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합
한창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고 나서

 

 여행이 주는 맛은 방방곡곡 아름다운 절경과 생소한 체험에 있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도시에서 자란 나에게 그 맛은 땅의 끝, 비릿하고 시원한 냄새가 나는 바다로 갈 때 더욱 진해진다. 산과 언덕에 다닥다닥 자리 잡은 작은 집들, 혹은 밤에도 빛나는 높은 건물과 바다의 오묘한 조화, 항구에 묶여 있는 어선들의 풍경이 생소하지만, 매혹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보는 그런 풍경들 말고, 조금 더 깊이, 좁게 들어가면 강한 생명력을 가진 사람들이 보인다. 한적한 해변에 쭈그려 앉아 바닷물에 떠내려온 미역을 건지는 꼬마와 그의 엄마로 보이는 정다운 모습, 마치 너무나 익숙한 자동차를 몰듯 흔들리는 배의 키를 잡고 있는 햇볕에 탄 아저씨의 모습들. 여행할 틈이 생길 때마다 가능한 한 다시 그곳으로 향하고자 하는 마음은 바로 이 모습을 그리워함에서다.

 

 

 그리고 그곳의 냄새에 취해, 그곳에 매력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는 한창훈 작가의 책을 읽으며 대리만족을 한다. 뼛속까지 '바닷사람'인 그의 책들에는 바닷냄새가 물씬 풍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장편소설 『홍합』은 아름답고 혹독한 바다의 모습을 그리는 데 중점을 두진 않는다. 오히려 바다는 배경으로 존재한 채, 그보다 더 좁은, 구석구석의 '사람'들을 관찰한다. 좁은 장소로 선택한 곳은 '홍합 공장'이다. 차에서 실어온 수많은 홍합을 까고, 삶고, 깨끗이 씻어 얼려 포장하는 '삶의 현장' 속에서 작가는 땀 흘리는 그들의 노동을 본다.

 

 

새벽에 일어나 아이들을 먹여 학교 보내고 저는 도시락 하나 싸들고 공장에 나와 일을 하고 점심 땐 식은 밥을 두고 망연자실 먼 산이나 한동안 바라보다가 꾸역꾸역 뱃속에 집어넣고, 퇴근해서는 자꾸 가라앉으려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또 아이들 밥 먹여 재우고 천장이나 쳐다보다가 엉엉 우는 날들이었다. 그렇게 사는 것도 하는 것이라면 산다는 게 그런 것이었다. (274쪽) 

 

 세심한 수작업을 필요로 하는 일의 특성상, 홍합 공장에는 많은 아낙네가 모여든다. 자신의 이름 대신, 'ㅇㅇ네'와 같은 자식의 이름으로 불리는 그들의 삶은 사투리를 그대로 살려 적나라하게 표현된 수다와 우스갯소리 속에 녹아든다. 그 속을 보면 어느 하나 순탄한 인생들이 없다. 남편에게 손찌검을 당하고, 버림받고, 술과 노름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시어머니의 잔소리는 예삿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 서럽고 서러운 인생사를 수다로 풀어낸다. 제각기 사연들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그 인생사를 구구절절 풀어내고, 분노하여 서로 욕을 뱉어주고, 복수 해주겠다며 소매 걷어붙인다는 이들의 수다는 '어찌 됐든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이겠다. 삶의 동력, 웃음 그리고 해학. 작가는 그들의 녹록지 않은 인생을 그저 구슬프게 읊지 않고, 마치 판소리처럼 신명 나고 능청스럽게 전해준다.

 

 

 홍합 공장 속 사람들의 인생 속에서 약간은 다른 분위기로 이야기되는 주인공의 사랑도, 그들을 보는 작가의 시선만큼이나 담백하다. "산다는 게 그런 것이었다."라는 철학은 사랑에도 어쩔 수 없이 적용되는 것일까. 자그맣게 피어나 설레고 두근거리기만 한 사랑도 삶의 무게와 저울질 되어 아스러지지만, 그들은 한탄하지 않는다. 그렇게 사는 것도 사는 것이라면 산다는 게 그런 것인 것처럼, 사랑도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었으니까.

 

 

 소설 『홍합』은 분명 아름답게 빛나는 서정적인 언어들로 가득 찬 소설은 아니다. 작가가 소설 속 말한 바에 의하면 '촉촉하게 달궈진 닳은 굳은살' 같은 소설에 가깝다. 감정을 다독이기보다는, 퍽퍽 두드리거나 긁어 없애버리는 식이다. 하지만 이 거친 '굳은살' 같은 소설은 우리네 삶을 품고 있어 거칠고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다. 그래서 때로는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더군다나 그 모든 것을 표현한 작가의 글에 어찌 빠지지 않을 수 있으랴.

