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어드는 아이 트리혼 동화는 내 친구 52
플로렌스 패리 하이드 지음, 에드워드 고리 그림, 이주희 옮김 / 논장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눈은 참 특이한 신체기관이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많은 말을 한다. 입이 하루종일 떠들어도 전하지 못하는 말을 눈은 지긋이 응시하는 동작 하나로 끝내 버린다. 세상이 이렇게 시끄럽고 쓸데 없는 말들로 넘쳐나는 건 순전히 눈을 보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눈만 보고 말해도 세상의 소음과 겉치레는 줄어들 것 같다. 눈이 가지고 있는 불가시적 기능이다.

나 또한 눈을 보고 말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습관을 들이지 않았다. 눈을 보고 말하려면 의지를 동원해야 가능하다. 그런데 눈을 보고 말하면 희안한 일이 생긴다. 어린 내 딸의 경우는 표정부터 달라진다. 어린 딸과 내가 눈을 보고 말할 때, 달라진 아이의 얼굴엔 미소가 와있고 목소리는 낮아져 있으며 톤도 변화해 있다. 내 눈이 딸 아이의 눈에 맞닿는 순간 아이는 온전히 내 안으로 들어오며 나긋나긋해진 아이의 얼굴은 사랑으로 넘쳐난다. 과장 섞어 말하면 어떤 천사가 나타나 사랑의 지팡이를 살짝 휘두르는 것 같다.

눈을 보고 말하는 시간은 길지 않아도 된다. 눈을 보고 말하면 다른 건 할 수 없다. 오로지 보기만 하고 입을 열 뿐이다. 한 존재가 다른 한 존재에게 모든 것이 되고 전부를 내어주는 그 시간은 아무런 투자도 필요치 않다. 오직 마음만 있으면 된다. 그 시간은 마치 마법을 부린 듯 황홀하다. 그런데 정말 슬픈 건 그렇게 하기가 의외로 쉽지 않다는데 있다. 뭐 그리 대단하고 엄청난 일을 하는지 사랑하는 자식에게조차도 나는 시간의 일부를 못내주고 있다. 마음이 바쁘면 마음을 나누기 힘들다. 이 바쁜 마음을 내려놓아야 나도 아이도 행복할 수 있겠다.

오랜만의 수작이라 할 만큼 공감이 가는 책을 읽었다. 구입한지 좀 됐는데 딸 아이에게 읽으라고 준 후 정작 엄마인 나는 읽지도 않았다. 표지 그림이 좀 딱딱하게 느껴져 괜히 샀나 하고 잠깐 후회했던 책이었다. 요즘은 동화책들이 잘 나와서 동화책만 읽어도 아이들이 잘 자라겠다 싶지만, 엄마가 함께 하지 않는 동화책은 이야기에 머물 뿐 추억이나 지혜로 전환되지 않는다. 그런 책이 되고 말 뻔 했다. 엄마인 내가 먼저 읽은 후 아이에게 읽게 해야 했다. 그런데 게으른 엄마인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고만 고만한 내용일거라고 생각하고 무시했던 거다. 세상에 어떤 것도 무시하거나 무시당할 것은 없는데......교만했던 내 자신에게 노란 카드를 준다.  

'줄어드는 아이 트리혼'은 무관심한 부모에게서 자라나는 아이에게 어떤 일이 생길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어느날 갑자기 트리혼의 키가 줄어든다. 늘 손이 닿던 선반에 손이 닿질 않고 옷이 커지기 시작한다. 놀란 아이는 엄마에게 말하지만 엄마는 아이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자신만의 고민 에 빠져 딴 소리만 한다. 식탁에서도 엄마 아빠의 화제는 트리혼이 아니다. 아이는 자신의 변화를 진지하게 이야기하지만 부모는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한 번 더 말하자 그때서야 아이를 보고는 달라졌다는 것을 안다. 엄마는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터진다며 짜증스런 반응을 보인다. 부모의 반응에 아이는 괜히 미안해지고 몸이 더 움츠러진다. 부모는 아이가 있는데도 말을 조심하지 않는다. 부모는 아이의 상태에 대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만 염려하고 있다. 아이의 키는 더 작아진다. 다음날도 엄마와 트리혼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눈이 마주치질 않는다. 엄마가 보는 것은 아이가 아니라 자신이 싫어하는 행위를 하는 아이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엄마는 아이가 귀찮은거다.

