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신 판 세계문학의 숲 41
크누트 함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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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작가의 아름다운 문장들 <목신 판 - 크누트 함순>

 

 

 

 

 ​ After Reading                                                                                                                                  

 

 

 

 

  ​오래 전 읽었던 크누트 함순의 책 <굶주림>은 제목 자체에서도 보이듯, 극한의 상황에서 자존심과 신념을 지키려는 주인공의 처절한 움직임에서 울컥한 감정이 밀려들었던 책이었다. '굶주림'이라는 소재만을 가지고, 어떠한 사물을 보고 쏟아지는 서글픈 감정이 그렇게나 표현될 수 있다는 것에 놀랍고 충격을 많이 받았던 작품이다. 그렇게 '크누트 함순'이라는 이름은 뇌리에 박히게 되었고 (이름이 적잖이 특이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이지만 국내에서는 많은 작품을 만나보기 힘들었는데 새로 번역된 그의 작품을 발견하자마자 너무나 반가웠다. 국내 초역된 이 책은 중단편 소설이며, 이전에 봤던 <굶주림>과는 느낌이 확연히 다른 '고독한 사랑의 노래'다.

 목신 판. 실제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산과 숲, 들판, 목축의 신 '판'은 로마식 이름으로 '파우누스'라고도 불리며, 실제로 우리들에게는 그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자유롭고 장난기도 많았던 목신 '판'은 어느 날 아름다운 님프였던 '시링크스'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시링크스'는 그를 거부한다. 그런 그녀를 '판'은 끝까지 쫓아다니며 구애하지만, 그것에 못 견뎌했던 '시링크스'는 강의 신에게 사정하여 갈대로 변한다. 상심한 '판'은 그 갈대로 악기를 만들어 불고, 그 악기는 '판 파이프'라고 불리는 악기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크누트 함순의 <목신 판>에는 '판'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드는 주인공이 나온다. 정열적이며 감정에 충실한 주인공 '글란'은 숲에서 살며 세상을 방랑하고, 사회와는 동떨어져있는 그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간혹 가끔은 돌출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고독함을 안고 사는 그에게도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는데, 그녀는 잡힐 듯 말 듯, 이상한 행동으로 그를 갈팡질팡하게 만든다. 이 소설에는 그런 그녀의 대한 마음과 고민, 그리고 숲에서 사는 방랑자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부분들이 아름답게 그려진다. 특별한 점은 그들의 사랑이 - 이 소설은 꽤 오래전에 쓰였는데도 불구하고 - 너무나 자유분방하다는 것이다. 옮긴이의 해설에서는 이런 자유분방한 그들의 사랑을 선선하고 편안한 '북유럽'의 여름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의문을 품는다. 이후 2부에서 인도로 배경이 바뀌고 불타는 질투로 소설의 느낌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도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빅토리아>는 약간은 통속적인 로맨스를 그리고 있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소재다. 꼬이고 꼬이는 그들의 사랑,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아파하고, 절절하게 그 사랑을 읊는 주인공들의 말과 심리가 표현돼있으며, 초반부터 마치 동화처럼 이야기가 펼쳐진다.

​  전작에서 읽어 감명을 받았던 그의 멋진 문장들은 그대로였고, 전작의 '굶주림'이라는 소재로 인한 무거움을 다소 환기시켜, 아름답고 산뜻했다. '크누트 함순'이라는 이름은 다소 잘 알려지지 않은 감이 있지만, 유럽의 많은 작가들, 심지어 영미 작가들까지 - 토마스 만, 카프카, 막심 고리키,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등 - 영향을 미친 '근대 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훌륭하게 평가한다. 소설에 대한 구조나 장면들까지도 해석한 그들의 평가에 온전히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으나 (난 잘 모르니까요.), 자신의 체험이 가미된 그의 절절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읽는 느낌이 좋았다.