 

  

 

 

Written by. 리니

한국소설/ 제3회 한계레문학상 수상작 

소장하고 있는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하루에 네댓 번씩 저 사는 마을로 홍합을 실러 온 차라는 걸 뻔히 아는 터라 여자는 스스럼없이 안면을 붙여 왔다. 하긴 그게 한 세월 묵은 여인네들의 장기이기는 했다. 그네들에게 세월이란, 수줍음이 무늬가 되던 몸에서 독기가 새록새록 피어나오다가 끝내 몰염치의 아성으로 굳어지는, 그 독한 시간대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의 몸에는 부드러운 맨살도 있고 일에 혹독하게 달궈진 끝에 반들반들 닳은 굳은살이 있듯이 사람들 중에도 교양으로 제정신의 꽃을 피우는 부류와 이렇게 딱딱한 살로 차가운 바닥을 버텨내주는 부류가 있었다. (10쪽)

"입고(入庫) 다 됐소."

"이, 알았어."

냉동공장 황기사가 단추들을 눌러 냉동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시끄럽던 기계가 더 요란해졌다. 이제 냉동실은 영하 삼십오 도까지 온도가 떨어져 홍합을 얼릴 것이다. 어미 몸에서 뿔뿔이 뿜어져 나와 바닷물을 타고 흐르다가 아무 데고 저 몸 닿는 곳에 뿌리를 내리고 몸을 피웠다가 양식줄에 촘촘이 묶여 살을 키운 홍합은 현장에서 솥에 푹 삶겨 뜨거운 맛을 보고는 벌러덩 벌어져 흐물흐물 고물고물하다가 껍질과 떨어져 이렇듯 차가운 맛을 보게 된 것이다. 하루 종일 삶기고 씻긴 저것들은 밤새 꽁꽁 얼었다가 다음날 낱개로 떨어져 박스 포장이 된 다음 다시 냉장실로 옮겨지고는 훗날 컨테이너에 실려 멀리 유럽으로 갈 터였다. 이름만 들어본 먼 외국으로 가는 것도 그렇지만 새끼 두셋 낳아 반평생 뒷바라지로 허덕이는 인간들에 비하면 어쩌면 저 알아서 흘러가고 저 알아서 크는 이것은 훨씬 더 고급스러운 생물일지도 몰랐다. (19쪽)

풀과 나무에 물이 오르고 겨우내 겨울잠 자던 물이 몸 풀고 흘러내리는 봄이나 풀과 나무가 기운을 뿜어내다가 도가 지나쳐 얼굴이 붉어지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가죽에 윤기가 도는 가을이면 시간은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손아귀로 움켜진 한줌 물처럼 절로 흘러가버리는 거였다. 그것은 인생에서 청춘과 같아 지금이 좋을 때구나 싶어지면 이미 화려한 시간대의 끝물이어서 사람의 생이란 게 언제나 시간보다는 한 호흡 뒤지는 물건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란 무서운 것이었고 살아 있는 생물 같았다. (210쪽)

커피와 비스킷은 다과(茶菓)의 대명사이면서 한담(閑談)보다는 권태를 표현하는 것으로 위치가 격하되었다. 저 권태의 여대생들이 그렇게 한 사 년 살아보니 남는 것은 결혼하기에 적당한 나이가 되었다는 것말고는 없다고, 차라리 돈이나 벌고 사회 경험이나 하는 게 낫다고 노련하게 말할지라도 그 속에는 아무런 삶의 근력이 없게 마련이었다. 하여 저 솔로몬이 떠들었던, 모든 영화(榮華)가 다 부질없고 헛되도다,는 말처럼 부질없고 헛된 게 없었다. 넘치는 잔과 배부름의 여가(餘假)와 권태를 한번도 맛보지 못한 이들의 마음을 바늘 끝만큼도 짐작하지 못한 소리였다. 그 뇌까림은, 영화가 부질없음을 깨닫기 위해서는, 풍요가 넘실대는 그 강물에 빠져 허우적대 보기 전에는 수천 수만의 말씀이 다 걸레 조각이었다. 아프리카 원주민에게 어떻게 얼음의 맛을 설명할 수 있을까. 손을 담가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투성인데, 그 말 외에 어떤 것이 삶을 설명할 수 있을까. (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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