이제 트리혼의 키는 유치원생처럼 작아진다.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도, 학교 선생님도 아이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들은 아이를 보지 않고 아이의 작아진 키만 본 것이다. 아이가 아무리 설명해도 그 설명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선생님은 아이의 작아진 키를 빨리 해결해야 할 문제로만 인식한다. 줄어든 키로 모든 것이 불편해졌건만 선생님은 이를 측은하게 여기기는 커녕 특별 취급해 줄 수 없다는 규칙을 내세워 트리혼을 문제아 취급 한 후 교장실로 데려간다. 교장 선생님의 비서는 시간을 절약해야 한다며 아이를 쳐다보지도 않은채 종이를 건낸다. 아이는 자신의 상황을 힘을 다해 쓴다. 그런데 교장선생님 또한 다를 바 없다. 교장 선생님은 아이의 줄어든 키를 그간의 경험을 동원해 해결해 주려한다. 아이의 키는 더 작아졌다.

집에 돌아와서도 트리혼은 배려를 받지 못한다. 엄마는 좋은 엄마가 되려고 애썼다며 아이의 상태보다 자신이 욕먹을 일을 염려해 눈물을 흘리고 있고, 아빠는 병원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 원한다. 이제 아이는 너무도 작아졌다. 간신히 뛰어내린 침대 밑에는 예전에 경품으로 받은 선물이 있다. 상자안에는 '키가 쑥쑥 크는 키다리 놀이'라는 놀이기구가 들어있다. 혼자서 놀고 있는 트리혼의 키가 쑥쑥 커진다. 이제 아이의 키는 원래대로 됐고 식탁에 가서 아이는 엄마에게 키가 예전대로 됐다고 전한다. 트리혼과 엄마의 눈이 처음으로 마주친다. 저녁이 되었다. 아이는 텔레비전을 보다 자신의 온 몸이 연두색으로 변한 걸 깨닫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면 모를거라고 생각하며 말하지 않겠다 다짐한다. 마침 텔레비전 소리를 좀 줄이라고 온 엄마는 배를 깔고 누워 있는 아이의 뒤통수를 보며 '좀 있다 손님이 오니 머리 좀 빗으라' 말하고는 부엌으로 돌아간다.

어린아이가 처한 소통 부재의 현실을 작가는 트리혼이라는 아이를 통해 실제 공간 속에서 자세히 보여준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아이는 이해 받지 못한다. 아이의 상황은 문제적 상황으로만 인식되었고, 아이는 키가 줄어들어 힘든 아이가 아니라 문제거리를 가지고 온 문제아로 취급된다. 아이는 진정한 배려를 어디서도 받지 못하며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한다. 도움을 주려는 어른들은 아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상황만 쳐다보았고, 진짜로 중요한 것은 간과한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이해와 관심이었지 줄어든 키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문제 상황이 해결됐음에도 아이는 또 다시 문제거리를 만나게 된다.

트레혼의 상황은 건조한 느낌의 그림과 무표정하거나 우울한 시선 처리, 메마른 대화로 잘 드러났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듯한 아이의 집은, 사랑보다는 부모로서의 의무나 책임에 의해 양육되는 듯한 아이의 현실을 더 극명히 그려내는 장치가 되고, 마주치지 않는 시선들은 양육의 책임자들과 함께 있어도 진실한 양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의 상황을 더 극적으로 보여준다. 부모가 아이의 눈을 한번만이라도 제대로 보았다면 아이의 무표정한 얼굴은 달라져 있을 것 같다. 아이는 자신을 닫아버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해받지 못했을 때도 흥분하지 않고 차분했던 아이의 표정은 아이가 오랜 시간을 그렇게 살아 왔던 것을 암시한다.

무표정한 트리혼의 표정에서 내 딸의 모습은 없는지, 나는 지금 조심스레 살펴본다. 엄마의 모습에서 내 모습은 없는지, 점검해본다. 때때로 어른이란 이유로 어린 딸에게 무례할 때가 있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아이를 규제할 때도 있었다. 세상에서 천사란 말이 어울리는 유일한 대상이 아이들인데, 그 아이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이제부터는 입으로 사랑을 말하지 않겠다. 하던 일을 내려놓고 눈으로 말하려 노력하겠다. 너를 사랑한다 소리치지 않고 눈으로 조용히 바라보겠다. 그래서 사랑으로 너를 뛰놀게 하겠다. 내 딸의 얼굴에서 트리혼의 흔적이 사라졌을 때 트리혼 엄마의 무표정한 얼굴도 내 얼굴에서 사라질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