 

 

 

 

 

 

 

 ​ Underline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하다. 나는 밤이 이슥하도록 그곳에 누워 창밖을 내다본다. 그 시간에는 요정의 불빛이 들판과 숲 위를 떠다녔다. 해는 지고, 기름처럼 잔자난 수평선을 새빨간 빛으로 물들였다. 하늘은 어디나 탁 트이고 맑았다. 그 깨끗한 바다를 들여다보며 세상의 밑바닥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심장은 드러난 그 밑바닥에 닿아서 따뜻하게 고동치고, 거기에서 편안했다. 그 수평선은 왜 오늘 밤 자줏빛과 황금빛으로 자신을 장식하고 있는지, 세상의 그곳에서는 어떤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지 아무도 모를 거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별들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넓은 강에서 사람들이 뱃놀이를 하는 웅장하고 화려한 축제가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뱃놀이 일행은 저쪽으로 향하고 있다! 나는 눈을 감고 뱃놀이 일행과 동행하며, 생각이 내 머릿속을 항해하는 것을 상상했다. (21p, 목신 판)

  "희망은 이상한 거야. 그래, 아주 야릇한 거지. 너는 어느 날 아침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나게 되기를 바라면서 어떤 길을 걸을 수 있어. 그 만남이 실현될까? 아니지. 왜? 그 누군가는 그날 아침에 바빠서 다른 곳에 가 있으니까. 나는 전에 산에서 눈먼 사미인 노인을 알게 됐어. 그 노인은 58년 동안 아무것도 보지 못했는데, 이제 일흔 살이 넘었지. 그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자기가 점점 더 잘 볼 수 있다고 느꼈고, 상황이 꾸준히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했어. 불운한 일만 일어나지 않으면, 몇 년 뒤에는 태양을 분간할 수도 있을 거야. 그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검었지만 눈은 새하얀 색이었어. 진흙으로 지은 노인의 오두막에 함께 앉아서 담배를 피울 때, 노인은 눈이 멀기 전에 보았던 것들을 나에게 모두 말해주었지. 노인은 강건하고 대담했어. 감정도 없고, 파괴할 수 없는 존재였지. 노인은 희망을 잃지 않았어. 내가 떠날 준비가 되자, 노인은 나를 배웅하려고 밖으로 따라 나와서 여러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했지. '남쪽이 있고, 북쪽이 있네. 우선 이쪽으로 가게. 산을 조금 내려가면 저쪽으로 구부러지게.' '알았습니다!'하고 나는 말했지. 그러자 노인은 즐겁게 웃으면서 말했어. '4,50년 전에는 그걸 몰랐으니까, 그때보다 지금이 더 잘보이는 건 확실해. 상황이 계속 좋아지고 있어.' 그러고는 허리를 숙이고 오두막으로 다시 들어갔지. 그 영원한 오두막, 이 지상에 있는 그의 집으로. 그리고 몇 년 뒤에는 태양을 분간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가득 차서 여느 때처럼 다시 불 앞에 앉았지. 에바, 희망이란 우스운 거야. 예를 들면 나는 지금, 오늘 아침 길에서 만나지 못한 사람을 잊기를 바라고 있어."(137p, 목신 판)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장미꽃들 사이에서 속삭이는 바람 - 아니, 피 속의 노란 인광. 가장 늙고 가장 쇠약한 심장조차 끼어들지 않을 수 없는 '죽음의 무도'. 사랑은 밤이 다가오면 활짝 피는 마거리트 같고, 가벼운 입김에도 꽃잎을 닫고 살짝 만지기만 해도 죽어버리는 아네모네 같다.

  사랑은 그런 것. 사랑은 한 남자를 망칠 수도 있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도 있고, 그에게 다시 낙인을 찍을 수도 있다. 사랑은 변덕스러워서,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내일 밤은 낯선 이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은 또 한편으로는 불변성을 갖고 있어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봉인처럼 굳게 지속될 수도 있고, 죽음의 순간까지 꺼지지 않고 타오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랑은 하늘에 별이 빛나고 땅에 향기가 가득한 여름밤이다. 하지만 왜 사랑은 젊은이로 하여금 은밀한 길을 따라가게 하고 노인으로 하여금 외로운 방에서 발끝으로 서 있게 할까? 아아,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버섯밭으로, 신비롭고 무참한 독버섯이 자라는 무성하고 뻔뻔한 밭으로 바꾸어놓기 때문이다. (230p, 빅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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