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F/B1 일층, 지하 일층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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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물컹물컹한 자의식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 나라 문학판에 작가 김중혁이 버티고 있음은 하나의 축복이다" 책 뒤편에 적힌 문학평론가(김윤식)의 찬사는 다소 불편한 감은 있지만, 왠지 마구 부정할 수는 없는 말이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재미만 추구하면 시시하고, 너무 무겁기만 하면 부담스럽다. 그 중간을 타기가 무척 어려울 것 같은데 작가 김중혁의 소설들은 이 중간쯤을 교묘하고 재치 있게 머무르는 듯하다.

 

 직접 발을 딛고, 냄새를 맡고, 벽을 만져봐야만 알 수 있는 도시의 느낌이 있다. 이쪽 동네는 저쪽 동네와 다르고, 각 동네에 사는 사람의 성향들도 다르다. 오래전 다른 곳으로 이사를 와서 십 년 동안 거닐지 못했던 나의 옛날 동네는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고, 못 보던 간판들이 생겼다. 벽에 풀이 자라고, 도로도 변했다. 어딘지 모르게 세련되고 발전된 것 같다는 느낌과 아직도 예전 그대로의 공기가 남아 있다는 느낌이 혼재했다. 아마도 그 공기 속에 내 어린 시절의 삶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도시의 골목 곳곳과, 그곳에 사는 제각기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김중혁의 소설들은 내가 거쳐간 도시의 풍경과 그 속의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한다. 어릴 적 동네 놀이터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전설을 친구들과 속삭이던 모습을 추억하게 하는 ('냇가로 나와'), 도시의 변두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상상하거나 ('바질'), 미래의 좌절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과 어떤 부정적인 상황 ('유리의 도시')을 그리기도 한다. 독특한 상상력 속에서 작가의 섬세한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도 있다. <1F/B1>은 수많은 건물들의 '사이'에 숨어 도시의 흐름을 관찰하고 돌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크라샤>는 마술이라는 소재를 통해 소멸과 기억에 대하여 이야기를 펼친다.

 

"내가 만들고 싶은 도시가 있었다. 모든 골목과 골목이 이어져있고, 미로와 대로의 구분이 모호하고, 골목을 돌아설 때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또 다른 풍경이 이어지며, 자신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기도 쉽지 않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갈래길이 존재하는 도시를 만들고 싶었다. 도시의 외곽에는 바다가 있어,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다가 문득 코끝으로 비린내가 훅 끼치는 순간 파도가 자신에게 몰려드는 풍경을 사람들에게 선사하고 싶었다. (32쪽, C1+y = :[8]:)

 

 수록된 일곱 편의 소설들이 모두 재미있었지만, 특별히 좋았던 단편은 책의 맨 앞에 위치해 '이런 소설을 보여줄게'라고 말하는 듯한 <C1+y = :[8]:>라는 작품이었다.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아이들의 거칠고 원초적인 낙서를 따라가다 보면, 도시 속의 작은 도시 같은 보드빈터가 등장한다. 왁자지껄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바퀴자국이 섞인 도시 속 가장 후미지고 눈에 띄지 않는 곳, 숨겨진 골목길을 따라 새로운 장소를 발견하는 경험은 정글 속 못지않게 흥미롭다. 우리가 거닐지 못한 길, 가보지 못한 곳, 도시를 형성하는 작은 하나하나, 도시 속의 '사이'를 쫓는 작가의 섬세한 시선이 좋아서 그의 작품을 더 읽어보려 한다.

 

 

96쪽, 바질
좁은 골목을 걸어 경사가 작은 언덕을 올라가면 사방으로 또다른 골목길이 그물처럼 얽혀 있는 곳이었다. 박상훈은 하늘 위에서 골목들을 꼭 한 번 내려다보고 싶었다. 그물은 얼마나 넓은지, 얼마나 촘촘한지 보고 싶었다. 손가락으로 골목길을 따라 선을 그어보고 싶었다.

133쪽,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모든 곡선은 직선이야.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돼.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안개가 더욱 짙어져 있었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시간은 충분했다. 오늘밤 안으로만, 아침이 되기 전까지만 모든 작업을 끝내면 됐다.

179쪽, 1F/B1
일층과 이층 사이, 이층과 삼층 사이, 삼층과 사층 사이… … 저는 그 표지판들을 볼 때마다 우리의 처지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특히 숫자와 숫자 사이에 있는 슬래시 기호(/)를 볼 때마다 우리의 처지가 딱 저렇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층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우리는 언제나 끼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곳도 저곳도 아닌, 그저 사이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273쪽, 크라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안다. 소멸된 것들은 되살아날 수 없다. 그리고 찢어진 것들은 절대 다시 붙지 않는다. 나는 삶과 마술을 때때로 바꾸고 싶어진다. 화장지가 붙는 대신 어머니가 되살아나는 장면을, 스카프가 비둘기로 변하는 대신 돈으로 변하는 장면을, 꿈꾼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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