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세계사 - 대량학살이 문명사회에 남긴 상처
조지프 커민스 지음, 제효영 옮김 / 시그마북스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2009년 겨울, 아이리스란 드라마가 한창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을 때였다. 당시 주연배우였던 이병헌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임무를 수행한 후 버림을 받는 정보요원 역을 하고 있었다. 고립무원의 처지에 부상까지 당한 몸으로 숨을 곳을 찾아 헤매이던 그의 모습은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가슴을 짠하게 했. 이병헌은 혼신의 힘을 다해 맡은 역을 연기했고, 자신이 겪은 기막힌 일들과 비통함을 절절하게 표현했다. 드라마의 결말은 이병헌이 피격되는 것으로 마무리 됐는데, 자신의 서러운 죽음까지 처절하게 연기해야 했던 배우를 보면서 내심 걱정이 됐다. 저 정도의 몰입이라면 분명히 배우도 내상을 입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는 사람도 눈물이 날 정도였는데 몇 배의 슬픔을 감내하면서 연기하는 배우야 말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책을 읽고난 후 배우들이 떠올랐다. 작품이 끝나도 배우들은 한동안 자신이 맡은 역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배우도 아니었고 몰입도 그들만 못했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뒤 내 마음은 암담함 그 자체였다. 책을 읽은지 여러 날이 지나도록 글을 쓸 수 없었다. 마음이 정리되어야 하는데 정리는 커녕 충격적인 사실들을 소화해 내는데에도 내가 가진 에너지를 다 밀어넣어야 했다. 인간이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막연히 아는 것과 사진을 통해 실상을 접하는 것은 여파가 달랐다.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저지른 만행이 이렇게까지 잔인하고 잔혹할 수 있는지, 도를 넘어선 역사적 현장을 본 것에 대해 나는 후회했다.

 

'잔혹한 세계사'는 지난 12월, 근 한달간을 손에 잡고 있던 책이다. 내용 자체는 관심을 끌었지만 계속해서 읽기가 심적으로 힘들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인류의 역사가 인간의 피와 살, 그리고 뼈로 세워졌다고 언급했다. 이 문장을 처음 보았을 때 독자의 흥미를 끌기 위해 의도적으로 과장한 문구라 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잔혹한 책이었다. 세계 최초의 대량 학살인 기원전 146년 로마의 카르타고 멸망을 필두로, 1995년 보스니아의 대량 살육까지 왜 사람을 죽였으며 그 결과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20여개에 가까운 역사적 사례에서 저자는 몇 가지의 공통점을 발견해 간단히 정리해 주었다.

 

1. 전 세계 역사 속의 거대 단일 국가, 혹은 정치적인 대규모 운동에서, 그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 대량 학살의 힘을 빌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게다가 대량 학살에는 선전 활동이라는 공통적 요소가 있다. 피해자 측과 학살을 자행한 양측 선전원들은 집단학살이 더 나은 정치적 결과를 얻기 위한 과정이라며 사실을 왜곡한다.

2. 사실을 감추기 위해 가해자가 피해자를 비난하는 역겨운 현상이 발견된다.

3. 여성을 끔찍한 방식으로 취급한다. 학살이 시작되면 여성에게는 강간을 비롯한 사지절단과 같은 가장 잔인한 방식이 적용되고 피해자들은 극도의 공포, 경악, 뿌리 깊은 분노를 느낀다.

 

모든 학살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지만, 특히 20세기 들어 인종청소와 같은 대량학살은 어느 만큼 피를 흘려야 민족간의 증오가 사라질 수 있을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질문이 됐다. 1915년부터 3년간에 걸쳐 일어났던 아르메니아 학살 사건은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100만명이 넘는 아르메니아인이 터키인들에게 살해당한 20세기 최초의 대량살육이다. 그러나 이 끝간데 없는 슬픔도 20세기 말에이르면 이제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 총칼을 휘두르는 비극을 초래하고 만다. 1995년 보스니아 동부 스레브레니차에서 보스니아 이슬람교도가 세르비아군과 비정규군에 의해 멸종대상이 되어 무방비상태에서 살해를 당했다. 당시 유럽연합과 나토, 미국은 세르비아계 기독교인들이 보스니아계 이슬람교도 수천 명을 살해하는 것을 알고도 방관했다.

 

이뿐 아니다. 1994년 4월부터 7월까지 르완다에서 있었던 후투족에 의한 투치족 학살 사건은 단 석 달 만에 투치족 80만명의 생명을 앗아가는 유혈사태를 불러온다. 이는 르완다 투치족 전체 인구의 75퍼센트에 해당되는 수였다. 투치족에 대한 후투적의 반감이 대통령의 암살사건으로 촉발돼 대량학살로 이어진 르완다의 비극은, '나치의 유대인 말살 이후 실제 목격된 사건 중에서 가장 끔찍하고 체계적인 대량학살'이란 말로도 묘사된 바 있을 정도로 잔혹했다. 식사를 하고 사람을 죽이고, 또 식사를 하고 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마치 일상처럼 100일이나 이어졌다. 그러나 이보다 더 끔찍한 것은 르완다 사태를 예견하고도 이를 막기위한 조치를 르완다와 밀접했던 강대국 중 어느 나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르완다 대학살

 

또한 우리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캄보디아에서 있었던 대량살육은 더 어마어마하다. 크메르 루주가 그 땅을 피로 물들이고 있을 때 그의 손 아래서 무려 150만에서 200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이는 국가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된다. 이 대량학살로 전 국토는 묘지화 되었고 현재 캄보디아 국민의 반 이상이 21세 이하다. 대량학살로 인해 한 세대 전체의 뿌리가 뽑힌 것이다.

 

캄보디아 대량살육

 

소련에 의한 대학살도 있다. 1940년 소련 비밀경찰에 의해 폴란드의 가장 우수한 관리들 2만 2000명이 조직적으로 살해된 카틴 숲 대학살 사건은 한 나라의 최고 지도부를 빼앗긴 대참사였다. 소련은 이 학살을 부인하거나 나치의 소행으로 돌렸고, 당시 사건의 실체를 알고 있었던 미국은 진실이 알려졌을때의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다 판단하고는 묻어버렸다. 이 일은 근 50년이라는 오랜 시간동안 비밀리에 붙여졌었다. 그 밖에도 천안문 사건과 중국 난징 대량살육,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등이 사진과 사료와 함께 생존자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카틴 숲 대학살

 

그렇다면 이제 대량학살은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과거의 아픔으로만 남을 뿐인가? 불행히도 이 책은 그렇지 않을 거라는 부정적 결말을 예견한다.

 

'폭력은 사회의 표면 그 바로 아래에서 늘 끓어오르는 요소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의식과 의지, 법, 사회적 관습에 의해 억제되고 있다. 전쟁 중인 상황에서도 폭력은 인권조약과 신사도, 전통적인 교전수칙에 의거해 어느 정도까지 제지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 번씩 통제불능 상태로 분출되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잔혹행위가 촉발된다.'

 

저자는 대량학살이 계속 진행될 수 있었던 근본적 원인을 인간 본성에서 찾고 있다. 가슴 서늘한 말이다. 저자는 인간안에 얼마나 거대한 시한폭탄이 있는지, 그리고 도화선이 어디인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이보다 더 냉정하고 무서운 질문은 맨 마지막 표지에 적혀있다. 저자는 이 말을 하고 싶어 이 책을 썼으리라 짐작된다. 나 또한 이 글을 읽고 며칠을 고민했다. '그것이 인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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