면 오히려 희망을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휘몰아치는 운명의 소용돌이 앞에 그는 속수무책이다. 고국을 떠나올 때 그의 아내의 배는 불러있었다.

 

희안하게 생긴 자들이 제주도에 있다는 소식이 왕에게 전달되었다. 왕은 그들을 보기 원했고 목에 쇠사슬을 매단채 그들은 짐승처럼 끌려간다. 왕은 그들을 애처롭게 보지만 고국으로의 귀환은 불가함을 전한다. 이제 살아서는 길이 없다. 고국으로 돌아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데니슨은 마음의 병을 얻어 입을 열지 않고, 에보켄은 모든 스트레스를 입으로 풀거나 오입질로 풀려고 작정한 듯하다.

 

이 곳 조선의 왕은 타타르를 향해 과도하리 만큼 촉각을 세우고 있다. 자신의 아버지가 타타르에게 당한 굴욕을 잊을 수도 없거니와 자신 또한 타타르에 볼모로 잡혀있었기에 왕의 증오심은 대단하다. 왕의 마음속엔 자나깨나 타타르를 징벌하려는 생각 뿐이다. 그런 왕의 호의 속에 도성에 거하고 있지만 이 곳은 자신들이 있을 곳이 아니었다. 자신들은 이 곳 사람이 아니니까.

 

타타르에서 사신이 올 때 마다 그들은 숨어 있어야 했다. 드러나봐야 긁어 부스럼밖에 되지 않았다. 하루는 데니슨이 보이지 않는다. 데니슨은 귀환하는 타타르의 사신에게 뛰어들어가 자신의 처지를 고하고 이 일로 조정은 발칵 뒤집힌다. 모두의 목숨이 위험해졌다. 왕은 이들을 감싸고 싶지만 마땅한 명분이 없다. 결국 데니슨에게 죽을 때까지 검투를 하라는 형벌이 내려지고 데니슨의 싸움을 보던 벨테브레는 그만 기절하고 만다. 비록 목숨은 건졌지만 데니슨은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음을 맞이한다. 이제 벨테브레와 에보켄만 남았다.

 

작가 김경욱은 여기서 세 부류의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현실을 부정하다 못해 결국 생까지 부정하고만 데니슨적 양상과 무한 긍정의 힘으로 이방에서의 삶을 씩씩하게 살아내는 에보켄적 양상, 그리고 귀향을 원하지만 이 곳에 있을 수밖에 없음을 아프게 받아들이는 화자인 나의 방식이다. 그들은 비록 셋에 불과했지만 각기 다른 삶의 유형을 대변하고 있다. 김경욱은 어떤 것이 바람직하다며 그 어떤 것을 주창하고 있지 않다. 단지 그는 잊혀진 자의 고통을 소개할 뿐이다.

 

조선 사람이 아무리 잘해준다 한들 이 곳은 타국이었고, 그들은 이교도였다. 그들의 정감있는 언행이 자신들의 마음을 움직인다해도 잠간이었다. 누구도 그들의 빈 마음을 채울 수는 없었다. 세월이 흘렀다. 에보켄은 원래부터 이곳 사람이었던듯 사람들도 잘 사귀고 말도 잘한다. 그의 넉살과 적응력은 탁월하기만하다. 게다가 '자줏빛 구름'이라 불리는 영매와 살림까지 차린다. 홀로 남은 벨테브레는 대포 만드는 일에 전념한다. 그는 이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타타르가 전쟁을 일으켰다. 무서운 속도로 도성을 진입한 그들은 국왕이 피신한 강화도를 포위한다. 이 전쟁에 그들이 주요 임무를 맡았다. 그들의 싸움이었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을. 누구를 위해 싸워야 하며 누구를 위해 죽어야 하는지 그들은 답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이 국왕의 싸움에서 에보켄이 죽는다. 바다로 나오기 전 그는 대륙을 휩쓸고 다녔던 유명한 마녀 사냥꾼이었다.

 

그의 마녀 사냥에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사람들은 자신의 어머니와 쌍동이 여동생도 마녀 사냥에 희생됐다고 알려준다. 그는 고아였다. 그런데 후일 쌍동이 여동생을 마녀로 규정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 얘기를 들은 즉시 그는 바다로 나온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배를 탔다. 타인을 위해 죽음을 맞이하게 됨으로써 이제 그의 고된 삶이 비로소 멈추게 된다. 멀고 먼 이방 땅에서 맞는 죽음은 그에게는 안식이었다.

 

지금 나는 소설의 처음으로 돌아가 벨테브레가 박연이 되어 제주도에서 네덜란드인 하멜을 만나는 장면을 읽고 있다. 이제 그는 파란 눈의 조선인이 되었고 왕의 사자로 그 곳에 있다. 26년의 시차를 두고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하멜을 대하고 있다. 둘 다 입이 벌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다. 벨테브레, 그토록 원했지만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뱃 속에 있던 아이도, 햇살처럼 눈부셨던 아내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하멜은 달랐다. 마침내 탈출에 성공했고 고국으로 돌아가 이 곳에서의 일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벨테브레는 이곳에서도, 그곳에서도 단 몇 줄의 글로만 남았다. 잊혀진 자의 아픔을 그처럼 생생하게 삶으로 살아낸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아픔이 꼭 그만의 아픔만은 아니었다. 몸을 가진 모든 자의 아픔을 더 극적으로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그 뿐 아니라 우리도 결국 잊혀지고 말 것이다. 심지어는 자신에게 조차도 말이다. 잊혀짐이라는 인간의 숙명을 김경욱은 박연을 통해 보여주었고, 우리는 그를 통해 나를 보았다. 우리는 모두 잊혀진다. 그래서 세상은 슬픈 자들만 남아있다.

 

사진 출처: 나는 시시한 사람이다 http://www.cyworld.com/heebee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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